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그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게 언제였을까. 대학 1학년 때 경북 영양에서 농활을 마치고 상경하기 전, 안동역 광장에서 안동, 봉화, 영양으로 농활을 온 대학들의 연합집회가 있어서 안동에 들렀었다. 안동까지 왔는데 하회마을을 못가고 돌아가야 하는 마음이 못내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30년도 더 지나서 드디어 하회마을에 발을 디뎠다!
아침나절 내리던 비도 잦아들어 우산 없이 산책하듯 걸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회마을 입구에 있는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에서 탈놀이를 관람하는 것으로 하회마을 일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 흩어져 앉아 파계승 마당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전통극들은 특별한 무대장치가 없는 마당에서 무대와 객석의 구분없이 연행되는 것이 특징인데,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해서인지 마당이라도, 계단식 관람석이 빙 둘러친, 현대극의 관람장 형식을 비교적 갖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계승 마당과 양반, 선비 마당을 구경하다가 하회마을 해설사와의 약속 시간이 되어 아쉽게도 중간에 빠져 나왔다. 개인적인 여행이었다면 나는 끝까지 공연을 다 보고 일어났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대본으로만 읽던 것을 공연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서인지 외국인들을 안동 곳곳에서 만났지만 특히 이곳, 하회마을과 탈놀이전수관에서 많은 외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문득 캐나다 조카들이 생각나서 동영상을 찍어 동생에게 카톡으로 보내 주었다. 워홀 중인 딸에게도 보냈다.
마을입구에서 만난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드디어 마을 안으로 한걸음씩 들어갔다. 장승과 솟대가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하여 준다. 우람한 장승이 아닌 깜찍한 장승 한쌍이다. 논에는 노랗게 익은 벼들이 아직 베어지지 않은 채로 선 논도 있고, 베어서 뉘어놓은 논도 있다. 베어놓은 벼는 단을 묶어 세워두었어야 하는데 미처 일손이 미치지 못한 사이 비를 맞아 버린 모양이다. 뉘어진 벼가 무논에 적셔진 모습이 안타까웠다. 논이 시작된 안쪽에 마을의 그림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해설사 앞에 모인 우리는 충효당, 양진당, 북촌댁을 지도 위에서 오가고 있다.
시간여행을 하듯 21세기 현실에서 갑자기 16세기 마을, 일부는 19세기인 마을로 들어가 본다. 흙을 베이스로 하고 돌이나 기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섞은 것 같은 여러 형태의 담장들. 흙에 시멘트를 섞었나, 모래를 섞었나 재료가 궁금하여 손으로 만져보아도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무슨 재료로 만들어 올린 담장인지 다 알 수가 없다. 다만 기와로 지붕을 올린 듯한 마무리에도 도시의 담장과는 다른 흙담이 주는 온기가 그저 좋았다.
좁은 고샅도 대체로 반듯반듯하여 좁아도 소박한 느낌보다는 뭐랄까, 어떤 깐깐함이랄까, 고지식함이랄까
위풍당당한 선비의 도포자락 날리는 소리라도 들릴 듯하였다. 배우 류시원의 본가라는 집 대문 옆에 담연재라 새겨진 구멍이 뚫린 돌판이 있었다. 영주언니가 손을 넣어보던 모습이 선하다. 연애편지를 넣어두기도 했을까? 양반들의 고지식함이 느껴지는 반듯반듯한 골목길에 그런 낭만적인 공간이 하나쯤 깃들어 있었다면, 단조로운 사분음표 사이에 팔분음표나 십육분음표 하나가 섞인 악보처럼 잠시 경쾌해질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구멍은 우체통이 아니었다. 노자가 떨어진 나그네들을 위해 욕심부리지 말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작은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오늘날의 공중화장실 같은 공간을 대문 밖에 마련해둔 착한 양반집은 안타깝게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 싶다며 방문한 류성룡 종택, 충효당 앞 화단에는 그녀가 심어놓은 구상나무가 이름표를 달고 서 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말하자면 강의 상류이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셈인데,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삼신당 당산나무가 마을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로 하회마을 집들은 이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마을의 집들처럼 남향이나 남동향으로 배치되지는 않는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집이 들어앉은 방향이 일정하지 않는 특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당산나무와 강이 마을의 집들을 여러 방향으로 세워지게 한 것이라 하였다. 당산나무를 둘러친 새끼줄에는 저마다의 소망과 기원을 눌러쓴 수많은 흰종이들이 묶여 있었다. 나도 잠시 망설이다 급히 기원하는 바를 써서 세로로 접은 뒤 새끼줄 한쪽에 묶고 합장했다.
큰 기와집 바깥쪽으로는 초가집들이 낮게 드리워 있는데 초가는 주위에는 밭이 이어져 있었다. 모과나무, 감나무는 저희의 익어가는 열매들로 가을을 한껏 아름답게 물들이고 섰다. 알록달록 담장 아래 핀 다알리아꽃들이 이 오래된 마을을 밝히는 어린 생명들 같다. 아마 여름 담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능소화도 피었겠지?
부용대와 연결되는 소나무숲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고 싶은 길이었다. 조선 선조 때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에우기 위해 류성료의 형인 류운룡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낙동강 범람에 대비한 방재림의 역할도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류성룡, 류운룡 형제의 강학 공간이었다는 옥연정사, 겸암정사는 부용대 절벽 위에 마주하고 있다. 서애는 노년에 옥연정사에 기거하며 매일 층길을 걸어 겸암정사에 머물던 형을 만나러 다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도 이 곳 옥연정사에서 쓴 것이라 한다. 이미 번잡할 것 없어뵈는 만송정도 모자라 굳이 배를 타고, 절벽 위까지 올라가야 하는 곳에 정사를 지은 학자의 욕심을 생각해 본다. 스스로 돌을 나르고 기와를 옮기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 난해한 절벽 위에 지은 저 아름다운 건물은 수많은 아랫것들의 목숨을 줄여가며 지은 것이 아닌가, 마음이 못내 불편하였다.
소나무 아래로 난 길을 걸어 부용대가 건네다 보이는 곳에, 저 불일암에서 본 '빠삐용 의자'를 닮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돌아가며 그 의자에 앉아 서로 피사체가 되었고 부용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절벽 위에 지은 부용대에서 마을입구로 나오는 길은 벚나무길. 벚꽃 만발한 꽃터널을 상상하지 않아도 좋았다. 오른쪽은 그야말로 황금들녘. 벚나무 사이사이로 금빛물결이 참 풍요롭고 평화로웠다.
부용대를 안고 도는 물길 곁 벚나무길을 걸으며,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물길이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지형 때문에, 그 '휘돌아나가는' 현장을 내내 보며 걷는 길 때문에 엉뚱하게도 정지용의 `향수`가... 누군가에겐 이 길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리운 곳이기도 하겠지. 시간이 흐른 뒤 안동을 떠올릴 때 내게도 이 길은 그리운 길이 되어 있을 수 있지.
우리는 16세기 마을에서 21세기로 빠져나오며 하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점프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첫댓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하회마을!
볼거리, 즐길 거리, 들을 거리, 배울 거리... 쓸 거리. 너무 깊고 방대한 하회 마을이지요. 뜻밖에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볼 기회가 주어졌는데 끝까지 보지못해 많이 아쉬었어요.
느리작느리작거리며 여유로운 발길 못한 하회마을 유람도 서운했어요. 혹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부용대에 올라가 하회마을을 한 눈에 볼 수있는 시간 갖고파요. 그리고 벚꽃 흐드러진 화려한 뚝방길도요. 하회마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해주신 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