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을 믿는 자는 게으르지 않고 거룩하며 부지런한 삶을 산다
은성아, 오늘은 12월의 첫 주일이다.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지난 11개월 동안에 여러 가지로 부족했던 삶을 회개하고, 남은 12월을 바르게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였지? 우리는 연초에 주님을 향하여 충성된 청지기의 삶을 소원하며 기도를 드리고, 연말이 되면 그것들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실천했는지를 되돌아보면서 충분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주님께 자비를 구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교정을 보았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도르트 신조의 한 부분이 생각났다. 먼저 그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24 주일
62문 : 그러나 우리의 선행은 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될 수 없으며 적어도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
답 :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하나님의 율법과 완전히 일치해야 하지만1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최상의 행위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2 1신 27:26; 갈 3:10. 2사 64:6.
63문 :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을지라도, 우리가 획득한 선행은 아무것도 아닙니까?1
답 : 이 보상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2 1마 5:12; 히 11:6. 2눅 17:10; 딤후 4:7,8.
64문 :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을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답 :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1 1마 7:18; 눅 6:43-45; 요 15:5.
나. 도르트 신조 다섯 번째 교리 성도의 견인 오류 6
잘못: 견인과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는 그 본성과 특성에 있어 사람들에게 거짓된 안정을 불러일으키고 경건과 선한 양심과 기도와 기타 경건의 훈련에 방해가 됩니다. 반대로 의심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반박: 이 잘못은 하나님의 은혜의 효력 있는 능력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잘못은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씀을 가지고 정반대로 가르친 사도 요한의 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게다가 이 잘못은 견인과 구원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그 외에 경건한 삶을 지속했던 구약과 신약 성도들의 모범을 볼 때 반박될 수 있습니다.
은성아, 내가 왜 이 부분을 생각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예정이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이 칼빈의 가르침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 전에 나와 만났던 분도 칼빈이 가르친 예정을 믿는 결과로 안일하고 불경건한 삶을 살게 된다고 이야기해서 왜 그렇게 생각할까 대단히 의아했다. 그런 문제는 이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도르트 신조에서 충분히 다루었는데, 그리고 내 생각에는 충분한 답변이 주어졌는데, 여전히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왜 예정을 믿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자연인으로 살다가 예수님을 믿고 중생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고 살아간다(엡 4:22-24).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가 된다(빌 3:20).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가 된다(골 1:13). 이렇게 신분이 바뀌면 자연히 삶의 자세도 바뀔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신분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요, 자연스러운 것이며,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1-3)
둘째 사랑을 깨달은 자의 반응을 생각해 보았다.
어떤 분은 사장님의 수종을 들면서 사장의 명령을 따라서 수동적으로 순종하던 비서가 사장님의 청혼을 받아들여 아내가 된 다음에는 자원하여 사장님의 삶을 돕고, 이전보다 더 부지런히 생활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아내로 표현하고,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스도인을 신부로 표현했다.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신부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깨달을수록 감사와 보답의 삶을 살 것이요(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내게 있는 귀한 것을 주님 앞에 다 바쳐도/ 주님 주신 큰 사랑엔 부족할 것 뿐입니다/ 구원하신 나의 주님 크신 은혜 생각하면/ 주께 힘써 바치겠네 아까울 것 무엇이랴(찬송가 51장 2절)”고 찬송할 것이다.
어떤 분은 종과 아들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종은 주인의 지시를 듣고 수동적으로 순종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여 적극적으로 일을 한다.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만 예수님은 아들로 충성했다고 하는 히브리서 3장 1-6절의 설명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역사에서 보면 포로로 잡혀 온 사람 중에서 뛰어난 종이 보이면 아들로 입양하는 일들이 있었고, 여자 종과 결혼하여 아내로 삼는 일도 있었다. 종일 때 주인을 섬기는 것과 자유인이 되어서 주인을 섬기는 것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자발적으로 열심히 사랑하고 헌신하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며, 겸손하게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고 고백한다.
셋째 성경에서나 기독교 역사에서 이 사실은 명백하게 증명된다.
먼저 빌레몬서를 보면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를 돌려 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몬 1:11-12) 전에는 무익한 자였던 자가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정을 입어 부름받은 자의 생활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보여준 실상을 보아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너희 개혁주의자들은 성화의 길에 더 열심을 내지 않을 핑계를 대기 위해 이것을 말한다. 너희는 주님께서 너희를 돕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지만 그것은 너희 개혁주의자들의 게으름에 대한 매우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칼빈주의자들은 성화의 길에서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아주 열성적이었지만 결코 자신들에게 그 공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자신들의 힘의 원천으로 인정했습니다. 자신들의 성화에서 이룬 업적에 소망의 근거를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선행으로 이룬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아는 것처럼,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노력 때문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중생의 씨를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보존하시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견인하려는 우리의 노력에서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존하심에 크나큰 기대를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보존하심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코르넬리스 프롱크 지음, 『도르트 신조 강해』, 황준호 옮김, pp. 415-416
은성아, 모세와 다윗의 삶과 바울과 칼빈의 삶을 생각해 보아라.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믿었던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들만 아니라 교회 역사에서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경건하고 충성된 분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를 굳게 믿었던 분들이다. 참 신자의 특색은 ‘감사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를 설명하면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제 2문에서 이렇게 묻고 답한다.
문 : 당신이 이러한 위로를 누리는 기쁨 가운데 살고 죽기 위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첫째는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심각한가? 둘째는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 구원받게 되었는가? 셋째는 내가 어떻게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나의 죄와 비참함의 심각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로서 이제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바르게 알아야 유일한 위로를 누리며 살고 죽을 수 있다고 한다. 감사해야 할 것을 알고 감사를 드리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악하거나 게으른 삶을 살 수가 없다. 주님의 달란트 비유를 보아도 이것이 분명하다. 오랜 후에 돌아온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에게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 23) 라고 말씀했고,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26)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30)라는 말씀을 했다. 나는 늘 ‘착하고 충성된 종’과 대조되는 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우리가 참 신자라면 악하고 게으른 생활을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