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 : 2018. 3. 26(월요일)
2. 누구와 : 아내 그리고 나
3. 등산시정
캐리비안 온천 건너 삼산약국 - 옥녀봉 팔각정 - 호숫가 - 연향마을 - 원점회귀
4. 개요
오늘 집사람과 함께 옥녀봉에 다녀왔다.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산책삼아 가볍게 다녀오는 산이다.
내가 처음 이 산에 오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나의 선고와 함께 하수오 캐러 와서 정상에 올랐다. 나는 삼으로 엮은 망태기를 메고 호미를 가졌고, 선고께서는 삼각형 쇠 갈구리와 괭이를 가지고 왔다. 나는 댕댕이 넝쿨과 하수오가 비슷하여 구별을 못했다. 선고께서 이르시기를 잎을 땄을 때 우윳빛 액체가 나오는 것이 하수오라고 하셨다. 그 때 약초를 캐면서 오른 길은 지금 팔각정 아래 호수와 접해있는 곳에서 벼랑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어릴 때 그렇게 높게 여겨졌던 산인데 높이는 지금와서 보니 고작 해발 160m 정도인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이 산을 옥녀봉 덤이라고 불렀다. 덤이란 강물이 굽이쳐 감돌아 흐르다가 빠른 유속이 깎아지른 절벽과 만났을 때 깊이 패어 물은 깊고 마주 본 산이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 진 곳을 경상도에서는 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옥녀봉 덤은 경사가 급한 관계로 위험해서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았기 때문에 희귀한 약초가 고스란히 잘 보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오른 길도 경사가 급한 절벽과 절벽 사이에 조금 완만하게 경사진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을 비집고 올라오면서 약초를 캔 것이다. 나의 선고께서 말씀하시기를 옥녀봉에서 캔 하수오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위틈에서 자랐기에 약효가 평지에서 캔 것 보다 좋다는 것이었다.
나의 선고는 한약에 대해 한의원에 버금 갈 정도로 많이 알고 계셨다. 그것은 당신께서 좌골신경통(디스크)으로 20여 년간 병상에서 고생하시는 동안 동의보감 25권을 들고 지내셨다. 동의보감 25권을 거의 외울 정도로 읽으신 것이다. 결국 동의보감에서 화제(和劑)를 얻어 자신이 처방하여 병이 나으신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자생 약초를 캐어 법제를 한 후 집에 보관하여 상비약으로 썼던 것이다. 가족은 물론 이웃 주민들도 선고의 상비약 효험을 많이 보았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여간 아파서는 약방이나 한약방에 가지 않고 가정에서 자생 약초를 이용한 조약을 썼다. 큰 병이 아니고는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병원비가 소득에 비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팔각정에서 아래 호수를 바라보다가 옛 일을 생각해 낸 것이다. 돌아올 때 혹시나 덤 아래로 내려가면 옛날에 올랐던 곳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호수 쪽으로 내려갔더니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가 없어 연행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캐리비안 온천방향으로 걸어왔다.
그보다 앞서 팔각정 아래에 적혀 있는 옥녀봉 전설을 자세하게 읽어 보았다. 안내판이 한정되어 있어서 축약하여 써 놓았다. 그래서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할 필요성이 있어서 곤명면지의 향토사를 조사하였더니 전설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내용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이 봉우리에 옥녀(玉女)라는 아가씨가 살았다. 용모(容貌)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품행(品行)도 단정(端正)하였으며 더욱이 베 짜는 데는 남다른 훌륭한 솜씨를 가졌었다. 그녀는 옥녀봉에서 건너편 한복산이란 봉우리에 배(布)를 날아 그 배(布)를 곱게 짜서 덕천강(德川江) 맑은 물에 고히 씻어 완사(浣紗)들 넓은 벌판에 말려 시정(市井)에다 팔아서 먹고 살았다. 이런 사실이 소문(所聞)이 되어 널리 원근(遠近) 마을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때 덕천강(德川江) 상류(上流)에 사는 민(閔)도령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옥녀(玉女)란 아가씨를 보고 아름다움에 그만 혹하여 마음에 크게 결심(決心)을 하고 옥녀(玉女)에게 다가가 평생(平生)을 두고 사랑할 것을 호소(呼訴)하면서 청혼(請婚)을 하였다. 옥녀(玉女)도 지성(知性)이 넘치고 늠름하고 잘 생긴 민(閔)도령이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옥녀(玉女)는 한 가지 조건(條件)으로 남아(男兒)의 입지(立志) 관문(關門)인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연후(然後)에 청혼(請婚)을 받아 드린다는 것이다. 민(閔)도령도 이를 쾌(快)히 받아들여 결합(結合)을 굳게굳게 약속(約束)하였다. 그 후 민(閔)도령은 피나는 정력(精力)을 기울고 극기(克己)로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를 계속(繼續)하여 마침내 대망(大望)의 과거(科擧) 길을 떠나게 이르렀다.
