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붕어
벼르던 이불 정리를 했다. 아들의 도움을 받아 100L짜리 쓰레기봉투 다섯 장에 묵은 내 나는 솜이불이며 요, 베개들을 구겨 넣었다. 마지막으로 붉은색 이불 하나가 남았다. 마저 들어내려는 아들을 말렸다.
“그건 둬라.”
이왕 버리기로 마음먹었으면 모두 버리라는 아들에게, 아랫녘에 사는 사촌 언니가 옛날 목화솜 이불 하나 달라 해서 그런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핑계일 뿐이다. 언니가 그런 말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언제 가지러 올는지, 오기나 할는지 알 수 없다. 설령 가져간다 한들 솜을 새로 타기 전에는 묵은내가 없어지지 않을 터이니 쓰지도 못할 게 뻔하다.
아들이 제집으로 돌아간 후 이불을 내려 방바닥에 펼쳐보았다. 붉은 비단 위에서 통통히 살이 오른 여러 모양의 금붕어들이 짝을 지어 유유자적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묵은내는 풍기지만 질 좋은 솜이어서 그런지 아직 폭신했다.
이 금붕어 이불은 혼수 이불 중 하나였다. 사십여 년 전, 어머니는 원앙 대신 금붕어가 수 놓인 이 이불을 펼쳐 보이며 솜도 특별히 좋은 것으로 했으니 금붕어처럼 화려하고 여유롭고 금슬 좋게 살라고 덕담을 하였다.
어머니는 금붕어를 무척 좋아했다. 살림이 풍족했던 한때에는 마당에 연못을 파서 금붕어를 키우기도 하였다. 기껏해야 단지만 한 둥근 어항 정도였지 큰 수족관은 구경조차 못 해본 시절이었음에도, 어머니는 큰 유리관에 금붕어를 넣어놓고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화려한 빛깔의 금붕어가 풍성한 꼬리를 하늘하늘 흔들며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시름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금붕어 편에서 보자면 제아무리 큰 유리관이라 한들 답답하고 무료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이지만, 어머니 눈에는 시름없이 노니는 여유롭고 자유로운 삶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머리가 명석하여 공부에 욕심을 내었지만 외할머니의 삯바느질로 입에 풀칠하는 형편인 데다, 그 시대만 해도 어려운 형편을 무릅쓰고 여자에게 고등 공부를 시킬 만큼 열린 생각을 가진 부모가 드물어서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무심했다. 어머니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를 흠모하여 그분의 가방이라도 들고 따라다니고 싶어 했을 만큼 배움에 목말라 했다. 그런 중에 목포상고를 나온 내 아버지와 연애를 하여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였다.
쇠락하긴 했어도 양반가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고 있던 시댁에서 과부 딸에 빈한한 집안의 어머니가 달가웠을 리 없다. 아버지의 고집으로 어찌어찌 결혼은 하였으나 시댁의 구박이 자심하였다. 당시만 해도 목포상고는 유수의 학교였는 데다 용모까지 준수하여 기대가 컸던 아들이었을 터인데 오죽하였을까. 그런 아들이 한술 더 떠 장모까지 모시고 사는가 하면 난소에 문제가 있어 아이도 낳지 못하는 마누라를 끔찍이 아끼니 시부모의 심사가 어떠했으며 어머니의 눈치 보기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불안감에서였을까, 목마름이었을까. 어머니는 다른 여자의 몸에서 얻은 자식인 나를 당신 배 앓아 낳은 자식인 양 애지중지 키우셨다. 집착이다 싶을 만큼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실제로 어머니는 나의 생모가 나를 잉태하였을 때, 당신의 아이가 다른 여자의 뱃속에 유배를 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종의 자기최면이었지 싶다.
