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구원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라는 건 누구든지 다 알죠?
오늘날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성경을 한 번만이라도 읽어보면 다 아는 거 그까짓 거. 한 번 보자고요. 에베소서 2장 8-9.
엡 2 : 8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 : 9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명쾌하죠? 또 로마서 1장 17절.
롬 1 : 17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은 행위로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뭐예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세요. 예수를 믿는 건 뭡니까?
그냥 막연히 이 천년 전에 유대 땅에 오신 예수라는 분이 내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내 마음에 새기고, 새기고, 새기고 이 뇌리에 새기고, 새기고 또 새겨 놓으면 그게 믿는 겁니까?
어떻게 믿어야 돼요? 얘기 좀 해주세요. 어떻게 믿어야 돼요?
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 왔는데도 왜 온 세상이 단 한 사람도 안 믿었을까요? 어떻게 믿어야 돼요?
성경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었다고 하고 부활했다고도 해요. 그걸 어떠한 방식으로 믿어야 하느냐는 거예요.
정말 여러분 그게 믿어지세요? 믿습니까? ㅎㅎ
칼빈이 이야기 했고, 루터가 이야기 했으니까 그냥 관념으로라도 그렇게 우기고 있으면 구원이 되는 겁니까?
주님은 분명히 복 있는 자는 애통할 것이다, 라고 했어요. 그죠?
애통이란 단어가 펜때오, 유월절이라는 단어를 써요.
그리고 위로를 받다, 이게 파라칼레요가 초청받다 예요.
그러니까 유월절로 초청을 받는 자가 복 있는 자다.... 예요.
그 말은 네가 유월절로 초청이 되어 양처럼 죽어야 복이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 말은 유월절에 죽은 예수가 되어 봐야,
즉, "내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제물로 죽은 예수가 되어 봐야 그가 복 있는 자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에요. 그게 성도에게 위로래요. 성경이.
그렇다면 어린 양의 유월절은 우리가 관념으로 믿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가 그 유월절로 초청이 되어 (파라칼레요), 도륙당해 죽어야 비로소
그것이 내 것이 된다. 이런 말이에요.
그걸 "믿는다" 그래요.
그렇게 되면 다시는 내 삶 속에서 또 다른 희생 제사가 없어도 되죠?
나에게서 그게 확실히 체휼됐으니까. 이제는 또 다른 희생제사가 없어도 된단 말에요.
그런데 그건 세상 적으로 볼 때. 저주이지 복이 아니잖아요.
내가 제물이 돼서 죽는 게 신약성경이 복이라고 번역을 하는 헬라어 마카리오스는 여러분이 잘 아는 히브리어 바라크를 번역한 거예요.
히브리의 복 바라크는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가리키는 거예요.
신명기 28장에서 내가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 라는 말씀이 나오죠?
그리심 산에서 축복이 선언되고 에발산에서 저주가 선언이 되죠?
반씩 나누어서 이스라엘에게 그걸 외치라고 하는 게 이게 복이에요. 그 자체가.
그런데 그걸 복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복이지만 "그게 무슨 복이야? "라는 이들에게는 저주예요.
그래서 아까 우리 집사님이 기도하신 대로 법은 하나인데 생명의 법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사망의 법이 되는 거예요.
법은 하나라니까요. 다른 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율법이 어떤 이들에게는 사망의 법이 되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생명의 법이 돼요.
아, 이 안에 예수가 있네? 진짜 희생제사가 여기에 들어있네? 이걸 알게 되는 거니까.
그게 복이에요. 바라크라는 단어가 그 전체를 함유하고 있어요.
그 바라크를 파자하면 베잍 로시 카프 거든요. 이게 알지 못하는 복이라는 단어에요. 아무도 못 알아 봐요. 그 복을.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알아져요. 이해가 돼요. 그 사람에게만 복이에요. 그걸 바라크라고 해요.
그런데 그 복의 실체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저주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그게 복이 돼요.
저주가 무엇인지, 선악과가 무엇인지 아는 게 생명이라 그랬죠? 그걸 알면 다시는 선악과 안 먹을 거 아녜요?
그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거예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나무가 계속 단수예요. 단수, 단수, 단수.
그래서 인간들에게 선악과가 먼저 주어졌던 거예요. 죽어서 사는 거.
따라서 복을 받은 이들은 저주의 현실부터 경험하여 복의 현실로 올라오게 되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라는 말을 들으시고 외우신다 해도 그게 여러분의 일이 되어 지지 않을 때 그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해요.
그건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십자가는 내 죽음의 인식에서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어요.
나에게 나의 죽음이 인식될 때 "아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이구나" 라고 알게 되는 거고
그 때, 예수와 내가 하나로 연합이 되는 거예요. 그걸 살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부활이에요.
나라는 존재 자체,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그 어떤 종류의 행위, 사유, 시도, 열정 등도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멸할것 이었잖아요.
그리고 더러운 옷, 이사야는 그걸 더러운 옷 그러죠? Filthy rack, 더러운 옷. 똥 걸레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거 보다 더 더러운 표현이에요. 그거는요.
우리 최선의 ”의”가 그렇대요.
그렇게 우리와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이 인식될 때, ‘나’가 죽는 거예요. 그게.
‘ 아니네?’
그렇게 ”나”가 죽게 될 때, 아, 그래서 이런 무력한 나 때문에, 이런 더러운 나 때문에 예수가 죽은 거구나, 라고 그게 사실로 와 닿게 되는 거예요.
그 때에 십자가가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 이해가 곧 살아나는 거고 그걸 믿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복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현실 속에서의 나의 죽음이 그분의 십자가를 진리로 밝혀내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서 진리로 그걸 밝혀내지 않으면 내 삶속에서 그 삶이 일어나지 않고 나에 대한 용서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예수 믿는 내가 그것과 아무상관 없는 자로 사는데 어떻게 그게 참이며 진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