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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학 권두칼럼 6>
꽃의 시학과 지혜로운 삶의 교시
- 박용재 시인의 엄숙한 창조행위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 고문)
1. 감동의 느낌표와 신선한 생명감
모름지기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의 “덧없이 흘려보낸 오늘은, 앞서간 어제의 그들이 그렇게 소망하던 내일이었다.”라는 그 일깨움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허락된 시간을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가치 있는 역할에 대처할 바다. 이처럼 패배와 불안감을 씻어버리고 역풍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서 차별성을 구축한 특정한 시인의 시집 평설에 있어 따뜻한 일상의 안부를 또다시 묻고 싶다. 차제에 심층적 논의에서 랜섬이 “시는 자연미의 표현이며, 상상이라는 훌륭한 기능이 시의 작인임”을 지적하였듯 꿈의 시학이라 일컬어도 과장됨이 없는 그 자신의 시적 결과물은, 비교적 푸른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다.
따라서 신선한 충동감이 묻어나는 ‘천년 하슬라(何瑟羅), 그 영광의 땅’인 강릉시 사천면의 낮은 산자락에 탯줄을 묻은 1984년『心象』데뷔 후 현재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임 중인 박용재 시인은 그간에『강릉』,『애일당 편지』,『꽃잎 강릉』,『신의 정원』을 포함한 10여 권의 시집을 개아(個我)의 차별성에 의해 출간한 경력에 비춰 근간 등단 40년을 기념하는 사행시집『그 꽃의 이름은 묻지 않았네』(서정시학, 2024)의 분할은 내면 인식의 시학과 미적 주권의 틀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꽃의 시인’으로 일컬어도 족할 식별력의 탐색에 맞물려 있다. 까닭에 ‘천상엔 별, 지상에는 꽃, 그리고 마음에는 시(詩)다.’라는 일관성은 그 자신의 시편에서 빈도수 높게 사용되는 시적 질료로 ‘조그만 꿈꾸기→따뜻한 길 위의 편지→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강릉→꽃잎 강릉→신의 정원→꽃의 이름’ 즉, 그 자신이 흥미롭게 제시한 ‘뉴트리노(neutrino) 여린 풀꽃’에도 주의 집중한 결(結) 고운 ‘4부, 총 82편’의 시적 골격은 충직한 독자의 관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단 모두(冒頭)에서 ‘세월은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로 채워가는 것’이기에, 애써「동종선근설」을 강조할 의중은 아니어도 박용재 시인과 40년 남짓 사제 간의 연을 맺어왔기에 관심과 애정을 지님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특히 동시대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그 자신이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타래 동풍」조간으로 지난 5월 5일의 ‘뮤지컬 배우 홍지민과 함께하는 토크 콘서트’에 이어 시집의 축하 시 콘서트가 6일 오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246 ‘아버지 정원’에서 각각 치러졌다. 이날 지역의 기관단체장을 비롯해 전국 유명인사들이 자리한 콘서트에서 명무名舞 김지립의 한량 춤과 소프라노 김성혜가 축하 무대의 선을 보였고, <그랬으면 좋겠네>, <심향> 외 시편이 연예인 김상중, 우승룡(강원일보 상무), 최단아 서정시학 발행인 등에 의해 낭송되고 콘서트 중 최종훈 옹에게 바치는 헌정시 <어흘리 수국나라>와 헌정곡 <헌화가>를 선보이는 공간에 감동의 박수도 잇닿았다.
또 한편 역시 사제 간의 연이 맞물린 최순일 대표의 부친 최종훈(94)옹이 박용재 시인의 시편에 깊은 감명으로 기증한 ‘시 쓰는 오두막(詩幕)’의 행사도 치러져, 필자는 최동호 한국예술원 회원과 축사를 했고, 화자인 박용재 시인은 “최종훈 옹께서 30년 남짓 가꿔온 정원에서 시를 쓸 수 있도록 집필 공간을 마련해줘 너무도 감사하다. 지역의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눌 것이며 앞으로 문학이 우리 사회에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길 바라는 심정으로 한층 더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하면서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시편에 담고 싶다.”라는 소회(所懷)를 밝혔다.