고난은 계속되었다. 아버지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서른아홉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금슬 좋은 부부가 사별을 하면 외려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일찍 새 짝을 찾는다 하더니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얼마 되지 않아 재가를 했다. 어머니가 지금의 아버지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른다. 아니, 어렴풋이 들려오는 어머니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을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것 같다. 들여다보면 부조리 투성이인 삶. 누구라서 남의 인생을 비난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설령 당시 그 사연을 알았다 한들 어린 내가 어찌해볼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달리 화가인 지금의 아버지는 생활력도 없으면서 무시로 바람을 피웠다. 정신적 고통에 생활고까지 얹힌 최악의 새 삶이었다. 그 바람의 결과로 배다른 자식 하나를 더 받아 안아 키워야만 했던 어머니. 애처가였던 아버지나 그렇지 못한 지금의 아버지나 배신을 안겨준 건 마찬가지였다. 고운 모습을 하고 짝과 어울려, 주는 먹이 받아먹으면서 노닐기만 하면 되는 금붕어의 삶이 부러웠을 이유다.
그 금붕어 이불을 나는 한 번도 덮어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지 한 해 만에 홀로 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생을 걸다시피 했던 딸이었으니만큼 당신이 꿈꾸던 삶을 살기 바랐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행복이나마 누려보고자 했을 터. 아마도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나 몰래 장롱 속에 틀어박혀 있는 그 이불을 쓸어보며 박복한 당신의 삶을 한탄하였을 것이다.
내 기억으론 금붕어는 건사하기 무척 힘이 들었다. 요즘처럼 산소 공급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걸핏하면 죽어 배를 드러내고 물 위로 떠올랐다. 비린내 풍기는 사체를 들어낼 때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았다. 슬어놓은 알을 관리하기도 까다로웠고, 수시로 물갈이와 청소를 해주어야 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어쩌면 내 생부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떴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무척 몸이 약했고 신경쇠약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자주 까탈을 부리고 짜증을 내었다. 한약 달이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고, 우물가에서는 지네닭을 만드느라 수시로 닭을 잡았다. 그 광경이 눈에 선하여 지금까지도 나는 닭고기를 먹지 못한다.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기도 수차례였다. 그랬던 어머니가 지금의 아버지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거친 바닷속 물고기처럼 강인해졌다. 무능력하고 무심한 가장을 대신하여 씩씩하게 세파를 헤쳐나갔다. 공부를 탐했던 명석한 머리는 궁색한 가계를 꾸려나가는 데 쓰였다. 언제부턴가 어항은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5년 전 화창한 봄날, 어머니는 95세로 외롭고 고단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회귀를 가볍게 하려 함이었을까, 마지막 2년여는 인연의 끈도 놓고 사랑과 미움의 경계마저 지워버린, 진공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긴 생애를 돌아보면 어항 속 금붕어 비슷한 호사를 누려본 시간은 순간처럼 짧았다. 시댁의 날선 눈총에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랑을 방패 삼아 나를 키우던 7년여이다.
어항이 사라졌다고 어머니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닐 터. 왜 나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금붕어 담은 작은 어항 하나 선물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걸까. 어쩌자고 나에 대한 곡진한 사랑을 집착이고 대리만족이라며 가슴에 비수를 꽂았을까.
이불을 곱게 개켜 다시 장롱 안에 넣는다. 어머니에게 드리는 뒤늦은 선물이라도 되는 양.
첫댓글 다 읽고나서도 멍하니 가슴저린 글 잘 읽었습니다.
이글 쓰시면서 지난 날을 회상하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선생님, 이제는 지난 어려움은 다 내려놓고 편안하셨으면 싶습니다. ^^
감사합니다.
치유의 방법이 된다는 쓰기의 힘을 믿어보려는데 아직은 아니네요.
@이혜연 제 경험으로는
분명 치유가 됩니다.
믿고 열심히 쓰시면서 몸살도 앓고 반성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면서 필력도 늘고 과거와의 화해도 하고 그러다보니
마음이 여유가 생깁디다.
선생님 응원합니다. ^^
연꽃님의 과거사가 그토록 빈약한 줄은 미처 몰랐어요.
하지만 불행했든 행복했든 과는 흘러간 겁니다.
지금의 삶에서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면
지나간 과거의 고달펐던 삶을 비해보세요.
누구나 슬픈 과거는 현재의 작은 불행을 덮어 주는 원동력이 되지 싶어요.
지금 제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어머니'가 아닌, 한 여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것이 새록새록 가슴을 아프게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