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강어귀 <忠婢順良殉節之淵 > 비문이 새겨진 바위
충비 순량이 순절한 물웅덩이
순량은 흥해군 북쪽 흥안리 이씨 아가씨의 몸종이다. 아가씨에게 남모를 원한이 있어서 이 물웅덩이에 빠져 죽었다. 여종이 뒤따라 뛰어 내리려고 하였는데, 민망(난처)하게도 그 어린 자식이 뒤따라오므로 달래어 집에 돌아가게 하고서는 물웅덩이로 와서 주인 아가씨의 시신을 끌어안고 죽었으니 곧 기해(숙종45, 1719)년 4월 24일의 일이었다. 그 48년 뒤인 숭정기원 3째 병술(영조42, 1766)년 8월 일에 행 흥해 군수 조성이 글씨를 쓰고 그 일을 적는다
(忠婢順良殉節之淵
順良 郡北 興安里 李娘婢也 娘有幽恨 沒于是淵 婢欲下從 憫其稚子隨後 誘使歸家 卽赴淵 抱娘屍而死 乃己亥四月二十四日也 後四十八年崇禎三丙戌八月 日 行郡守 趙峸 書而識之)
순량이 주인 아가씨를 따라 빠져 죽은 곡강천
* 일월향지(日月鄕誌)에 실린 ‘충비순량비(忠婢順良碑)’에 관한 글
본군 의창면 흥안동 조봉대(釣峯臺) 위 북미질부성에서 곡강어구 참포(槧浦)를 건너 남안석벽(南岸石壁)에 새긴 비(碑)다. 때는 조선 선조 16년 봄이었다. 계림(경주) 일사(逸士: 儒林) 혹은 제독(提督:將帥)의 지우(知友)가 흥해군수로 도임중(到任中)에 있어 유람차 흥해에 와서 지우인 군수를 방문하고 여러 날 묵게 되었다. 북미불성 아래 곡강어구가 흥해 명승지로서 저명하고 그 풍경이 절경이란 말을 듣고,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소풍겸에 그 주변에 이르니 양안절벽의 기암괴석이 난립한 양상, 곡강 백사장의 청류수(淸流水), 북미질부 산성의 고적(古蹟), 조봉대 아래의 녹음(綠陰), 금오산 화초(花草), 극목(極目)한 창랑(滄浪), 도음산 원경(遠景), 비학산 자색(紫色) 등 과연 천하의 절경이라. 더하여 花影去不留(화영거불류)의 녹수(錄水)와 호연(浩然)한 연어(鳶漁)에 도취하여 시 한 수 읊기를,
欲呼滄海 風呼登山 石壁雖難花笑立 風藏萬樹鳥啼新
(바다에서 목욕하고 산에 올라 바람 쐬니 / 위태로운 석벽 위에 꽃은 피어 웃고 섰고 / 나무에 잠긴 바람 새소리만 새롭더라)
꽃은 피어 만발하고 춘풍은 훈훈한데 청류수 시냇가에 절세미인 낭자 하나, 다락같은 검은 머리 등 뒤에서 출렁이며 화장저고리에 연분홍 치마 꽃과 같이 맵사리고 빨래하며 앉은 품이 마치 선녀와 같이 아름다웠다. 호탕한 경주일사(慶州逸士) 말위에 앉아 지나가며 詩 한 수 읊기를,
爾非三尺劍 能斷幾人腸(너는 석자 칼이 아닌데 몇 장부의 창자를 끊었는가).
설마 저 낭자가 이 시의 의미를 알까보냐 하고 조롱하며 경주일사 말 위에 앉아 호호당당(豪豪當當) 뽐내면서 지나가니, 빨래하던 낭자 고개 들어 시 한 수로 답하되,
我本荊南和是壁 奏城十五猶不易 遇然流浪曲江頭 况與鷄林一腐儒
( 나는 형남의 화시벽 같은 보배로서 주나라 열다섯 성(城)에 바꿀 수 없노라
우연히 곡강땅에 머무는 몸이로되 경주의 썩은 선비와 더불어 허할손가 )
* (註): 和是壁은 荊南의 寶玉으로 진의 시황제가 열다섯 성과 교환하자 하여 불응하였다 함,
설마 하던 경주 일사(逸士)는 촌락 한 여자의 유창한 문장에 안한(顔汗)의 모욕을 당하고 대답할 여지도 없이 황황히 말을 몰아 지우 흥해군수에게 달려와서 전후종말을 고하고 양반으로서 상촌(常村)의 일부녀(一婦女)에게 당한 모욕에 분함을 참지 못하였다.
