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뿐인 놈
이계양(광주푸른꿈창작학교 교장, 품자주자시민들 공동대표)
필자는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며, 남의 아픔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민주시민’이요 공동체 의식이라 보기 때문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곁’은 ‘어떤 대상의 옆 또는 공간적ㆍ심리적으로 가까운 데’ 혹은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거나 도와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생한 ‘곁을 주다’는 말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가까이할 수 있도록 속을 터 주다’라는 의미다. 곁에 있다. 곁을 지키다. 곁이 되다. 곁을 내어주다 등에서 그 의미망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와 반대로 ‘곁이 비다’는 ‘가까이에서 지켜주거나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근래 들어 곁이 비어있는 사람이 점점 많아짐을 목도하고 있다. 고독사가 그것이다. 고독사란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죽는 것 즉 곁에 사람이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말한다. 2023년 보건복지부의 통계를 보면 성별 미상자(29명)를 제외한 고독사 사망자 3,632명 중 남성은 84.1%(3,053명), 여성은 15.9%(579명)로 남성이 여성보다 5배 이상 많았다. 연령대별론 60대(1,146명)가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50대(1,097명), 40대(502명), 70대(470명) 순으로 50·60대 남성이 고독사 위험에 특히 취약했다(53.9%)고 복지부는 분석했다.
곁을 주거나 곁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생명력 있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얘기가 있다. 티벳의 성자라 일컬어지는 썬다 싱(S Singh·1889∼1929)의 실제 이야기다.
썬다는 만 서른 살이 되는 1919년 7월 초에 열 번째로 티벳에 들어갔다. 9월 말이 되자 큰 눈이 내리고 길이 얼어 전도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어느 날 썬다는 랑케트 쪽으로 가는 중에 티벳인 한 사람을 만나 눈보라 속에서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동행하게 되었다. 사력을 다해 걷는 중에 쓰러져 손도 발도 다 얼어가는 채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다행히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썬다는 동행인에게 “이 사람을 이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이니 구조하여 업고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동행인은 “그러다간 우리도 같이 얼어 죽소. 나는 살아야겠소” 하면서 혼자 가버렸다. 약한 몸의 썬다는 차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얼어 죽어가는 그를 등에 업었다. 눈보라치는 산길을 걷고 고개를 넘으며 몇 번이나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 사투한 끝에 겨우 고갯마루에 거의 다다랐다. 그때 그의 눈에 또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이미 얼어 죽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바로 얼마 전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가 버린 동행인 그 사람이었다. 썬다와 등에 업힌 사람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서로의 온기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혼자만 살겠다고 앞서가던 동행인은 혼자만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썬다는 목숨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의식을 회복한 등에 업힌 사람과 동행하여 랑게트로 향했다.
얼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등을 내밀어 곁을 준 썬다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을 뿐 아니라 자기 생명도 살렸다. 그러나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길을 떠난 사람은 곁이 비어 얼어 죽고 말았다. 결국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은 곁이 비어 죽게 되고, 곁을 내어주면 누군가를 살리고 자기 자신도 살게 된다는 명징한 얘기다.
현대는 초연결망 사회이면서도 곁을 내어주지 않음으로 고립, 소외된 개인으로 존재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떤 이유로건 평생 곁을 내어주지 않은 많은 아버지들 특히 5,60대 남성들이 곁이 빈 채로 고독사하는 통계가 슬프고 안타깝다. 어디 이뿐이랴. 섬세한 곁이 필요한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곁을 주지 않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 그리고 늙은 부모님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아들딸들은 얼마인가. 정부와 병원의 곁을 주지 않는 관료와 의료진들 사이에서 죽어가는 환자는 얼마인지. 요양원에서 휠체어에 묶인 채 곁을 주지 않는 가족과 직원들의 틈새에서 가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노인들은 그 얼마인지. 사업주의 착취 구조 속에서 시름시름 목숨이 사위어가는 곁이 빈 노동자들은 얼마인지. 권력과 돈과 지위의 횡포 속에서 누군가의 곁을 기다리다가 촛불 연기처럼 사라지는 소시민들은 또 얼마인지.
없는 자, 약한 자들도 곁을 내어주는 마음이 필요하지만 가진 자, 강한 자들이 곁을 내어주는 일이 더 쉽고 절실하게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어느 신문 칼럼에서 봤던 낱말이 생각난다. ‘나쁜 놈’의 어원이 ‘나뿐인 놈’이라는.
광주매일신문 2024.11.4.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