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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주류성 찿아서....
하루신선 추천 0 조회 567 10.03.04 11:51 댓글 2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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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3.04 14:33

    첫댓글 이종학(서라벌군사연구소장)의 논문<주류성.백강의 위치비정에 관하여>내용에서는 군사 사학적 연구방법에 의한 고찰이라고 하여 661년 3월 신라군은 두량윤성을 공격하기 위해 고사비성外에 작전기지를 설치, 고사비성은 고부(古阜)이기 때문에 주류성은 고부의 주변 20Km내에서 찾아야 하므로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를 비정하고 있습니다. 군사지리적 관점에서 전쟁.군사작전의 준비,수행을 위해 지리적 조건을 고려했다고 합니다...그리고 백강을 동진강으로 위치비정을 했네요...(2004년판) (국회도서관에서 카피)...고부(古阜)=언덕

  • 작성자 10.03.04 16:34

    고사비성이 고부(古阜)라 비정한 근거는 무었일까요? 두량윤성은 어디이고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달라서 아직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여 가까운곳 금강변에서 고사비성을 찿는학자도 있습니다.

  • 10.03.04 23:57

    저도 잘모르겠습니다..고부(古阜)는 夫安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역(일본인 池內宏 주장), 내노라 하는 학자들의 논문으로 봐도 다들 틀리게 비정을 하니 어느 학자의 주장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ㅠ.ㅠ...OTL

  • 작성자 19.07.12 01:52

    어릴적 고향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 배우면서 너무나 평지인 작은 야산에서 어떻게 3년이나 버티며 항전할 수 있었나 의아해 하다가, 일때문에 정읍에 머물면서 부안 개암사에 갔다가 위금암성이 주류성이라 설명에 공감하다가, 박성흥선생의 글을 읽고 주류성에 관심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 작성자 19.07.12 01:53

    위금암산성이 주류성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피성을 "김제지역"으로 단정하시는데 김제 또한 피성의 설명과 상이한 부분이 많습니다.

  • 10.03.04 23:55

    아무래도 전쟁사에 대한 위치비정은 군사전문가의 비정이 무게가 실려 그의 논문을 찾아본 것입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서 고부군<古阜郡>은 원래 백제의 고묘부리군(古眇夫里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으로 부리(夫里)는 城邑을 뜻하는 백제어로 즉 부안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금의 고부(古阜)이다.라는 일본 사학자 池內宏(前揭書 PP 118-119)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 10.03.05 11:27

    신라군의 진격로를 보면 663년7월 17일 경주를 출발, 논산을 경유하여 8월 초순에 공주에도착, 당군과 합류하여 8월13일 두솔성을 함락하고 17일 주류성을 포위하여 9월7일에함락시켰다 하였는데,위금암산성이 주류성이라면 신라군이 논산에서 부안으로 진격해야지 대군을 이끌고 공주까지 이동한것이 이해되지 않고,古山子 金正浩는 두솔성은 角山에있고 角山은 청양에 七甲山이다 기록하였는데, 칠갑산에서 위금암산성 사이에는 금강,만경강,동진강을 건너 4일만에 도착할 수 없는 거리이고,군사전문가도 현대전에서도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박성흥선생에 주류성고에서 인용.

  • 10.03.05 10:51

    아~두솔성을 주류성과 분리하면 님의 의문처럼 되는데 김유신 열전으로 보면 두솔성은 바로 주류성과 같은 것으로 보여집니다..즉 두솔성=주류성이라는 것이지요..그리고 이종학의 논문 역시 두솔성=주류성으로 하고 있구요..그리고 8월 13일날 두솔성(주류성)을 함락시킨게 아니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로 되어 있지요.다시말해 8월 13일날 주류성에 이르러고 9월 7일 함락 시킨것으로 되겠지요

  • 10.03.05 11:14

    좌우지간 주류성은 왜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백강과의 근거리이면서 강의 서쪽 지역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지역을 찾아야 되지 않을까요?..그리고 왜 수군의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이 되어야 합니다...백강을 동진강으로 비정하면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부안의 변산반도 지역인 상서면 지역이 적합하다고 합니다만....^^*

  • 작성자 10.03.05 15:28

    김유신 열전에 8월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기록되었고, 두솔성이 정산이다 기록되어 있는데, 두솔성이 주류성이면 주류성은 정산에 있어야 되는데, 부안이라 하시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 10.03.05 15:37

    허겈~정산면은 부여군에 속하는데....그건 그렇고 "<두솔성이 정산>"이다 라는 내용은 혹시 어느 사료에 있는지요?.

  • 10.03.06 08:53

    삼국사기 본기에 의하면 두량윤성과 답설인귀전의 주류성은 같은 사건으로 보여서 흔히 두량윤성=주류성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두솔성 역시 주류성이 되게 되는데 삼국사기 본기 문무왕 8년 왕은 2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합쳐서 두릉['릉'을 '량'이라고도 한다.]윤성·주류성 등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라는 기사에서 두량윤성과 주류성을 구분시킵니다..이넘의 신라본기가 헷갈리게 만드네요..두량윤성이 정산에 있다는 사료는 안정복 선생이 주장한 것이지만 두솔성(주류성)은 두량윤성과 동일하다는 추론은 위의 문무왕 3년 기사때문에 부정되어야겠지요.

