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을 어찌 다 갚을거나
“엄마~ ”
“오메, 너 오냐. 이 서방은?”
양손에 짐을 들고 혼자 대문을 들어서는 딸이 의아하다.
오늘은 금요일, 딸사위가 오는 날이다. 엄마는 텃밭에서 상추. 파를 뽑고 계신다.
* * * * *
남편이 출장 중이라 나 홀로 장흥행 시외버스를 탔다. 학동 정류장을 벗어나니 7월의 산야(山野)가 온통 초록 물결이다. 풍족해지는 마음, 농부의 딸임이기 때문이러라.
“장흥이요, 내리실 분은 얼른 내리세요.”
낯익기도 낯설기도 한 장흥 터미널.
그래도 내 집마냥 편안하다. 아마 고향 땅이기에 그러하리라.
마침 친정행 군내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버스비는 단돈 1,000원.
택시비 1만 원을 아끼니 수지맞은 기분이다.
승객은 나 그리고 훤칠한 남고생 1명뿐이다.
우리를 실은 군내버스가 장흥 다리를 건너 칠거리에 당도했다.
중고등 시절 사춘기의 함성이 왁자지껄했던, 장흥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칠거리다.
건물도 거리도 많은 세월을 입어 왕성함 대신 낡고 오종종하다.
버스는 승객이 없어 쉼 없이 탐진강 물줄기가 흐르는 강변 오솔길을 질주한다.
풀숲 덮인 탐진강 언저리들이 우거진 밀림 같다.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예부터 물 좋기로 이름난 고장, 장흥답다.
세포처럼 뻗어 내린 탐진강 줄기에 목을 축이고, 논에 물을 대고, 가재 고동을 잡고, 은어를 낚고, 멱을 감고, 빨래를 하고, 노래를 짓고, 풍류를 즐기고......
탐진강!
장흥 군민들의 생명의 텃밭임이 자명하다.
배산임수를 기반으로 옹기종기 촌가(村家)들이 한가롭다.
찰나에 긴 여행을 한 듯 가슴께가 뻐근하다.
소음도 바쁨도 없는 마을 길엔 진한 여름이 가득하다. 이제는 대부분 타인들이 주인이 되어버린 고향집들이 탸향처럼 서먹하다.
서녘에 기운 해 탓인지 마을 회관 문에 열쇠가 덩그러니 채워졌다. 회관 마당엔 습한 공기만 휘돌고 있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로 주홍 능소화가 선명한 내 친정집.
거기에 93세 엄마가 홀로 살고 계신다.
집도 터도 사람도 공허한 친정집.
땅콩 상추 도라지 파 머위 이삭들이 듬성듬성 야생초마냥 돋아 있다.
2, 3년 전만 해도 텃밭에는 갖가지 초록 잎새들이 너울너울 생명을 뿜어냈다.
“땅을 어찌 놀린다냐~~”
땅에 대한 애절함을 긴 한숨으로 들이켰던 엄마,
빈터에 대한 죄의식도 9순(旬)이 되면서 털어내야만 했다.
엄마 평생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송긋송긋, 버려진 자식인 양 시럽다.
주인도 땅도 점점 쓸모를 잃어가고 있다.
* * * * *
밥솥에 밥이 그득하다.
금요일이면 딸사위 맞느라 헌밥 두고 꼭 새밥을 하신다.
나의 간곡함에도 아랑곳없이 몇 가지 음식을 이미 해 놓으시곤 한다.
15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이다.
대접받기보다는 주고 해 먹이는 일이 평생 업이셨던 엄마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한편, 아직도 거동이 가능한 엄마의 건강이 감사하고, 자식에게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는 엄마의 현실이 그나마 엄마의 자존감을 지탱하게 하니 참 다행이다.
준비해 간 호박전, 떡갈비를 지져드리니 밥은 제쳐 놓으신다.
“맛있어요?”
“아야. 참말로 맛있다. 니 덕에 너무 배부르게 잘 먹었다. 이 서방하고 니가 나를 먹여 살린다. 이 공을 어찌 다 갚을거나 모르겄다. 미안하고 고맙다......”
늙디늙은 엄마 같은 오이 가지 고추 옥수수 파.....가 툇마루에 가지런히 누워 있다.
마켓에서 못난이 축에도 낄 수 없는 볼품없는 텃밭 산물이다.
바가지로 물 떠 순을 살리고, 호미로 물꼬 터 키워 낸 여물다 만 옥수수, 덜 익어 풋내뿐인 고추, 가지 등등.
93세 엄마의 고혈이다.
‘이 공을 언제 다 갚을거나?’
‘이 공을 어찌 다 갚을거나!’
내가 어머니께 드릴 헌사다.
첫댓글 고향집 찾아가는 여정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능소화 핀 담장이 그곳에도 있군요. 어머님 목소리 들은 적 없어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눈물 납니다.
선생님, 사모님 두 분의 극진한 효행이 '인간극장' 보는 것 같습니다.
볼품없는 텃밭 산물.소중하고 값진 농산물이지요.고령이신 어머니의 소박한 손마디가 느껴집니다. 어머니! 뵌 적은 없지만 저도 사랑합니다.
괜히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