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의 빈자리
김광남
얼마 전 보일러를 교체 하러 고향 집에 갔었다. 사실은 동생 집으로 시집보낸 난로의 안부가 더 궁금했다. 거실에 들어서자 철판난로가 있던 자리에 듬직한 주물 연탄난로가 앉아 있으니 거실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였다.
“아주버님, 주물 연탄난로 넘 좋아요! 집을 하루 이틀 비워도 불 조절만 잘하면 꺼지지도 않아요.”
“듬직해 보이지요? 평생 같이해도 될 겁니다.”
“맞아요.”
“여름철에 연통 철거하면 분재 좌대나 수석 좌대로 쓰시구요. 겨울이 오면 난로로 쓰세요.”
지금 내가 사는 원주 집은 40년이나 되어 많이 낡은 집이다. 이 집을 매입할 당시엔 빛 좋은 개살구인 줄 몰랐다. 해마다 날림공사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벽면의 단열재라고는 달랑 10mm의 얇은 스티로폼 한 겹이 벽돌 속에 내장되어 있을 뿐. 서른다섯 해를 사는 동안 창호, 주방과 화장실, 방바닥, 상하수도, 옥상 방수공사 등으로 일신했다.
그렇지만 벽으로 스며드는 한기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찬 벽면은 외풍이 되어 잠잘 때 이불 밖의 코를 시리게 했다. 외벽에 150mm의 단열재를 넣고 석고보드를 붙인다면 200mm가까이 벽이 두꺼워져 집안 공간이 줄어들기에 벽면 시공을 포기했다.
결국, 난로를 설치해 외풍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이구삼탄 주물 연탄난로는 생각보다 가격이 높았지만, 평생을 함께 하리라 생각하니 고마움으로 값을 지불했다.
주물 연탄난로를 들여놓고부터 집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난로에 불을 지펴 무쇠가 달기 시작하면 따뜻함으로 몸은 물론 마음마저 덥혀주었고 훈기는 오래도록 거실과 방안을 가득 채웠다. 봄이 오면 연통을 분리해 떼어버리고 말끔히 닦고 기름칠하니 골동품 같은 몸체는 예술품이었다. 분재나 수석의 좌대로 탈바꿈해 작품을 돋보이게도 했다. 하루에 연탄 석장, 천팔백 원어치로 따습게 지낼 수 있었다. 연탄을 갈며 재를 버리는 게 번거롭고 귀찮기는 해도 놀이 삼아하기로 했다.
난로 위에 군입거리로 고구마를 올려 놓으면 구워지면서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한입 베어 물면 쫀득한 단맛이 혀에 착 감겼다. 세상 인심도 이처럼 넉넉하고 달았으면 싶었다. 주전자의 찻물이 끓는 소리도 흩어진 마음을 한데 모아 주는 것 같아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손님이 오면 난로 가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먹한 사람도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듯했다. 외출해서 추위에 떨며 들어온 날이면 훈훈한 열기가 더욱 따뜻이 몸을 녹여주었다. 난로가 몸만 녹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훈기로 감싸 안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찻물을 데우고, 밤, 은행, 가래떡 등을 난롯불에 구워 먹는 재미는 또 어땠는가. 물이 상시로 끓어 집안 공기가 건조하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은 가습기도 없었다.
연탄불은 맨 위 연탄이 절반 정도 타오를 때 가장 따듯하고 은근하다. 백세시대에 혈기왕성한 젊은이보다 석양을 바라보며 불타오르는 노년의 열정이 그 불에 비교될 것같다. 그런 불엔 어떤 음식이든 가장 맛있게 달여지거나 구워진다.
