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람어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에서 사용하던 히브리어나 아람어 중 하나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언어일까요? 유다인들이 신성한 언어로 간주해서 오직 성경과 카디쉬와 아미다 기도에만 사용하던 히브리어일까요? 아니면 민중 언어인 아람어일까요?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데에 모두 동의합니다. 여러 근거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을 아빠로 부르며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아빠는 아람어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아빠라는 말은 없고 ‘아브’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빚’이라는 말로, ‘호바’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아람어 기도문에서 직역하면 “저희에게 빚진 자들을 저희가 탕감해 주듯이, 저희의 빚을 탕감하시고”입니다. 호바는 ‘빚’을 뜻하는 아람어이며, 히브리어는 호브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아빠와 호바만 봐도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아람어로 가르쳐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아람어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게 한 이유
예수님께서 민중 언어인 아람어로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것은 당시 유다교 관습으로 볼 때 굉장히 혁신적인 일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유다인들은 기도를 드릴 때나 성경을 읽을 때 신성한 언어인 히브리어만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이슬람 신자들이 기도할 때, 7세기 아라비아에서 마호메트가 사용하던 언어인 아랍어로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신성한 언어인 히브리어가 아닌 민중의 언어를 택하셨을까요? 무엇보다도 친근성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람어로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은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유다교는 언어만 신성한 언어와 민중 언어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자리와 세속의 자리를 구분하였습니다. 종교와 관련된 모임이나 행동들은 거룩한 세계에 속한 것으로, 그렇지 않은 세속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관점은 대중적인 것들은 모두 세속적이고 악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구분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라고 말합니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행위인 먹고 마시는 행위조차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만사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만사를 보는 데는 성과 속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민중의 언어인 아람어로 드리는 또 다른 의미는 어떤 특정한 언어만이 신성한 언어라는 선입견을 없애줍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봉독하는 성경이나 기도가 더 거룩하고, 라틴어로 바치는 그레고리오 미사가 더 거룩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입니다. 베일리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들에게 아빠 하느님께 아람어로 기도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오대양 육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기들의 모국어로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씨앗이 되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고, 모국어로 기도문을 바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 모든 기도의 본보기인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렇게’는 그리스어 ‘후토스’인데, ‘이런 식으로, 이런 형식을 따라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해서 많은 학자는 이 말에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의 첫째 의미는 주님의 기도 자체를 가리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그대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의 둘째 의미는 주님의 기도는 물론, 다른 기도를 드릴 때에도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것을 기도하여라’라고 했다면 주님의 기도만을 가리키겠지만 ‘이렇게 기도하여라’라고 하셨기에, 어떤 기도를 드리든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말로 드리는 주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로 시작되기에 ‘하늘에’가 가장 먼저 나오지만 그리스어에는 ‘아빠’가 맨 처음에 나옵니다.
만약 우리가 개인기도를 드릴 때 ‘아빠’를 빼고 ‘하느님’만을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우리의 신분이 빠져버리게 됩니다. 하느님이라는 호칭만으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든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이 점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려면 상대방의 능력도 보지만 그보다는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를 먼저 생각합니다. 돈을 빌려야 할 상황이라면, 돈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와 가까운 사람을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필요할 때, 우리는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빠 하느님을 가장 먼저 찾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시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미리 헤아리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분을 ‘아빠!’라 부르며 청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특권인가요!
‘이렇게’의 셋째 의미는 어떤 기도를 드리든지 주님의 기도의 틀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먼저 아빠 하느님과 관련한 기도를 드리고, 그다음에 우리의 필요를 말씀드리라는 것입니다. 대게 우리 기도는 자기중심적이고 세상 중심적입니다. 십자성호를 긋고 나서 아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이것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시고 식으로 필요한 것들을 다급히 늘어놓습니다. 어떤 기도든지 기도의 우선순위는, 먼저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고, 그분의 나라와 뜻이 실현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는 것은 기도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매번 측량하면서 집을 완성해 가듯이,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라는 측량줄로 견주어 보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단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우리 전 존재를 기울이는 열정이다. 기도는 종교 드라이브인drive-in 식당에 가서 급히 서둘러 영적인 샌드위치나 음료수를 사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결코 서두르지 않으시는 하느님과 천천히 사귀는 것이다. 기도는 그저 일시적인 신뢰나 고독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궁극적인 관계를 깨닫고자 하는 항구한 표현이다. 기도는 머뭇거리며 드리는 봉헌이 아니며, 그분을 찾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의 외침이다. - 앨버트 에드워드 테이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기도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우리 전 존재를 기울이는 열정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