무엇보다 치밀하고 행복한 언어 집짓기에 의한 기념시집의 대표 시편인 “저녁 산책길에서 만난 들꽃 한 송이/자기를 잊지 말라며 내 발목을 잡네/몸웃음치며 유혹하는 그 마음 내칠 수 없어/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나누며 새벽을 맞네(시 그 꽃의 이름은 묻지 않았네)”를 비롯해 “이름 모를 작은 꽃잎 하나/툭하고 쓸쓸히 떨어지니/발밑 지구가 꿈틀하네(작은 꽃잎 하나)”의 일면처럼 행간을 좁혀가는 적당한 거리 두기는 시인의 자서(自序)「시집 앞에」서 호흡이 짧은 ‘절제와 비움’에 의한 대화체 어투인 “나는 누구를 만나 기쁜 거지/강릉선교장 매화꽃 같은 너를 만나서지(꽃밭에서)”에서 구도적 대응은 못내 신선한 충격이다.
이같이 그 자신의 대다수 시편은 시의 본말인 순수서정성의 확립과 생명에의 변주에서 기인(起因)된 파동의 탐색이기에, ‘인류의 정신적 스승’인 헤르만 헤세가 “작가는 독자가 아니라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그 의미심장한 시적 여백의 행간 좁히기와 느림의 시학을 검증한 과정에 해당한다. 따라서 소중한 연이 잇닿은 시인과의 조우(遭遇)는 정신기후를 따뜻하게 조성시켜 주는 행위이기에 묵언의 응시로 관망할 바다. 아울러 비록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대에서 세월을 흘려보낸 그 자신의 정신적 결과물로 “군락을 이뤄 바람에 출렁이니/저 꽃밭 속을 헤엄치고 싶네요(개망초꽃)”도 그렇거니와 “산산한 산정山頂에서 눈 밝히며/오두막 같은 집을 짓고 사는구나(산꽃다지)”에서 ‘꽃의 언어기표’로 분망한 삶의 일상에서 체득한 ‘대상의 개념 및 시 의미의 확장, 그리고 생명 경외의 엄숙성’이 연계 층위로 처리된 ‘오두막 같은 집’이 ‘시막’으로의 자리매김 또한 짐짓 우연일 수 없다.
2. 매혹적 형사와 담백한 시격(詩格)
또 한편 그 자신의 시편은 상상과 추상에 의한 내적 인식으로 푸른 생명의 언어로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고 또 독자적인 눈부신 시어의 당근 질은 갈증에 탄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는 생명 외경의 현상으로 확대되어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까닭에 사행시집을「꽃의 우주, 우주의 꽃」으로 전제한 경희대 교수 홍용희 평론가가 “박용재의 시 세계는 꽃들이 살고 사랑하고 춤추는 화원이다. 4행의 정제된 형식에 제각기 다른 꽃들의 생기, 표정, 움직임 등이 내밀하게 자기 조직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화원에서는 시적 자아 역시 꽃이다. “아침 꽃밭 내가 나팔꽃으로 피어 웃네(하루)”라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꽃의 시선으로 꽃의 세계에 말을 걸고, 듣고, 생각하고, 향유하고, 의지한다.”라는 그 담백한 해설은 따뜻한 감성과 지극히 다감한 분위기(情調)가 명백히 감지될 따름이다.
특히 “별의 눈으로 보아도 너는 꽃이고/바람의 손으로 느껴도 너는 꽃이고(동백꽃)”에서 비교적 붉은 동백의 꽃말이 ‘열정, 애타는 사랑,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한다.’와 같이 황홀함에 취한 현기증이랄까? 그 어지럼증은『푸른 꽃』의 저자로 독일 낭만파의 대표작가인 노발리스가 “철학이란 본래 향수요, 고향을 만들려는 하나의 충동이다.”라는 역설처럼 인간은 맑은 영혼의 존재이기에 “돋보이게 하는 가는細 소금 같은 꽃잎/그 마음이면 더 이상 바랄 게 있더냐?(안개꽃)”의 물음 앞에서 즉물적 대상은 끝내 “그래서 이름 있는 것보다/이름 없는 것이 더 평화롭지요(그냥 꽃이면 되는 거지요)”의 일면에서 일체의 시 의식은 또 다른 체념에 해당한다.
