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펜캐처
윤성근
그는 불펜캐처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이다.
불펜에서 몸을 푸는 투수의 공을 받아주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다. 연습을 도와주는 일이니 작전은 필요 없다. 그러니 긴장할 일도 없다. 불펜에 일이 없을 때는 팀 내의 이런저런 허접스러운 일을 도맡아 한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삐 뛰어 다녀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혹시나 하고 기대해 보지만, 실전 선수로 발탁되어 불펜을 벗어날 가능성도 없다.
그는 말수가 적다. 누가 묻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속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참고 견디는 것이 몸에 배어 조용할 뿐이다. 패기도 오기도 꽁꽁 묶어 가슴 깊이 묻어 놓아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웃는 낯으로 대한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포장일 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웃음에는 생동감도 변화도 없다. 빵틀에서 찍어내는 붕어빵 같다.
야구는 기록경기다. 특히 프로선수라면 개인성적에서부터 신상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모두 알려져 있어도, 어느 팀의 불펜캐처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의 이름도 선수명단에 어엿이 올라 있지만 운동장에서는 뛸 수 없는 허깨비 선수다. 잠깐이라도 실전에서 뛰어보고 싶은 남자, 시합 내내 더그아웃에서 서성거리는 후보 선수가 부러운 남자, 이것이 그의 위상이다. 그래도 구회 말 호쾌한 역전홈런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연간 관람객 수가 칠백만을 넘었다는 우리 프로야구, 일승일패가 초미의 관심거리인 운동장은 연일 흥분의 도가니다. 팽팽한 대립의 균형을 깨는 홈런, 위기를 넘기는 호수비好守備에 선수도 관중도 함께 열광한다. 그래도 그는 이 열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환호하는 현장을 힐끗힐끗 넘겨다보며 분위기를 느낄 뿐이다.
불펜캐처는 경기력이 뛰어나지 못한 선수가 지키는 자리다. 현역에서 뛰다가 한발 물러선 선수나, 애초부터 능력이 모자라는 선수가 맡고 있다. 그는 프로팀에 입단하면서 잠깐 현역선수로 뛰기도 했지만, 곧바로 불펜캐처로 밀려났다. 운명이겠거니 하고 체념한 지 오래지만, 선수로 뛸 수 있는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 모두 손에 잡을 수 없는 몽환夢幻, 그래서 더욱 운동장의 열기에 연연한다.
그도 큰 선수가 될 꿈을 안고 운동장에 뛰어들었다. 야구를 익히던 학생시절, 지금 인기를 누리고 있는 내로라하는 선수들과도 한 솥밥을 먹던 같은 팀의 연습생이었다. 잘나가는 선수들과 틈이 벌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애초부터 실력이 모자라서? 팀을 잘 못 만나서? 아니면 또 다른 무슨…? 서로의 위상이 크게 달라진 지금, 그들과 훈련 동기생이었음을 더 이상 내비치지 않는다.
현대야구를 불펜야구라 부르기도 한다. 투수교체의 성공 여부가 경기의 승패를 가름하기 때문이다. 투수교체가 예상될 때쯤이면 TV중계 팀이 으레 불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누가 계투繼投를 준비하고 있는지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불펜캐처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는 일은 없다. 투수를 바꿔야할 긴박한 상황이니 관심의 대상은 투수일 뿐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공을 주고받아도, 던지는 이와 받는 이의 위상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는 투수가 불펜에 들어서야 일이 시작되고, 투수가 연습을 마치면 더 이상 불펜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그의 역할은 타의에 의해 시작되고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라진다. 그는 이렇게 하찮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야구장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나마 배운 것이 야구뿐이기도 하지만, 남보다 뛰어난 기술이 없어도, 나이가 더 들어도 할 수 있는 것이 불펜캐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들이 욕심내는 자리도 아니니, 천직이겠거니 여기고 있다.
그가 불펜을 벗어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 막 돌을 넘긴 아들의 생글거리는 얼굴이 어른거린다. 더러는 환하게 웃는 아내의 모습이 함께 보이기도 한다. 자기를 하늘 같이 믿고 있는 가족이다. 자신은 과연 이들에게 자랑할 만한 아버지이고 남편인가 생각하면 금세 어깨에 힘이 빠진다. 그럴 때면 야구장갑을 벗어 내동댕이치기도 하지만, 누가 볼세라 얼른 주워들기 바쁘다. 당장 야구장을 떠난다 해도 말릴 사람이 없지만, 야구 아니고선 다른 일에 도전해볼 재주도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변변찮은 팀 내 위상이라도 지켜야 산다고 자신을 추스른다.
불펜캐처, 그는 과연 팀의 승패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존재인가.
그는 어깨가 움츠러질 때면 곧잘 2008년 북경 올림픽, 쿠바와의 야구 결승전을 떠올린다. 불펜캐처의 결정적인 제언이 승리를 이끌었던 경기다. 한국팀이 삼 대 이, 한 점 차의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구회 말 한국의 마지막 수비, 일사 만루의 긴박한 상황에서 투수를 교체하려던 감독이 불펜캐처에게 물었다. 몸을 풀고 있던 투수 중 누가 컨디션이 더 좋으냐고. 그때 불펜캐처는 정대현을 추천했고, 윤석민을 마음에 두고 있던 감독은 지체 없이 그의 천거에 따라 투수를 교체했다. 긴장 속에 등판한 정대현은 연속 두 개의 스트라이크를 던지고, 세 번째 공으로 병살타를 유도하여 승리를 낚았다.
불펜캐처의 추천이 적중했다. 그래도 이 승리가 그의 조언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수들이 승리를 자축하여 운동장에서 헹가래 칠 때, 불펜캐처는 더그아웃 구석에서 혼자 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적중했다고 만족했을까? 우리는 불펜캐처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사상초유의 올림픽 야구 금메달 획득에만 흥분하고 있다.
30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사무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구석자리에서 나이든 사내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첫댓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치가 드러나고 추앙받는 존재는 얼마 되지 않지요.
아무 존재가치도 없는 더 많은 존재들이 있기에 가치를 인정받는 그들이 있지 않을까요.
마음이 짠해지는 글, 불펜캐처의 애환과 심리가 아주 잘 그려진 이 글은 그들에게 바치는 글 아닐까 싶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몸과 값을 내 보이지 않을 거예요.
볼펜 개처 굿 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