한편 옥녀(玉女)도 민(閔)도령의 인품(人品)과 의지(意志)를 보아 기어코 급제(及第)할 것을 예견(豫見)하고 환희(歡喜)와 희망(希望) 행복(幸福)한 보금자리의 꿈을 꾸면서 낭군(郎君)인 민(閔)도령에게 드릴 옷감을 정성(精誠)스럽게 베를 짜기 시작(始作)하였다. 이 무렵 고을 사또 행차(行次)가 옥녀(玉女)봉을 지나게 되었다. 실(實)은 사또는 옥녀(玉女)의 미모(美貌)가 뛰어 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 자태(姿態)를 탐내어 보러 오는 길이었는데 옥녀(玉女)는 이미 민(閔)도령과 혼사(婚事)를 정(定)하여 그 신랑(新郞)의 옷감을 짜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 사또는 질투를 느껴 감정(感情)을 억제(抑制)하지 못하고 크게 노(怒)하여 요망(要妄)한 계집이 행차(行次)를 어지럽힌다는 구실을 붙여 사또 손수 환도(還刀)를 뽑아 배(布)의 날줄을 무도 잘라 못쓰게 하여 버렸다. 옥녀(玉女)는 어처구니없이 당한 일에 너무나 분(憤)하고 억울한 나머지 낙담하여 “엉엉”울다가 남편 될 민(閔)도령을 맞이할 명분(名分)이 없다고 판단(判斷)하고 사또를 호되게 나무란 뒤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고 덕천강(德川江) 물에 몸을 날려 죽고 말았다. 사또는 이 돌발(突發) 광경(光景)을 보자 경악(驚愕)의 단말마(斷末魔)적인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피를 토(吐)하고 죽었다 한다.
한편 민(閔)도령은 과거(科擧)에 장원급제(壯元及第)라는 영예(榮譽)를 획득(獲得)하여 의기양양하게 금의환향(錦衣還鄕) 도중 이 기쁨을 사랑하는 옥녀에게 알리 고저 먼저 이곳을 찾았다. 와서 보니 이미 비참(悲慘)한 최후(最後)를 마친 후였다. 민(閔)도령도 너무나 충격(衝擊)을 받아 일생(一生)을 동거동락(同居同樂)하자고 맹서(盟誓)한 사랑하는 아내 될 사람을 다시 찾을 길이 없으니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내게 무슨 소용(所用)있으랴 생각(生覺)하여 옥녀(玉女)를 부르고 부르면서 강물에 투신(投身)하여 일생을 마쳤다 한다.
이 비연(悲戀)이 끝난 이후 이 벼랑 밑을 지나는 혼인(婚姻) 행차(行次)는 어김없이 화(禍)를 당하였으므로 금기(禁忌)의 길이 되어 오랫동안 신행(新行)길은 멀리 우회(迂回)하여서 다녔다 한다.
주민(住民)들은 옥녀(玉女)의 넋이 어린 이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이라 이름 짓고 앞 벌판을 옥녀(玉女)가 비단을 씻고 널었다하여 지명(地名)을 浣 : 빨완 紗 : 비단사자를 써서 완사(浣紗)라 부르고 있다. 상봉(上峰)에는 옹달샘이 지금도 있으며 옥녀(玉女)가 식수(食水)와 배(布) 짜는 용수(用水)로 썼다 한다. 옥녀봉(玉女峰) 밑은 배 날던 곳이라 하여 아무리 강(江)바람이 거세어도 이곳만은 바람기가 없이 잔잔함으로 주민(住民)은 옥녀(玉女)의 혼(魂)이 지금도 서려 있다고 여기고 있다. 또한 한복산에는 배 날던 돌기둥과 배틀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구멍이 지금도 역연(歷然)하게 있고 배를 짜서 한복(韓服)을 마련한다는 뜻에서 한복산(韓服山)이고 산허리에 열 두골이 있어 열 두 폭 치마를 상징함이라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덕천강(德川江)의 교통수단(交通手段)인 완사(浣紗) 금성(金城)의 나룻배는 천년이 넘도록 옥녀봉(玉女峰) 밑 나루터에서 강폭(江幅)을 오고가고 함이 배(布)를 짜는데 북(씨날)으로써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