차제에 매몰차고 우울한 우리네 일상에서 신이 허락한 존재임을 확증하기 위하여 틈틈이 창의적 부산물로 형상화한 시편은, 유추컨대 2024년 생명의 봄날에도 ‘절제와 비움으로’ 빚어졌기에 시를 읽는 독자의 기쁨이며, 또 하나의 행운이다. 따라서 생의 황혼에 그 어스름을 응시하며 낮은 산자락을 보행하며, 행복한 꽃나무 가꾸기와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으로 해명되는 그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인연의 매듭을 풀어내는 일면은 비장감이 묻어있다. 모처럼 ‘부자父子 간의 정성으로 조성한 아버지 정원庭園’을 다녀와서 담담히 읊조린 시편 “수국水菊 나무 사이로/아버지 손길이 분주하다//신이 다녀간 것처럼/그 손길이 고운 꽃을 피우니(어흘리 수국나라-최종훈 옹께)”의 보기나 “젖은 숨 내쉬니/온 언덕에 봄꽃 만발하고(숨-최순일에게)”의 예시를 통해 비교적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에 지상의 유일한 하늘의 언어인 ‘감사(感謝)’가 새삼 묻어남은 한순간 충만한 생명감으로 삶의 환희다.
모름지기 인간 심리의 잠재적 가능성의 결과로 원형관점에서 사행시집의 파격(破格)으로 호흡이 짧고 시상을 응축시켜 2행으로 처리한 “죽음 또한/한 인연이지요(죽은 풀꽃이 산 풀꽃에게)”의 양식이나 “죽음 같은 건 슬퍼 않는다네/다만 당신을 만나기 위해(붓꽃과의 대화 1)”나 “시들어 죽는 것은 슬퍼 않는다네/다만 당신이 나를 만나기 위해(붓꽃과의 대화 2)”에서 입증되듯 ‘죽음’의 이미지는 모태 의식인 ‘어머니의 대지’로, 무의식이 지배하는 깊음의 공간은 창조의 질서가 마련된 처소이다. 짐짓 에드워드 호퍼가 시선이 닿은 무미건조한 사각형에 익숙한 현대도시 위로 햇빛이 쏟아지는 ‘유리창 너머에 앉아’ 숙고할 과제와 동일화의 시편이랄까? “내 사랑하는 들꽃과 풀벌레와 작은 행성에라도 도착해/요 녀석들 다시 살게 할 수 있다면/나는 영원히 잠들어도 소원이 없겠네(나와 들꽃과 풀벌레)”에서 ‘나와 들꽃과 풀벌레’를 삼각대위(三角代位)로 결부시켜 그 자신이 ‘신神은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롭게 하는 사물의 기운과 신성한 에너지’로 개념화한 형상은 특이하다. 이처럼 꽃말이 '열정적인 사랑'인 ‘능소화나무에 고독이 덩그마니 앉아 있는’ 현상에서 “거미줄에 걸려 죽어있는 여치 녀석 너무 안쓰러 능소화 꽃잎 내 눈물처럼 흐르륵 떨어지네(꽃잎눈물)”를 통해 박용재 시인이 지극선(至極善)의 수행자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임은 <꽃잎눈물>에서 이처럼 확증될 것이나 능소화는 쌍떡잎식물로 일명 금등화(金藤花)로도 불리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또 한편 그 자신이 “가을 산책길에서 만남 풀꽃에게 물었다/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냐?(풀꽃의 거처)”의 보기에서나 또 보헤미아 출신으로 후기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를 떠올리며 “그대 호숫가 오두막에 놀러온 새들이/대지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다지에토!(오두막-구스타프 말러를 들으며)”를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혼잡한 질서를 뚫고 피어나는 노래’ 강인한 생명력을 이처럼 깨달음의 미학으로 변주시킨 정신작업은 깨끗하고 투명한 순수서정성의 미감에 의해 시인의 존재감은 못내 극명하다. 까닭에 “동안거 끝난 부처님 미소는 읽고 가야/꽃을 만나도 그 꽃피는 뜻을 알 것이라 하네(해질 무렵)”에서 ‘너에게도 입이 있어 그 꽃피는 뜻을 알 것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삶의 공간에서 접하는 대상물과 자신의 관계성을 최선의 드러남으로 그 존재감은, 생명감의 엄숙성으로 그 차별성을 묵언으로 응시할 점이다.
