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읽다보면 때때로 부처님과 제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인 모습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분들이 현실에서 어떤 갈등을 겪었으며, 그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전후 사정을 짐작하게 되면, 지금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보는 것과 같은 감동이 일어납니다. 구름이 걷히며 달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 지금까지 관념적으로 혹은 막연하게 알고 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서 다가오는 기쁨을 누립니다. 경전 중에서도 특히 초기경전을 읽는 보람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증일아함경 제40권 <구중생거품>이 그 한 예입니다. 부처님이 왕사성 가란다숲 승원에 있었을 때입니다. 한 비구가 병이 심해 누운 채로 대소변을 보면서 저 혼자서는 잘 일어나지도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곁에서 돌봐주는 비구도 없었습니다. 당시 숲에서 4, 5킬로미터 떨어진 동네로 가서 탁발을 해야 먹을 수 있었던 출가자로서는 여러 날을 굶주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밤낮으로 부처님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소문을 들은 부처님은 직접 그 비구를 찾았습니다. 비구의 안부를 물은 뒤, 부처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지난 날 병들기 전에 병자들을 찾아가 문병한 일이 있는가?"
“병자들을 찾아가 문병한 적이 없습니다."
지혜와 자비를 가르치는 당신의 교단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상황을 짐작한 부처님은 손수 그 비구를 간호하셨는데, 경전에 나오는 표현이 하도 사실적이라, 읽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부처님은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그대는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직접 그대를 공양하며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
그 때 세존께서 손수 더러운 것들을 치우고 다시 좌구를 까셨다. 손수 비를 들고 더러운 오물을 치우고 다시 자리를 깔아 주셨다. 또 그의 옷을 빨고 병든 비구를 부축해 앉히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시켰다. 그 비구를 목욕시킨 뒤에 평상 위에 앉히고 손수 밥을 먹여주셨다. 부처님은 밥을 다 먹은 비구에게 12연기법을 가르치셨다.
- 증일아함경 제40권 <구중생거품> (일부 요약) 동국역경원
12연기는 초기불교의 가장 중요한 법문중의 하나입니다. 12연기법은 감각적 쾌락이나 소유에 집착하면 마침내 생로병사에 묶이고 우울 슬픔 고통 번뇌(憂悲苦惱)의 괴로움에 떨어지는, 욕망과 집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연기법은 탐욕과 분노로 자기와 남에게 고통을 준 일을 진지하게 참회하는 사람에게 해탈의 길을 열어줍니다. 병든 비구를 찾은 다음, 부처님은 대중을 불러 모아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출가한 자로서 같은 스승 아래 물과 우유처럼 서로 화합한 자들이다. 그런데도 서로를 보살피지 않는구나. 지금부터는 부디 서로 보살피도록 하라. 병자를 돌보는 것은 나를 돌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처님은 아들을 잃고 머리를 산발한 채 떠돌아 다니는 여인에게도 슬픔을 넘어서는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여러 해를 굶주림으로 떠돌아 다녔고, 사람들이 외면할 정도로 겉모습이 초라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지고, 마음이 혼란하여, 알몸으로 머리를 산발한 채,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쓰레기 더미와 공동묘지, 그리고 큰 길에서 3 년 동안 굶주림과 갈증으로 떠돌아 다녔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을 길들이는 사람, 깨달은 분, 아무 두려움도 없는 훌륭한 나그네(부처님)께서 미틸라 시에 오신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을 다시 다잡고 그 분에게 예배를 올리고는, 저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비로움을 베푸시며 고따마(부처님)께서는 저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진리를 듣고서는 저는 집 없는 삶(출가의 길)으로 나아갔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내 자신을 닦아서, 나는 행복한 경지를 실현했습니다. 모든 슬픔은 끊어지고 사라져, 이로써 끝냈습니다. 나는 슬픔이 일어나는 뿌리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 테리가타(장로니게 경) 바싯티 비구니 편, 133 - 137번 구절. KR Norman PTS 1995> (민족사 역 참조)
바싯티 비구니에게 부처님이 무슨 가르침을 주었는지 위 경전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초기경전 속에서 가장 이 주제에 가까운 법문을 찾아 보면 다음 구절입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어떤 다른 자의 것이다.’하는 생각이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나에게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 숫타니파타(전재성 역)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 17번 게송
테리가타(장로니게 경)에는 또 다른 한 비구니가 어떻게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는지 자기의 고백을 싣고 있습니다. 웃비리 비구니는 출가 전에 사랑하는 딸 지바를 잃었습니다. 그녀는 화장터를 떠나지 못하고 숲속에서 혼자 울다가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바야!'라고 외치며 숲 속에서 울고 있구나. 웃비리여, 그대 자신을 알라. 똑같이 지바라는 이름을 가진 8만4천이나 되는 딸들이 이 화장터의 불 속에서 화장되었건만, 그 중에 누구를 그대는 서러워 하고 있는가?"
웃비리가 부처님에게 말씀드렸다.
“참으로 부처님은 제 가슴 깊이 박혀, 잘 보이지 않는 화살을 뽑아 주셨습니다. 딸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는 저에게 슬픔을 없애 주셨습니다. 지금 저는 화살을 뽑아 냈습니다. 저는 굶주림(갈애)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었습니다. 저는 부처님과 법과 승단에 귀의 합니다."
- 테리가타(장로니게 경) 웃비리 비구니편 KR Norman PTS 1995> (민족사 역 참조)
경전 속에 나오는 부처님을 보면 남녀를 차별하거나 위계질서를 따지는 권위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스승의 삶을 본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을 이렇게 알리고 다녔습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여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은 항복하지 않는 이를 항복 받으시고, 건너지 못한 이를 건네주시며, 해탈하지 못한 이를 해탈하도록 길을 알려 주시고,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사람을 보살펴 주시며, 장님에게는 눈이 되어 주십니다."
- 증일아함경 제13권 24 <고당품>
부처님의 삶을 보고,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참으로 민망합니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속에 기복적 종교행위가 만연하며, 현실의 삶을 외면한 자기도취적 수행이 큰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또한 세속의 한계를 밝히고 그 어두운 상처를 치유해야할 수행자들이, 비록 일부이지만, 속세에서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불교를 떠나겠다고 폭탄 선언한 미국인 현각스님은 한국불교의 모순을 기복위주의 종교생활, 유교적 위계질서, 남녀·국적 차별과 도덕적 타락 등을 들었습니다.
병든 이웃을 찾아간 적이 있느냐고 묻는 부처님의 물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천둥 같은 경책입니다. 우리 역시 위선과 오만의 현실을 지탱하는 무명(無明)의 한 부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돌림을 당하는 병든 비구를 찾아가 소수 밥을 먹여주시고 연기법을 설해주신 부처님, 자식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거지여인에게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우쳐주신 부처님,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한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을 생각할수록,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운 한 진실한 수행자를 스승으로 따르는 기쁨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여운 2016.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