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해전』이라는 영화를 보고서
중학생과 함께 영어공부를 하는 날이지만 어제까지 기말고사를 보았기에 하루 쉬기로 하고 여유를 가지면서 『연평해전』이라는 영화를 봤다. 나 역시 해군해병의 군대생활을 하였기에 마음에 더욱 가까움을 느끼면서, 그리고 요즘 새롭게 논란이 되고 있는 주사파와의 내전이라는 국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내내 긴장된 마음으로 보았다.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엉터리같은 교전수칙을 내린단 말인가라며 분노하면서, 그리고 왜 젊은 저들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죽음에 몰아넣는 것인가라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면서 남북의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인터넷을 뒤져서 몇 가지를 찾아보았다. 1999년 6월 15일에도 북한의 공격이 있어서 교전이 일어났고, 나중에 그것을 제1연평해전으로 이름하였다. 그리고 2002년 6월 29일에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 우리 군에서는 6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2010년 3월 26일에는 천안함이 피격당하여 무려 46명이 전사했다. 2010년 11월 23일에는 연평도에 포격 도발을 해 옴으로 2명이 죽는 일이 일어났다.
왜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열심히 추진했을 때에 북한은 오히려 이런 공격을 벌였을까? 그 이후에 이명박 대통령의 시기에도 그 흐름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때는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논란으로 전국적인 촛불집회가 이어지면서 국정 장악력을 잃어버린 가운데 여전히 노무현 대통령의 세력이 국정 전반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김대중과 노무현과 관련된 자들의 태도가 어떠했던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향이 전라도이고 야당 기질이 강했던 나로서는 김대중을 대단한 사람으로 떠받들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동안 숨겨진 사실들이 드러남으로 사실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알고 있던 것도 바르게 안 것이 아니니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5년간 문재인은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것처럼 선전하며 좋은 나라를 만들 것처럼 주장했지만, 실제로 5년간 그의 행적은 주장과 전혀 달랐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다. 아직도 그가 주장한 것과 동일하게 행동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5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점점 그 생각을 바꾼 사람들도 많다. 특히 김정은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논란이 많고, 앞으로 숨겨진 진실이 많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연평해전을 대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태도에 대한 논란도 읽어보았다.
제1연평해전 이후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이 북방한계선을 지키고,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 상대가 먼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할 것,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것으로 이루어진 4대 교전수칙을 지시하여 해군이‘밀어내기’로 불리는 차단기동 개념을 도입했으며, 이후 제2연평해전에서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교전지침, 차단기동 도입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경고방송->차단기동->경고사격->위협사격->격파사격] 5단계로 합참의 해상 작전지침이 존재했으며 제1연평해전 에서도 똑같은 교전지침과 차단기동을 사용했지만 대승을 거둔 바 있다. 당시 이준 국방장관은 "김대통령이 99년 연평해전 기간에 4대 지침을 내렸지만, 이는 97년 작성된 합참 작전예규에 이미 포함돼 있었으며 교전규칙의 기본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지, 햇볕정책 때문에 추가되거나 수정된 것은 아니다"고 답변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것은 늦장 대응이라는 비판이 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이회창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
황장엽은 탈북자동지회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려, “대포 한 발이 아니라 총 한 방을 쏘는 데도 김정일의 재가가 필요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포 사격을 명령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군부내 강경 세력의 돌출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는 북한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
서울법대 교수 조국은 오연호와 공저한 책《진보집권플랜》에서 연평해전과 관련, "서쪽에서는 해전이 벌어지고,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떠나는 모순적인 상황을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됐다"고 주장했다.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에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으며,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태도에 분노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 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였다.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군 장례식은 장례위원장 이하만 참석하는 것이 관례다." , 총리실은 "참석 요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전을 고려해 불참했다."라고 해명했다. 이후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식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비판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
진작부터 『연평해전』을 보고자 했는데 오늘에야 보았지만 시간을 내어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매월 한번씩 만나서 책을 읽고 발표하며 의견을 나누는 독서포럼이라는 모임에 나오는 회원 중에 군가(軍歌)에 온 힘을 기울여 보급하고, “코리아 베테랑 코랄”이라는 합창단도 이끌고 있는 분이 있다. 그가 천안함 피격 사건(2010년 3월 26일 금요일)을 기념하는 날에 합창단과 함께 부른 직접 작사한 노래가 눈물겨웠다. (https://www.youtube.com/watch?v=kZwtoYgnvyI) 아직도 우리나라를 위하여 귀중한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많고, 그들을 기억하며 그 귀중함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