어느 날 아내가 모임에 가면서 냄비에 김치 깔고 밥과 고추장을 얹고, 또 들기름 붓고 깨소금과 김을 살짝 뿌려 점심을 준비해 놓았다. 이걸 식사 십 분 전에 난로 위에 올려놓으라 했다. 구수한 냄새가 나면 어머니랑 드시라고 일러주고 갔다. 구순인 어머니와 냄비를 마주하고 앉아 볶음밥을 먹으니 초등학교 때 교실 무쇠 난로에 층층이 쌓였던 도시락이 보였다. 내 도시락이 맨 밑에 있어 타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선생님은 벌써 고르게 도시락을 바꿔 놓으셨다. 4교시가 끝날 무렵이면 교실마다 풍겨 나오는 도시락 냄새가 교실과 복도에 차고 넘쳤다.
“화롯불에 보리밥을 김치하구 고치장만 넣구 비벼도 너희 오형제 게 눈 감추듯 잘 먹었잖냐?”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배고프던 그 시절이 보이는 듯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 집 난로는 사시장철 그 자리에서 묵직하게 버티고 앉아 따듯한 훈기로 식구들과 정이 들었다. 사람도 제 할 일과 주위의 일까지 묵묵히 챙기며 내색하지 않으면 은연중 믿음과 정이 간다.
수년 전부터 도시가스를 공급 받기 위해 설비공사를 요청했지만 번번이 무산되더니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저렴한 도시가스를 쓰게 되어 반갑기는 하지만 결국 정든 난로와 이별하게 되었다.
동생 내외는 도시가스공사가 임박했을 때부터 난로에 눈독을 들이더니, 공사가 끝나면 쓰지 않을 난로를 양도해 줄 것을 벌써부터 간청했다. 그냥 장식용으로 쓰려 했지만 동생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시집 보내기로 했다.
난로를 보내던 날, 몸체를 삼등분으로 분해해서 동생과 함께 차에 싣는데 우리 집에 올 때 보다 더 무거워져 들기조차 버거웠다. 난로가 가기 싫었던 건지 내 힘이 부쳤던 건지 아마도 서운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낱 무쇠 연탄난로 일망정 십 년의 세월을 함께 하며 고운 정이 들었는데 어찌 이별이 서운하지 않겠는가. 난로가 있었던 빈자리를 보며, 동생네 거실에서도 묵직하게 자리 잡고 변함없는 훈기로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고향 집 보일러 교체 일을 마치고 동생 집에 들렀다. 동생네 거실에 자리 잡은 난로에 둘러앉아 제수씨가 건네는 생강차를 마시며 난로 이야기와 옛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거실을 나오며 거기에 듬직하게 버티고 앉아 있는 난로를 뒤돌아본다. 제수씨의 난로 칭찬에 잘난 내 자식을 보는 것 같아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큰 딸애를 유학 보내고 또 작은 애를 시집보내 던 날, 애들의 체취만 남아있는 썰렁한 빈 방에서 갑자기 뭉클한 그리움이 솟아올랐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과 사물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그건 필연이다. 먼 이국에 있거나 이웃에 있어 목소리를 듣고 또 화상(페이스톡)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함께 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다가 막상 빈자리를 보며 아쉬워하는 게 우리들이다. 내게서 떠나간 난로이지만 고향의 동생 집에서 따듯한 훈기로 사랑받고 있으니 이 또한 복이 아닌가.
난로와 헤어지는 것도 언젠가 세상과의 이별하는 날을 위한 작은 연습이리라. (2021.3.31)
첫댓글 김광남의 난로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까지 따듯해 지네요.
준빠샘~ 참 오랜만에 여기에서 뵙내요? 건강 좋으시지요? 뵌지가 십년이 넘었군요. 지상에서 좋은 작품 보니 늘 반가웠습니다. 늘 평안하시십시오.~^^♡
덕분에 교실 안 난로와 도시락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연탄과 난로, 몸과 마음을 모두 따뜻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지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이혜연 선생님 안녕하세요?
졸필을 복희샘 덕에 여기에 붙이니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 군요?
선생님 늘 감사합니다. 위암 수술후 자리를 많이 비웠습니다. 죄송합니다.
밥 잘 먹고 있습니다. 늘 건강 히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