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김오랑중령 추도식■
《서울》
●일시 : 2018.12.08(토)10:00
●장소 : 국립서울현충원
《김해》
●일시 : 2018.12.12(수)10:00
●장소 : 김오랑중령 흉상앞
●주최 : 김해 활천동청년회
제가 김오랑 중령기념사업회
회원인데 그동안은 바쁘다고
몇년 참석 못했는데
이번은 오랜만에
서울 추도식에라도
잠시 참석하려 합니다.
故 김오랑 중령 (1944~1979)
경상남도 김해군 태생.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25기)
1969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박근혜때 국정원장이던
남재준이
그와 육군사관학교 동기.
(하지만 남재준은
이명박근혜 시기 해마다 오는
12.12추모때 한번도
얼굴 안비추었죠)
그의 첫 병과는 보병이었다.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파병을 다녀온 후
1974년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맡음으로써
특전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여러 보직을 거치며
44개월 동안 특전사에
몸담았다가 육군대학과정에
입교한 뒤,
육군대학 졸업 후
특전사로 원대복귀했다.
사실 장교들이 특전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육군대학을
마치면 통상 후방 지역에서
본인이 원하는 편한
보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특전사로
복귀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심각한
시력장애를 앓았기 때문에
그나마 치료가 용이한
수도권에 계속 머물고자
했던 것이다.
특전사 복귀 후
제5공수특전여단
부대대장으로 발령
받았으나 불과 한달
만인 1979년 3월에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차출되었다.
12.12 군사반란의 성패는
수경사(현 수방사)와
특전사를 조기에 제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당시 수도권에 주둔했던
부대 중에서 쿠데타에
대처 가능한 부대는
수경사와 특전사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전두환 국군
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제3공수특전여단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를 담당한다.
12월 13일 저녁 하나회
소속이자 제3공수
특전여단장인
최세창 준장이
특전사령관실을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정병주 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최세창 준장이 돌아간지
10여 분 뒤 제3공수특전여단
제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체포조가 특전사령관실로
진입했는데,
이는 특전사령관이
근무하는 사령부
건물이 바로
3공수특전여단의
영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오랑 소령만이
정병주 장군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장교들, 심지어
자신이 모시는
장군과 제독을 목숨바쳐
지켜야 할
전속부관이 포함된
대부분의 장교들이
신군부 측에 회유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오랑 소령에게도
신군부 측의 회유가
들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김오랑 소령은
이를 거절하고 상관을
호위하기로
결심하였다.
체포조가 투입될 당시
김오랑 소령이 가진
무기는 8발이 들어있는
권총 한 자루에 불과했다.
결국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에게 6발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했다.
시신은 암매장되었으나
동료 장교들의 항의로
3개월 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김오랑의 부인인
백영옥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 실명했다.
체포조를 지휘했던
박종규 중령과
김오랑 소령은
가까운 선후배라서
충격은 더했다.
두 사람은 쿠데타가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에도
부부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훗날 백영옥이
박종규에게 전화로
왜 그랬냐고 원망하듯
따지자.
박종규 중령은
"난 군인이니까
명령대로 한거요!"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백영옥이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
라며 일갈하자
반론하지 못하고
끊어버렸다고 한다.
1986년 한 여성지에서
백영옥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매달 30만원씩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오랑-백영옥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백영옥의 건강문제로
인해,
자녀 계획 자체를
미루고 있었기 때문.
백영옥은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으며,
1991년 6월에 추락사했다.
당시에는 자살로 수사가
마무리되었으나
백영옥의 지인들은
고인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남편의 명예회복에 의지를
불태우던 상황에서
갑자기 자살할 리
없었다는 것.
또한. 백영옥이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였건만,
괴상망측한 까닭에
걸려서 남편과 합장되지
못했다.
결국 따로 묻혔다는 얘기다.
김오랑을 향해 총을 쏜 일당을
지휘한 박종규 중령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소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지만
결국 천벌을 받아서
2010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김오랑 소령은
1990년 가까스로
중령으로 1계급
특진 추서됩니다.
2013년 4월 22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고(故)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과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법',
군사반란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안 2건을 심의 및
의결하면서 추모사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군 출신
국회의원들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고 김오랑 중령에게
"무공" 훈장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와 추모비를
육군사관학교 내에 세우는
안에 대한 호오가 갈렸다.
당시 국방장관인 김관진이
(김관진 이새끼는 이것만
봐도 알만함)
"대법원 판결은 존중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고,
결국 무공훈장 대신
보국훈장으로 수정하여
통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1월14일,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반란군에 맞서 싸운게 전투가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이댄거죠.
문재인 대통령께서 이번
G20 참석차 방문한
아르헨티나에서
아르헨티나 독재시절
희생자들 유족회인
5월 어머니회와 만난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더러운 전쟁(1976~1983)
당시 군사독재자들을
잡아들여 감방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어제도 전두환집
앞에 경찰이 진을 치고
KAL 858 유족들의 접근을
막았죠.
