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별건가(원미연)
아랫집에 사는 아주머니를 시어머니는 구장댁이라고 부르신다. 구장아저씨는 이십오 년간 동네의 구장 일을 맡아 본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크시다. 지금은 칠십이 넘어 구장 직을 내려놓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구장아저씨라고 부른다. 젊은 시절 한 인물 하셨다는 구장아저씨는 초등학교 때도 늘 반장을 하실 만큼 똑똑했으나, 집이 어려워 졸업을 못하고 머슴살이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아직도 지적 호기심이 강하셔서 나를 보면 인사 겸 한마디씩 물으신다.
“원쌤, 실버하우스가 경로당이라는 건데 실버가 무슨 뜻이여? 도대체 요즘은 경로당까지 온통 영어로 써 놓으니 늙은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요즘 아이들은 또 선생님을 쌤이라고 부른다대.” 은근히 영어 실력을 자랑도 하시며 장난끼 가득한 웃음을 지으시며 나를 “원쌤”으로 부르신다. 한동안 산 너머 아파트에서 경비일을 보시다가 이제는 그마저도 나이가 많다고 써 주질 않는다고 집에 계신지도 오래 되었다. 점심때가 다가오면 오토바이를 타고 경로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술도 한 잔 하시고 놀다 오시는 아저씨의 일상에서 가장 큰 일은 아침저녁으로 구장아주머니를 고개 너머 아파트에 출퇴근시키는 일이다. 아침 일찍 낡은 오토바이 뒤에 분홍색 보자기를 머리에 쓴 구장아주머니가 헬멧을 쓴 아저씨의 허리띠를 단단히 잡고 아파트단지 청소를 하러 출근을 하신다.
구장아주머니는 아랫마을 천동과 둔곡을 지나 고개를 하나 넘는 영대에서 비락쟁이로 시집을 왔다. 잘생긴 구장아저씨는 그녀와 결혼하기 전 연애편지도 써서 보낼 만큼 낭만적이기도 하고 부지런하셨다는데, 지금은 마을에서 한량으로 소문이 나 있다. 구장아주머니가 밭에서 곡괭이를 들고 밭을 만들어 고추를 심을 때도, 참깨 들깨를 낫으로 베고 무 감자를 뽑는 동안에도 구장아저씨가 밭에 나타나는 일은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어쩌다 일거리가 많은 날, 정말 일 년에 한두 번 밭에 나타나신다. 그것도 아주머니가 일을 거의 마칠 때 쯤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느릿 느릿 올라오셔서 뽑아 놓은 무나, 베어 논 들깻단 같은 것을 바퀴 하나짜리 노란 손수레에 싣고 내려가는 일이 전부다.
얼마나 일을 많이 하셨는지 아주머니의 손가락은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마디마디가 대나무 옹이처럼 툭툭 튀어나와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구장아주머니는 매일 새벽 출근을 하기 전 밭에 올라와 밭일을 하고 출근을 하신다. 요즘은 겨울이라 얼굴보기가 힘들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아침에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얼굴이 구장아주머니이다. 아주머니가 가꾸는 텃밭이 우리집 마당과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거실 창 바로 밑으로 온갖 작물이 자라는 구장아주머니의 밭이 펼쳐져 있다. 이제 입춘이 지나면 새벽부터 밭에 올라오시는 구장아주머니를 향해 짖어대는 소심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작고 깡마른 몸에 늘 일할 때면 입는 몸빼 바지에 청회색 장화를 신고 위에는 아들이 입던 낡은 체크무늬 남방을 걸치고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낡은 앞치마를 허리에 묶고 머리엔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 밭에 올라오실 때의 변함없는 모습이다.
봄이 되면 아주머니집 낮은 담장에 울타리 장미와 능소화가 올라가고 골목길 둔덕에 심어진 들깨 둥글레 콩포기 사이에 보랏빛 붓꽃과 커다란 모란꽃, 상사화 등이 작물들과 뒤섞여 피어날 것이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시는 아주머니는 집 안뿐 아니라 집 주변의 모든 빈 땅에 곡식과 함께 어디선가 얻어 온 온갖 꽃을 심어 놓으신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한 뼘 땅도 놀리지 않는 아주머니의 부지런하고 억척스런 성격 때문에 가끔 우리 어머니와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시댁의 한 쪽에 있던 헛간을 허물고 작은 흙집을 얹힌 곳은 구장아저씨네 텃밭 땅이 반이 들어가 있었다. 집을 지으면서 그 땅을 사게 되니 우리집 낮은 담장이 집과 밭의 경계가 되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주머니가 담 밑을 호미로 점점 파고들어 온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을 올리려고 쌓은 축대 바로 아래까지 고추 포기가 심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그것이 못마땅하셨던 시어머니가 작년 여름 한마디를 하신다. 그렇게 담장 밑까지 자꾸 파다가 담이라도 무너지면 어쩔 거냐고 그 밑에 심은 고추 한 줄을 뽑으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자신이 애써 심은 고추 한 줄을 뽑아 버린 구장아주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한동안 냉기류가 흐르기도 했지만, 몇 가구 되지도 않는 마을에서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장아주머니는 인정 많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어머니 말씀대로 자신이 피나게 가꾼 작물들을 수확하면 자식들과 이웃에 후하게 나누어 주신다.
지금은 학교에 다니느라 시간이 별로 없지만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동네에 유일한 아이인 승겸이에게 구장아주머니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귀가 어두우신 시어머니보다 승겸이는 말이 잘 통하는 구장아주머니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마당 옆 밭에서 일하시는 구장아주머니에게 유치원에 다녀온 승겸이는 담장에 매달려 조잘조잘 말을 걸곤 하였다. 아주머니가 일을 하시면서 말을 잘 받아주자 승겸이는 틈만 나면 아랫집으로 내려가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다 손에 무언가 먹을 것을 얻어 돌아오곤 했다.
내가 잊지 못하는 일은 승겸이가 5개월 되던 때 우리에게 처음 왔을 때, 동네에 오랜만에 아이가 생겼다며 마을 아주머니들이 분유를 사들고 아이를 보러 오신 일이다. 구장아주머니는 승겸이를 보자 “아이가 뽀야나니 엄마를 꼭 닮었네~”라고 해서 내 코끝을 찡하게 만드셨다. 얼마 전 반상회 날에는 승겸이 보고 “엄마한테 동생 하나 더 낳아 달라고 햐.”라는 말씀을 하셨다가 구장아저씨에게 쓸데없는 말 한다고 핀잔을 들으셨다.
두 양주가 나란히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 언젠가 아주머니에게 “날마다 아저씨가 출퇴근도 시켜주시고 좋으시겠어요.”라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괜히 버스비 내느니 우리집 아저씨 담배값 하라구, 내가 월급타면 한 달에 십오만 원씩 준다고 태워다 달라고 했어. 놀문 뭐하냐구 내가 그렇게 하자구 했더니, 자기도 좋지 뭐, 내가 일자리 맹글어주니께~”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전에는 아주머니가 새벽에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은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 1월호에 길린 원미연님의 글입니다.
첫댓글 왠지 마음이 따스해지는 이야기입니다. 크고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이 아니라 작고 소소한 소통들에서 오는 소박함. 행복이 별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