3. 날(刃) 푸른 존재감과 역사적 소임
보편적으로 시작과정에서 지난 2015년 이하 시인이 일본의 하이쿠(俳句)에 비견되는 짧은 시 장르를 ‘한국의 8음보 이하의 짧은 자유 시형’으로 정의하고 새롭게 개척한 조각보 시집『하늘도 그늘이 필요해』(한올)를 출간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같은 점에서 평자 나름으로「이중구조의 시적 감응과 서정적 개아(個我)-이하 시인의 시적 행간의 틈새 좁히기와 순환」으로 결부 짓고 순수서정성이 ‘어둠의 그늘이나 불순한 대상도 정화를 시킴’을 총체적으로 지적한 점에서 박용재 시인의 사행 시편 역시 시 맛(詩味)이 가일층 매혹적이고 충격적임은 못내 이채롭다. 이같이 그 자신의 처연한 삶의 지문(指紋)에 해당하는 시적 기법은 멕시코의 문인으로 외교관 신분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Rozano)의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 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러운 중력의 법칙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라는 주장처럼 바람의 초상에 견주어 언어의 응결체가 시적 상상력을 작동시켜 현대시의 이중구조를 적절히 처리한 동질성의 일례다.
모름지기 바람의 통로와 생명 기표의 교신이라는 양상에서 창조하는 영혼은 아름답고 위대하기에 가슴 따뜻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소외와 갈등으로 인해 마음의 깊은 상처(trauma)로 좌절한 타자에게 힘겨운 삶의 일상에서도 꿈과 비전을 주지시켜야 한다. 까닭에 그 자신의 시편 <냉이꽃 한 쌍>에서 “저 작은 풀꽃의 눈동자가 어찌 그리 맑은지/신들도 눈물이 날 지경이겠지요”라는 시적 동기부여에서 ‘종탑 높은 성당의 종소리 울려 퍼지자’ 놀랍게도 포괄적인 개념에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완전성을 구현하는‘ 까닭에 마침내 “한줄기 드리지 못한 인생으로 살다가/신의 곁으로 돌아간다면/저 작은 풀꽃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저 작은 풀꽃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에서 스스럼없이 분별하는 그 자신의 행보와 삶의 여적은 종종 경건함을 지니기에, ‘삶의 꽃잎’을 헤아려 귀 기울이는 잠언은 못내 신선한 충동이다. 그렇다. 그 자신이 시대적 소임을 충직하게 지켜내며, 날(刃) 푸른 존재감으로 서정의 일상과 감성적 교감을 합일하여 적확하게 통신하는 행위는 또 하루의 삶을 그렇게 빛나게 할 것이다. 또 한편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깊은 고뇌의 시간을 보낼 일이기에 “제가 꽃을 피운 동안 만이라도/안타까이 생을 마감하는 것들이/며칠만이라도 서러움 같은 거 잊고/마냥 웃으면 그랬으면 좋겠어요(어느 봄날 산수유나무가 말했다)”의 보기에서 그 자신이 맺힌 한(恨)을 나직이 토해내지 않아도 멋스러운 평화주의자임은 명쾌히 확인될 것이다.
무엇보다 따뜻한 일상의 서정적 자아로 한 폭의 무채색 수채화는 정신풍경화로 클로즈업되기에 “어둔 생의 길을 가는 너에게/별들이 조금이라도 더 밝게/네가 가는 길을 비출 수 있도록/나를 흔들어 하늘을 닦는다(나를 흔들어 하늘을 닦는다)”의 일면처럼 사행시집의 말미를 장식하는 시편에서 확증되듯 ‘더불어 함께(inter-being)라는 공동체 인식의 소중함’을 나를 통해 매듭을 짓는 시적인 모티프야말로 열린 우주로의 지평을 열어 보인 합일의 처소로 ‘하늘의 의미는 천(天)과 공(空)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처리 또한 ‘새로운 감동의 느낌표(!)’로 장식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인 그 오브제(objet)의 수용성에 맞물림이다.
결론적으로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사회현상에서 잇닿은 미래를 항상 준비하되 충만한 생명감과 실험정신으로 매사에 대처하는 박용재 시인에 거는 절대적 기대감은, 시대적 소임을 확장하여 수행하되 끊임없이 소외된 타자를 사랑하되 깊은 상처로 고통받는 이웃을 치유하는 분별력의 경계심이다. 모쪼록 한국 시문학사의 빛나는 진정한 개아(個我)로서 당당한 존재감으로 감동의 회복과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은 물론이고 문화의 융복합을 매개로 시 의식의 지평을 열어갈 것을 거듭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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