군사반란 수괴새끼를
경찰이 경호해주는
해괴한 현실입니다.
역사 바로세우기중
해야 할 일에는 친일매국노
발굴도 있고 많고 많지만
우선
대부분 현재 살아있는
전두환 일당등 군사 반란자들을
처단하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아르헨티나도 이미 한 것을 왜
우리는 못합니까?
참고로 보국훈장 설명해드립니다.
☞보국훈장은 총 5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위에서부터 보국훈장 통일장-
국선장-천수장-삼일장-광복장.
문제는 이게 서훈자가
국가에 바친 공헌도와
전혀 상관이 없다.
가장 높은 통일장은 대장,
두번째 국선장은 중장,
세번째 천수장은
소장과 준장 및 군무원 1급,
네번째 삼일장은 영관급과
군무원 2~4급,
가장 낮은 광복장은
위관급 장교와 병, 부사관들이
받는 식으로 공헌과
상관없이 단순히 계급에
따라 등급이 미리 정해져 있다.
김 중령이 삼일장인 이유는
고인의 공헌과 상관없이
그저 계급이 중령이라서다.☜
즉 반란군에. 목숨걸고
맞서 싸운
김오랑 중령에게
2014년에야 그냥
영관급 장교가
전투외에 국가안보에
공헌을 세웠을때
주는 훈장만 수여한 것입니다.
☞부산광역시와 경남 양산시
경계 지점에 위치한
부산 영락공원 구 납골당.
지금도 안치 돼 있는지
확인이 안되지만 당시
이곳에는 한 여인의
유골이 안치돼 있었다.
‘이름 백영옥(여),
1948년생,
1991년 6월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사망.’
김오랑 중령의 아내인
백 씨는 1979년 12월 15일
남편이 13일 새벽에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일주일 내내
눈물로 지새우다가
실명(失明)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가 1991년 부산
영도의 한 허름한 주택가
난간에서 발을 헛디뎌
실족사한 것으로 돼 있다.
그녀의 사망에 대해
타살 의혹이 제기됐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납골당 관리인 이명우 씨는
"무연고 납골당 철문은
설과 추석에만 연다"고 밝혔다.
이 때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씨는 "백영옥의 유골은
연고자가 없어 조만간
정리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장사법에 따라 10년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납골이 자동 폐기된다.
따라서 백 씨도 장사법에 의거,
납골이 폐기될 것 같다는 것이
이 씨의 설명이다.
아마도 유골도 사라졌을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 여인의 죽음은 저승에서도
자리를 잡지고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김중령 추모사업회
(당시는 기념사업회가 아니었죠
저도 자세히는 몰랐을때니)에
올라왔던 백영옥 부인의
무연고 묘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글 올라온것이
2012년쯤이니
지금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었을겁니다.ㅠㅠ
동영상[한겨레포커스] 육성 증언: 신군부에 맞선 군인, 김오랑 중령12.12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34년 전의 상처를 www.youtube.com
△2013년 한겨레 포커스
신군부에 맞선 군인 김오랑 중령.
(보국훈장 추서되기 1년전 영상입니다.
김오랑 중령과 그 가족들이 얼마나
핍박의 세월을 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육군대학 수료때 김오랑 당시 소령.
맨앞줄. 앉아있는 사람중 두번째.
그 옆 첫번째는 박근혜때 상반기
국회의장 역임한 하나회 출신 강창희 .

△김오랑 중령( 맨 왼쪽 베레모가 아닌
군모를 쓰고 앉아있는 이)
동영상제 5공화국 김오랑 중령 www.youtube.com
△MBC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김오랑 중령과 정병주 특전 사령관.
첫댓글 지금이라도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만이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주저없이 목숨을 바치는 군인이 나타날 것입니다.
맞습니다. 국가에 대한 희생은
백척간두에 서 있는 나라에서
애국만 강요해서는 결국 나올수 없죠.
나라가 위태로울때 희생된 이런 분들을
제대로 추도하고 보상해어야 김태하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주저없이
목숨 바치는 군인. 시민들이 나오겠지요.
미국이 욕먹을 짓도 많이 하지만
해외 어디에 있는 유해도 다시 찾아온다는 미국의 정책
(지금도 베트남.한국. 2차대전 유골까지
)에 미국인들은 언제인가는 자신을 국가에서 찾아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이죠. 욕을 먹을 짓도 많이
하는 미국이지만 이 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하죠.
또 비록 그 나라 경제가 안좋다해도 아르헨티나의
역사바로세우기도 우리가 본받아야하구요.
이 영화 이미 보셨을거 같지만
혹시 안보셨다면 추천드립니다.
챈스일병의 귀환(Taking chance)
입니다.
https://youtu.be/O8YoFqDTvlg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