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 [22]
2019. 05. 06(월)
가정의 달, 5월의 광야에서
온누리는 온통 꽃 세상이다. 올해는 꽃철이 일러 홀로 외롭던 목련 꽃이 지기 전에 진달래,
개나리가 피더니 지금은 철쭉과 영산홍이 활짝 꽃잎을 열었다.
‘4월을 내게 주면 나머지 달을 다 주겠다’고 한 스페인 속담에서 우리는 꽃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신록에서 생명의 환희를 느끼려 한 지혜를 본다. 이제 상춘은 5월을 맞아 절정을 이룰 것이고,
꽃과 신록을 찾는 일도 지금이 제철이다.
⌾․․․ 불쌍한 아버지, 우리의 이웃
5월이 되면 두 개의 충격이 지문처럼 살아난다. 하나는 주정으로 지새던 아버지가 여남은 살
안팎의 자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턱없이 솟은 전세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가장이 세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한 사건이다.
당시 많은 사람은 어린 자식들을 더 가엾게 생각했었다. 오죽했으면 자식이 아버지를 그랬을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면글면한 어머니를 때도 없이 구박하고 아이들에겐 폭군으로 군림한 비정의
아버지에게 더 많은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자식의 손에 죽은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신병에다 실직까지 한 가장이 받아온 중압감이
어떠했을 지는 익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알코올로 황폐해진 사람은 정신 질환 상태이기 보통이다.
그가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일생을 ‘아버지 죽인 자식’으로 가위 눌리며 살아야 할 자식을 만든다는
일은 상상치도 못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상징적 존재로 추락했다. 머슴이 된 아버지의 존재가 낙화처럼 날리고 있다.
흔히 여자가 층층시하라고 했지만 옛말이고, 남자는 여전히 층층이요 첩첩이다. 동료와 경쟁하고
상사에 굴신하며 실적 올리랴, 승진 신경 쓰랴… 경쟁만 더 치열해졌다.
그래도 예전엔 아버지의 권위란 게 있었다. 그가 집 짓는 목수라면 적어도 ‘우리 아버지가 지은
집’ 이라는 자부심을 자식들에게 남겼다. 지금은 까마득한 수십 층 빌딩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어떻게 비쳐질까. 거대한 구조물에 묻혀 버린 아버지 모습에서 우리 아버지는 빌딩을 짓는다는
우쭐함이 생길까?
현대의 아버지는 그렇게 왜소해져 버렸다. 월급쟁이 가장이 유일하게 어깨를 펴는 봉급날까지
퇴화해 전설이 되어 버렸다. 월급봉투를 툭 던져주면 속이야 어쨌든 고마워하던 아내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온라인 통장을 앞에 놓고 한숨짓는 아내에게 민망해진 쪽은 아버지다.
⌾․․․ '집 설움 없는 하늘나라'로 이사한 일가족
일가족 4명이 오른 전세비에 갈 곳을 마련 못하고, 끝내 내집 설움이 없는 하늘나라로 이사를
결행한 또 다른 아버지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남겼다.
“주님께선 좋은 아내를 주셨고 귀여운 자녀를 선물로 주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얼마나 행복한
가정인가….” 이렇게 시작한 유서를 남긴 이 가장은 바로 우리 이웃이었다. 이산화탄소에 깊이
잠들어가는 가족들 옆에서 대학 노트에 써내려간 유서에는 떨어진 눈물방울로 얼룩져 있었다.
“아버지 대부터 시작된 가난은 내게로 물려졌고 기적이 없는 한 이 가난은 대물림 될 것이다.
혼자 떠나려고 했지만 남은 가족들의 앞날이 불 보듯 뻔한데….” 이렇게 계속된 유서의 마지막
구절에는 “정치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셔서 더 이상 없는 자의 목을 누르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간절한 간구도 잊지 않은 선한 이웃이었다.
당시 여론은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 ‘그래도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지’ 하는 질책이 서로
비등했었다. 어쨌든 이 문제도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현실이었고, 개선 또한 우리의 몫이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가위 눌린 아버지는 여전히 눌린 채로, 무심히 흐르는
세월에 한숨짓고 있을 뿐이다.
⌾․․․ 자연의 섭리는 화해다
소외된 이웃은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뼈아픈 것은 무엇보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생명의
경시 풍조다. “이웃이 굶든 자기 두통에나 신경 쓰는 것”이 문명사회라고 꼬집은 이는 카네기다.
이웃이 죽은 지 나흘 만에 발견이 돼도 예사롭지 않게 취급되는 세상…. 200여명이 기거하는
고시원에서 20대 청년이 변사 나흘이 지난 후에 발견된 것이 그렇다. 같은 공기를 숨 쉬는
좁은 공간에서 일어난 이 참상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세 닢 주고 집 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는 우리 속담은 그 만큼 이웃의 중요성이 크다는
뜻일 게다. 아, 이웃의 가치가 언제 아스팔트길 위로 버려져 증발한 것일까?
물 오른 수목에서 푸름을 더하는 신록들, 들판에서 힘차게 키를 높이는 풀포기들….
유채꽃, 라일락 향기에 아이들 웃음소리까지 5월은 생명의 은총으로 넘쳐나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만 이웃과 등을 돌린채 살고 있다. 돌아보면 이 절기에 산하 가득 차오르는 생명의 기운은
자연과의 화해에서 비롯된다.
화해가 없는 자연은 생명을 키울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한다. 단절된 이웃과의 화해가 없는
삶이라면 이 또한 숨 쉬는 주검에 다름 아니겠는가? 우리가 계절의 여왕이라는 계절에, 우리끼리
5월의 나날을 축하하고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으로 어두운 그늘이 함께 커지고
있음을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정의 달을 지나면서 깊어지는 상념은 광야로 내몰리는 우리의 이웃이 더 이상 방치되지
않도록 사회적 공론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가정의 달이 음지도 살피는 그런 달로
삼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정한 '가정의 달'은 그래야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소설가. daum 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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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공감하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며
잘 보고있습니다!
쓸쓸한 현실에 마음이 아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푸른 5월 되시구요
음지도 살피는 가정의달
공감이 갑니다, 이해하
기 쉽게 좋은글 고맙슈
가슴 아픈 내용들, 사회의 비정함이~~~
양극화 현상이 끝과 끝이네 잘살수록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