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밤 / 최태준
형수가 세상을 떠나던 날 밤, 나는 영안실에서 혹시 늦게라도 찾아올 문상객이 있을까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 형수는 스무 해 남짓 혼자 살아왔었다. 조카들은 영정실을 지키며 눈물을 삼켰고, 나는 접객실에서 차츰 자라나는 슬픔을 매만졌다. 문상객이 뜸해질 무렵, 낯익은 중년부부가 영안실의 마루에 올라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반가움과 함께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영정 앞에 예를 차린 후 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두 사람을 맞아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오래 뵙지 못한 이모의 돌연한 별세소식을 듣고 달려왔다는 여인은 바로 내 추억 속의 인물이었다. 그녀를 마주 대하자 나는 그녀가 소녀로부터 긴 세월을 달려와 내 앞에 멈춰 섰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치 급히 돌아가는 영상 속에서 얼굴이 빠르게 중첩되다가 어느 순간 지금의 얼굴로 정지하듯 그녀가 먼 과거로부터 내게 달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이마에 주름이 들어서고 볼이 약간 쳐진 얼굴에서 소녀 적의 모습이 묻어났다.
중학생이던 그녀가 반쯤 열린 형수 방에서 내다보던 때가 언제였던가. 사춘기의 감흥이 온통 몸과 정신을 관류하던 시절, 그녀는 나의 의식을 온전히 지배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이년 연상인 그녀는 매년 여름이나 겨울, 방학을 맞아 내가 사는 시골집으로 이모를 만나러 왔었다.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녀의 자장 속으로 한없이 끌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겨우 며칠 있다가 도시로 돌아가면 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이 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간헐적으로 다가와선 떠났다. 그녀의 부재는 내 가슴 속에 사무친 그리움의 감정을 키웠고, 그것은 언제나 나로 하여금 그녀를 생각하고 기다리게 했다. 그 일방통행적인 감정이 사춘기의 나를 어떤 외진 구석에 묶어놓고 짓눌렀다.
사랑하고 기다리는 것은 여성의 본새가 아닌가. 그 사랑은 나에게서 태동했지만 그녀는 내게서 멀리 있었다. 나는 일찌감치 그녀와 나 사이 넘지 못할 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연의 끈조차도 형수를 통해 겨우 이어진 것이었다. 그 필연성으로 인해 우리의 유대는 무척 취약하였다. 나는 순정의 감옥에 나를 가두고는 언제나 수동적으로 그녀를 기다리기만 했다. 그녀가 나에게 오리라는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려웠으므로 감정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면 파멸이 올 것 같았다. 그녀의 부재는 나에게 결핍을 초래했고, 그 결핍을 메우려는 갈망은 독백으로 남아 노트 한권의 편지가 되었다.
편지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거듭 사랑을 갈구했다. 그 갈망은 결연하고 비장하기까지 했으며, 일말 종교적 내면성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외곬수의 감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 경우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베르테르가 보답 받지 못한 사랑 앞에서 결연히 생을 포기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던가. 내게 탈출구가 필요했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들을 넘겨주고는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학업이란 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공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랑의 관성은 작은 충동에도 굳은 결심을 흔들리게 했지만 나는 악착스럽게 공부에 매달렸다. 나의 대학합격과 장학금 소식을 그녀가 시골까지 달려와 알려주고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한동안 그녀의 동생을 가르치며 주말이면 그녀가 차려주는 밥을 먹었다. 가까이 머물자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은 기어이 복원되고야 말았다. 그녀를 향한 순정 때문에 대학생활 내내 미팅조차 거부했었다.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다. 그녀와 팔짱을 끼고 서있을 운 좋은 사내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 결혼식 직후 형수의 앨범 속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의 옆에 서있는 신랑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바로 그가 초로의 나이가 되어 지금 내 앞에 앉아있다. 그가 그녀를 따라 성큼성큼 나에게로 다가올 때는 왠지 좀 머쓱했었지만 내 마음은 이내 평화를 되찾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우리는 고인과 관련된 일을 실마리로 대화를 풀어나갔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다독이고 챙겨주는 끈끈한 부부애를 보여주었다. 고인에 대한 애도를 공유하며 우리는 격의 없이 서로 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이쯤에서 농담으로라도 그에게 지난 추억에 대해 한마디 털어놔도 되련만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충동을 눌렀다. 그 대신 그의 잔에 맥주를 가득 따랐다. 거품이 올라왔다. 거품 너머 그녀가 시치미를 떼고는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한테서 언젠가 나를 매혹시켰던 소녀를 찾느라 분주했다. 긴 속눈썹과 가슴츠레한 눈매만 예전 그대로일 뿐 흰 피부가 발산하던 신비롭고 순결한 모습은 더 이상 그녀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랬을까만 옛 흥취가 내게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세월에 그녀도 변하고 나도 변한 탓일 것이다. 아, 이 여인을 한때 내가 그토록 사모하고 못 잊어 했었구나.
모든 사랑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살아가면서 사람의 마음이 어디 아무 때나 쉽게 흔들리던가. 그 사랑은 내게 아픔을 주었지만 돌아보면 한없이 기쁘고 달콤한 것이었다. 사랑의 열정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꽃피는 언덕, 파도 넘실대는 여름바다, 불타는 가을 숲, 눈 내리는 저녁 - 이런 낭만적 풍경들이 나의 심상 속에는 가득했다. 그녀가 내게 예비해놓은 낭만성의 한 자락에서 나는 아내를 만나 다시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하였다.
밤이 늦었다며 두 사람이 일어나 떠날 때 나는 그들의 손을 차례로 꼭 잡았다. 그것은 부부가 오래 함께 해로하길 바라는 진심의 축원이었고, 또 그것은 완전히 온전히 소멸한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매장하는 의식이었다. 내게서 태어나고 죽은 가련한 사랑의 잔해를 그렇게 묻고는 잠시 애도했다. 부부가 복도를 걸어 멀어져갈 때 사춘기의 내 가슴에 애틋한 사랑의 감성을 일깨워준 그녀의 등을 향해 고맙다는 한마디를 나직이 읊조렸다. 영안실의 밖은 칠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