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은 한 생만 지나면 성불하게 된다고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사람입니다. 미륵은 도솔천에 태어나 현재 머물고 있으며, 하늘사람(天人)을 제도하고 있습니다. <미륵상생경>과 <미륵하생경>에 따르면, 미륵은 56억년 동안 도솔천에서 하늘사람들에게 설법을 하고 나서는, 마지막 한 생을 채우기 위해 염부제, 즉 우리가 사는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합니다.
미륵이 태어나는 세상은 곡식이 풍족하고 인구가 번창하며, 마을과 마을에 닭소리가 잇달아 들릴 정도로 고요합니다. 배가 고프면 쌀이 생기고, 옷을 입고자 하면 옷이 저절로 생깁니다. 보석이 흙과 돌처럼 흔해, 더 이상 보석으로 싸우고 죽이며 감옥에 갇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미륵경에는 이처럼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미륵에 대한 설화는, 제가 아는 한, 아함부 경전이나 니까야 등 초기경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처님 입멸 후 상당한 세월이 지나 형성된 것이 아닌가 짐작이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험할 때마다 미륵보살이 내려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나라가 혼란할수록 미륵이 나타났습니다. 조선시대 말기 왕정이 무너지고 일본 등 열강이 쳐들어 올 때에도 백성들은 증산교나 보천교의 교주들을 미륵으로 받들었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후삼국 시대에 들어섰을 때는 여러 명의 미륵이 나타났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도, 후백제의 견훤도 자신이 미륵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궁예 미륵은 왕건에 쫓기다 칼에 죽고, 견훤 미륵은 왕건에 투항했습니다. 고려를 연 왕건도 스스로 미륵이라 하였으니, 고려가 설 때까지 후삼국시대는 어찌 보면 미륵끼리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견훤, 궁예, 왕건이 하나 같이 미륵을 자처한 것을 보면, 신라가 망하면서 세상이 얼마나 어지러웠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은 부역에 시달리고 가족이 흩어지는 참극을 맞으며, 굶주림과 약탈로 심한 고통을 당합니다. 과연 미륵이 내려왔으면, 이처럼 백성들을 앞세워 칼과 창을 쓰며 전쟁을 일삼았을까요?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미륵을 자처하는 자들의 헛된 욕망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마경 보살품에 보면, 맨 처음 미륵보살과 유마거사의 문답이 나옵니다. 미륵보살이 하늘사람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을 때, 유마거사가 찾아옵니다. 유마거사는 미륵에게 한 생이란 무엇인지 묻습니다. 한 생만 지나면 성불한다고 하는데 그 한 생이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즉,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느 때의 한 생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수기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지, 나아가 수행을 해서 얻는 깨달음은 무엇인지 묻습니다.
미륵은 유마거사의 물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유마경에서 등장하는 미륵은 아직 공성(空性)의 진리에 투철하지 못한 보살입니다. 이것은 유마경 편찬자가 대승의 공사상을 드러내기 위해 임의로 설정한 형식입니다.) 유마경(유마힐소설경)은 미륵에게 한 유마거사의 법문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보리(깨달음)란 정작 누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미륵이시여, 부디 저 천신들로 하여금 보리를 무언가 특별한 것인 양 망상케 하는 일은 삼가해 주십시오. 보리란 몸으로 깨닫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보리란 모든 상(相)이 적멸한(사라져 고요한) 자리입니다. 보리란 일체의 인식 대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리란 모든 분별을 여의고 움직임과 생각과 마음의 동요를 훌쩍 벗어나 있습니다. (중략)
왜냐하면 몸은 단지 풀이나 나무나 돌담이나 도로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은 정작 비물질적인 것이고, 모양과 근거가 없는 것이며, 내보일 만한 대상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유마경(박용길 역) 보살품 미륵보살편 (일부 인용)
유마거사는 깨달음은 몸으로 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마음으로 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마거사의 천둥 같은 설법앞에서는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여기서는 참선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햇수를 따질 여지가 없으며, 경전에 대한 지식도 두 번째 소식입니다. 재가니 출가니 하는 승속에 대한 분별은 더 더욱 망념입니다. 백봉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모두 가죽주머니(몸)에 앉아서 하는 소리입니다.
최근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이 과연 무엇인지 진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쪽에서는 깨달음은 이해와 분별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속에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각자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유마거사의 법문은 오늘 우리 불교의 혼란에 대승불교의 놀라운 사색과 성찰의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유마거사의 질책을 받는 <미륵>은 오늘 이 시대에도 나타납니다. 세상을 마치 자기가 좌우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정치가도 미륵이며, 세간과 출세간을 둘로 나누어 자기 자리를 고집하는 성직자나 수행자 또한 미륵입니다. 유마거사의 법문은 단순히 수행자의 교만을 문제삼는 데 그치지 않고, 일체만법이 공(空)한 도리에서 이 모든 교만과 위선을 성찰하는 심오한 가르침입니다.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둘이 하나에서 생기니, 하나도 지키지 말아야 걸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신심명 법문은 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수행자의 거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세우고 둘을 나누는 수행자들이 나타나 조사의 가르침을 가리고 있습니다. 수행법이 훌륭하면 눈밝은 사람을 배출하는데 힘을 기울여아 함에도, 종파나 수행법을 잣대로 삼아 네편 내편을 나누고, 그 속에서 권위와 명예를 추구하며 미래의 안전에 집착합니다.
유마거사의 법문을 듣고 미륵은 긴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내가 누구라는 교만과 시간(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것입니다. 교만과 미래에 대한 집착, 이 두 가지 분별이 쉬지 않는 한, 세상이 혼란할 때마다 우리 마음속 미륵이 칼과 창을 휘두루며 나타날 것입니다.
반야의 공(空) 도리는 사람을 만길 벼랑에 서게 합니다. 이 일을 옛 선사들은 '가난한 농부의 쟁기마저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옛 수행자들은 평생 닦아온 수행이나 공덕이 무너지는 고통과 수모를 겪으면서 진정한 공성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그로 인해 자유와 해탈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시간의 상(相)이 없는 수행자는 미래의 변화에 초연하여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상이 없는 수행자는 겸손하여 능히 다른 사람을 포용합니다. 미륵의 긴 꿈을 깨운 유마거사의 법문은 자칫 경전에 대한 지식과 설법에 취해 자기의 마음 속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수행과 성찰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여운 2016.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