  • 작성자 10.03.08 17:06

    "두솔성이 정산에 있다"의근거는,윗글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金正浩의大東池志에 기록되어 있다 합니다. 청양의 칠갑산은 정산면의 일부에 해당합니다.

  • 10.03.07 01:39

    하루신선님!! 두솔성 함락건이나 주류성 함락건 모두 용삭3년 즉 문무왕 3년(663년)기사로써 김유신 열전에서는 두솔성, 본기에서는 주류성이라는 동일한 내용인데 城의 명칭만 다를 뿐입니다.. 두솔성이나 주류성의 항복을 받고 왜군의 포로를 석방하는 내용 또한 동일합니다..그런데 "그뒤에 계속해서 주류성을 포위하고 부흥군을 진압하였다" 라고 기록 되었다니요??...다시 한번 더 년대 검토를.....용삭3년(문무왕3년:663년)을...주목하십시요...^^*

  • 10.03.08 16:56

    <일본서기>
    8월17일 적군이 주류에 와서 왕성을 포위하였다 당나라 군은 170척으로 백촌강에 도열하였다.
    8월28일 일본 수군과 당나라 수군이 결전을 치렀는데 일본군이 결국 패퇴하였다. 부여풍장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9월 7일에 주류성이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에 이르렀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을 종합해 보면,
    김법민과 69세 노령인 김유신은 두솔성을 공격하고 남아있었고,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주류성을 공격하였으며, 주류성이 항복할때 주축은 당나라군이었다고 보여지는데요..

  • 10.03.08 20:10

    주류성이 항복할때 주축은 당나라군이었다고 보여진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의 가없어 보입니다..주류성이던 두솔성이던(=동일한 城으로 보임) 나당연합군이 싸운 것인데 신라측 기록으로는 신라가 주축이 되어 문무왕이 왜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정황으로 보아서는 당 수군에 의해 왜의 수군이 괘멸됨에 따라 주류성이 항복한 것으로 나타나니 아무래도 당이 주축이 되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합니다.

  • 10.03.05 00:55

    금성판 국어대사전에서 '주류성'을 찾아보면,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서 백제가 망한 뒤 복신, 도침 등 백제의 유신(遺臣)이 근거지로 삼아 나당연합군에 항전한 마지막 전쟁터이다.
    삼성출판사의 새우리말큰사전에서도 주류성을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는데, 일본인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 등이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이 주류성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래 이병도박사가 그 학설을 지지하면서 교과서는 물론 사전에까지도 그렇게 올라 있습니다.

  • 10.03.05 00:57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부안의 위금암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충청남도 홍성이나 연기 지역이 주류성이 있던 자리라는 학설도 제기됐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 토지가 자갈이 많고 척박해가지고 농사짓기에 불리하고 오랫동안 항전을 하기가 어려운 지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풍왕이 즉위한 이후에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그 피성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지역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피성이 주류성에서 가까운 곳으로 설정돼 있어서, 결국 주류성은 부안의 위금암산성이 가장 유력하다, 학자들 사이에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 10.03.05 01:01

    지금 사전에 주류성이 있던 지역으로 올라 있는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의 경우, 충남역사문화원에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고려시대의 성으로 밝혀졌습니다.

    백제 부흥군이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일본서기는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 주(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덕안성 등의 주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이 적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류성으로 돌아왔으니…

    위금암산성의 울금바위에는 3개의 굴방이 있는데, 이 곳 부안 주민들에 의하면 이들 굴방이 각각 원효굴, 베틀굴, 복신굴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큐 역사를 찾아서 에서>

  • 작성자 12.07.28 13:55

    피성의 설명에는 피성에는 高蓮旦涇水가 흐른다고 설명되었는데 김제지역에는 설명되지 않는 지형이고, 피성은 적군과 하루밤에도 도착가능한 지척의 거리라 하였는데 김제는 너무 먼거리입니다.
    박성흥선생은 피성을 당진군 면천을 피성이라 비정하였고,당진군 신평을 沙平成이라고 비정하면서 면천과 신평의 거리는 불과 12km 지척의 거리로 사평성이 신라군에게 함락당하자 황급히 주류성으로 회군하였다 주장하십니다.

  • 10.03.07 00:17

    약1300년 이상 지난 세월속에서 흔적을 찾을수가 있을까요...??
    또한 피성은 전시중 2~3개월 짧은 기간 수도였습니다..
    피성을 벽골제라고 하기 보다는 김제지역으로 추정하죠..

    避城與敵所在之間,一夜可行 지간거리임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봐야죠..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石山(부여군 석성면), 馬山(서천군 한산면), 孤山, 沙平(당진군 신평면)의 4縣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죠..

    663년 2월의 사평성은 순천 or 전북 임실군 신평면 or 구례 지역으로 추정하는 걸로 압니다..대부분 백제남방으로 생각하고 있죠. .

    박성흥선생은 그 분 나름대로의 생각이겠죠....

  • 작성자 14.10.25 21:53

    백제 남쪽의 4개성이 함락되어 피성이 적군과 너무나 가까워 주류성으로 돌아왔다 하였는데,
    좀더 생각해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피성으로의 이전은 적군과 하룻밤사이 지척의 거리로 반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피성이 김제지역이라 한다면, 남부의 점령당한 가까운 성이 어떤 지역이라 하여도(순천, 임실, 구례~~~~)
    점령당하기 이전의 대치상황을 생각해 보면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어,
    처음 피성으로의 이전 반대한 내용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너무나 단편적인 생각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찿고있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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