<世蹟>의 기록
공의 휘(諱)는 둔(屯)으로 제학공(提學公) 휘상도(諱尙度)의 첫째 아드님이다. 홍무(洪武) 7년(1374, 공민왕 13)에 태어나시고, 20세가 되던 조선 태조 2년(1393)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셨다. 태조 5년(1396)에 벼슬이 좌사간(左司諫)에 오르고, 태종 9년(1409)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금물(禁物)을 가져온 혐의로 해주(海州)로 유배되었다. 세종 9년(1427)에 좌사간에 복직되고 1438년에 황해도 관찰사에 올랐다. 1440년에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1449년에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로 함길도(咸吉道) 지방의 기민구제사업(飢民救濟事業)을 살피러 가셨다. 이러한 내용은 태조, 태종, 세종 실록초(實錄抄)에 기재되었으나 후손들의 거주지가 북방(北方)에 있어서,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음이 유감이다. 남기신 시 2수가 있는데, 신계현(新溪縣)의 이락정(二樂亭) 판상운(板上韻)과 안음현(安陰縣) 판상운(板上韻)이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장연노씨(長淵盧氏)인데, 친가(親家)의 내력을 알 수 없다. 자제 두 분을 두었는데, 첫째 아드님인 처눌(處訥)은 맹산현감(孟山縣監)을 지냈고 둘째 아드님인 지눌(止訥)은 벼슬이 직장(直長)이었다. 묘는 흥해군(興海君) 묘소 좌측 언덕에 관찰공(觀察公)과 같은곳에 모셔져 있는데 표석(表石)이 있다.
자손들은 선대(先代)의 관직지(官職地)이며 외가(外家)의 연고지인 해주(海州) 지방에 이주하여 현재 장연(長淵), 안악(安岳), 은율(殷栗)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선조 년간인 1587~1588에 임연재(臨淵齋) 선조가 황해도 관찰사로 계시면서 곡강일파(曲江一派)들의 가첩(家牒)을 찾아, 그때까지 내려온 계보(系譜)를 밝히셨다. 그러나 그 뒤에 여러 차례 있었던 족보 편찬에 같이 하지 못했으니 매우 유감스럽다. 이후 때가 오면 동파지친(同派之親)을 찾아 명실공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관찰공(휘 둔)의 <족보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