흥해 군수가 크게 노하여 상놈의 자녀로서 문무겸전지량(文武兼全之兩)이요 금지옥엽지반(金枝玉葉之班)에게 교만무례한 행동이 어디 있느냐고 관노사령에게 명을 내려 낭자를 체포하여 즉각 대령할 것을 엄명하였다. 명령을 받고 관노사령이 뛰어가며 생각하니, 양반이 도도한들 제 얼마나 도도한고 李娘의 죄라한들 글 지은 죄뿐인데 양반이 조롱하며 지워 던진 시 한 수에 아무리 상놈인들 조롱시에 못 응하리. 군노사령인들 양심이 있어 차마 낭자를 체포하여 사도(使徒) 앞에 대령할 수 없었다. 흥안동에 도착하여 이장에게 李娘의 체포령을 전달하고, 비밀리에 낭자가 먼 곳으로 도피할 것을 권유하고 돌아와서 낭자가 멀리 출타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전하여 들은 李娘(李氏아가씨)은 자기일신에 어떤 굴욕을 당하여도 상관치 않으나 양반 모독의 누(累)가 부모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또 당시 봉건사회의 도의로 미혼여자가 선악사(善惡事)를 막론하고 관가 출입은 부도(婦道)가 허용치 아니하였다. 李娘은 고민하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울고 청산을 바라보고 탄식하였다. 좁은 여자라 이 고민이 번뇌의 탈출구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상놈의 봉건제도의 엄연한 계급, 상놈은 양반 앞에 의사표시의 자유조차 약탈당하고 철쇄(鐵鎖)줄에 얽매여 있는 봉건사회 제도를 저주하면서 죽음으로 저항할 것을 결심하고 부모에게 유서 한 장 남겨두고 몸종 순량(順良)에게만 낭자의 심중을 토하며 사랑하는 순량과 마지막 이별의 눈물을 나누고, 지금의 북미질부성 아래 곡강참포관소(曲江槧浦官沼)에 이르러 양반을 저주하는 천추의 한을 품고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李娘의 몸종 순량(順良)도 낭자가 자살한 관소에 이르러 낭자의 시신을 안고 순사(殉死)하였다. (이때 순량은 보채는 어린 자식을 달래어 돌려보내고 절벽에서 투신하였다고 함)
李郎과 몸종 순량이 순사한 48년 후에 조선 인조조에 趙峸(조성)이란 흥해군수가 이 순화미담(殉話美談)을 전하여 듣고 가련하고 애절한 정을 이기지 못하여 ‘충비순량지비’를 세웠는데, 건비위령일(建婢慰靈日)에 흥해군수 조성이가 낭독한 李娘과 順良의 진혼추도사가 당대명문으로서 듣는 사람을 하여금 구곡간장을 도려내고 폐부를 찔렀다고 하며, 이 명문 추도사가 곡강서원에 보관중 고종 무진년 대원국 서원철폐 시에 곡강서원과 함께 영원히 분실되었다 함은 나 같은 사학도로서는 큰 유감지사이며, 건비제막 당일에 곡강천 물이 피와 같이 붉고, 참포 양안(兩岸)에 벌레소리 끊기고, 추우음풍일월(秋雨陰風日月)이 광채가 없더라고 전하고 있다.
*
충비순량령(忠婢順良靈)에게 / 박일천(일월향지 발행인)
천척절벽 다락이냐 가을 풀만 쓸쓸하고
낭떠러진 바위 밑에 강물 출렁 파도치네
지난 일 꿈이런가 순량비만 홀로 서서
조봉대 넘는 구름 시름인가 바라보네
*
*
비녀(婢女) 순량(順良)을 위하여
프래카드의 장군님 초상이 비에 젖는다고
달려가 발을 구르며 울먹이는 북조선 처녀들,
제 부모가 장대비를 맞은들 그리 안타까울까
모시던 주인 아가씨가 비명에 죽었는데
몸종이 살아있는 게 도리가 아니라고
자식도 뿌리치고 따라죽은 조선의 어느 비녀(婢女)
짐승도 제 새끼는 목숨 걸고 지키는 법인데
천륜도 인륜도 모르는 가련한 꼭두각시일 뿐,
그게 어찌 비를 세우고 충절을 기릴 일인가
*
노비에게는 충절이란 명분의 족쇄를 채워
어미의 모성(母性)까지도 수탈하는 비열함이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옛 시대의 일이니 그렇다 치고
제놈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위해 북한 주민을 모조리
허깨비 꼭두각시로 만든 김일성이의 죄업이야
천만번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한들 만분지일이나마 풀리겠는가
인류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문화유산이란 것도
대개가 권력자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위한 것일 뿐,
노예나 백성들은 끌려가 죽도록 노역이나 하다가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과 사원과 성채들을 보며
그 위용과 휘황찬란함에만 찬사를 보낼 게 아니라
그것이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도 생각해 볼 일이다
- (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