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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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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 남한강 10 * 13 * 6
아내의 그림
아내는 그림을 그렸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다. 동호회 형식으로 모여 취미로 장르가 같은 그림을 배우고 창작하는 수준이었다. ‘호암아트홀’에서 동호회를 중심으로 전시회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5여 년 전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며 한동안 열정도 대단하였지만 그 것도 잠시... 붓을 놓았다고 하면 좀 거창하지만 지금은 그 당시에 표구해서 몇 점 벽에 걸어놓은 그림으로 그 때의 열정을 대변하고 있다. 처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는 생뚱맞은 선언에 의아해 했었지만 아내의 손끝에서 창조되는 결과물이 어떠할까도 궁금했었다.
나는 그림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그림은 그리고 싶었고 잘 그렸었다. 돌이켜 보면 그림에 대한 이론에는 관심이 없고 대상을 놓고 그리는 것 보다는 그냥 기분이 내키는 대로 만들어지는 조형미에 흥미를 두었다.
학창시절 中(서울동양중학교), 高(서울공업고등학교) 때에는 미술부에 가입하여 교내 미술전시회에 출품도 했고 입선 정도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 당시 고등학교 전공과목으로 산업디자인이 있었는데 디자인 과목을 담당해 주셨던 선생님은 후에 대전산업대학교(現 한밭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던 이시웅 선생님이셨고 내가 입학하는 해(77년)에 부임하시어 우리과(인쇄과)의 담임을 맡으셨다.
선생님은 학창시절을 통틀어 내가 제일 존경했던 분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 당연시 되었던 회초리와 감정이 실린 손에 의한 체벌을 부정하고 꼭 체벌이 필요하다 싶으면 교단으로 문제의 학생을 불러내어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게 하고 “앞으로 저는 오늘과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여러분 앞에서 약속합니다.”라는 식으로 선서를 시키는 방법으로 지도하셨다.
그런 선생님께서 우리 학급이 2학년 되던 해에 당시 대전산업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로 발령을 받으시어 가시게 되었다. 칠판에 한 줄의 글을 남기시고...
‘1999년 9월 9일 오전 9시에 한강 인도교(現 제1한강대교) 중지도(후에 노들섬으로 개칭하였다)에 있는 이원등 상사 동상 앞에서 만납시다.’
[이원등 상사는 1966년 2월 4일 고공침투 낙하조장으로 한강 백사장에서 고공 강하훈련을 하고 있던 도중 한 동료의 낙하산이 고장이 나 낙하산을 펴지 못하고 낙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동료의 낙하산을 공중에서 고쳐주고 안전하게 낙하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자신은 낙하산을 펴지 못하고 얼어 있던 한강 바닥으로 추락, 사망하였다. 사후 육군에서는 그의 군인정신을 기려 그를 상사로 1계급 특진하였고, 한강 중지도에 동상을 세웠다.]
당시 19세 어린 나이로 20년 후의 시간은 까마득하였었다. 떠나시는 날 나는 아쉬움에 마음으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나를 참 신뢰했었다. 학업에 남다른 역량을 발휘해서가 아니라 선생님의 교과 과정의 일부였던 도안(design)에 내가 소질이 있다고 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나도 나의 손끝에서 나오는 디자인의 결과물에 감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미대 진학에 대한 꿈을 키우던 시절이 아마도 선생님의 권유가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꿈을 키우고 장래에 대한 환상이 현실적인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꿈을 접었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선생님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20년이란 시간을 보낸 후 약속이 되어있는 이원등 상사 동상 앞으로 시간에 맞추어 나갔었다. 30분 정도 일찍 나간 이유도 있었고 아직은 이른 시각으로 인하여 한 초로한 노인만 동상 앞에 앉아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노인에게서 좀 거리가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아 무심히 지나는 출근 길 차량의 분주한 행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30분의 시간이 또 흘렀을까 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네신다.
‘혹시 배성은 학생 아니신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가까이서 본 그 노인이 바로 선생님이셨다. 세월의 심술을 이기지 못하시고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이신 선생님이셨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내가 불혹의 나이가 되었어도 선생님의 시선에는 아직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선생님은 초로의 노인이 되셨어도 나에게는 고교시절 존경하던 담임선생님 그대로이셨다. 서로의 안부를 물을 것도 없이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20년 전으로 되돌아 간 것이었다.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렀다. 아내는 가사일 중간 중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집중력이 대단했다. 살림이 뒷전인 것은 아니지만 안방 중앙을 차지하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아내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몇 몇 작품을 그렸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애착이가는 작품은 십장생이다. 크기도 엄청나 완성까지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제일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는 의미는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것이 아니라 대작(blockbuster)을 그리는 아내의 열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안쓰럽게 지켜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아내에게 표구를 제안했더니 표구비가 얼만데 하며 펄쩍 뛰었던 아내였다. 크기와 함께 비례해서 표구비도 만만치 않아 아내의 거부로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내고 이사도 3번이나 다니면서 10년 넘게 방치했던 그림이었다. 몇 개월 전 근무 중에 우연히 표구집이 눈에 띄어 문득 아내의 그림이 떠올라 들어갔다. 아내의 그림 규격을 말했더니 그렇게 큰 그림도 있냐며 보통 큰 그림이라면 전지 크기의 규격인데 아내의 그림 규격이면 표구비 45만 원 정도는 들어가겠다는 사장의 말씀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매달 받는 용돈 25만원에서 5만원만 따로 저축을 해서 표구비를 마련하자는 생각으로 몇 개월 초긴축재정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 인고(?)의 세월을 보낸 후 표구 사장에게 5만원만 깎아 달라며 매달린 보람으로 40만원으로 흥정이 되어 비로소 아내의 그림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었다.
요즘은 하늘석실에 올라 한 벽면을 차지한 아내의 그림을 바라보면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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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30년 전 이시웅 선생님의 '서울공업고등학교 인쇄과' 제자입니다.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해서 이렇게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 011-742-4320
그러시군요. 슝교수하고는 각별하게 지냅니다.
아품도 불구의 의지로 건강을 회복하고'
11, 1. 저녁에 자택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