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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재 시집 평설/시인정신>
꽃의 시학과 매혹적(魅惑的) 형상화
- 박용재 시인의 길 찾기와 정신풍경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월간「모던포엠」주간)
1. 감동의 느낌표와 서정성의 회귀
모름지기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 문제로 갈등과 대립으로 치달아 밝은 미래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간대에서 그 나름으로 패배와 불안감을 씻어버리고 역풍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 삶의 동일화에서 개별성을 구축한 특정한 시인의 시집 평설에서 따뜻한 일상의 안부를 또다시 묻고 싶다. 차제에 심층적 논의에 있어 미국의 비평가이며 시인인 랜섬(John Crowe Ransom)이 “시는 자연미의 표현이며, 상상이라는 훌륭한 기능이 시의 작임(作因)임”을 지적하였듯 꿈의 시학이라 일컬어도 거부감이 없는 박용재 시인의 정신적 결과물은 비교적 푸른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戰慄) 같은 가슴 떨림에 맞물려 있다.
까닭에 신선한 충동감이 묻어나는 ‘천년 하슬라(何瑟羅)의 땅’인 강릉시 사천면의 낮은 산자락에 탯줄을 묻은 1984년『心象』데뷔 후, 현재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그간에 메르헨의 꿈과 향토성이 물씬 묻어나는『강릉 꽃잎』,『애일당 편지』를 비롯하여 10여 권의 시집을 개아(個我)의 차별성으로 빚어 출간한 경력에 비춰 5월 초순, 등단 40년을 기념하는 사행시집『그 꽃의 이름은 묻지 않았네』(서정시학, 2024)의 분할과 통합은 내면 인식의 시학과 미적 주권의 틀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꽃의 시인’으로 일컬어도 지나치지 아니하다.
어디까지나 ‘천상엔 별, 지상에는 꽃, 그리고 마음에는 시(詩)’라는 일관성은 그 자신의 시편에서 빈도수 높게 사용되는 시적 질료로 모처럼 그 자신이 흥미롭게 제시한 ‘뉴트리노(neutrino) 여린 풀꽃’에도 주의 집중한 결(結) 고운 ‘4부, 총 82편’의 시적 틀 짜기는 충직한 독자의 관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단 모두(冒頭)에서 ‘세월은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로 채워가는 것’이기에, 애써「동종선근설」을 강조할 의중은 아니어도 박용재 시인과 40년 남짓 사제 간의 연을 맺어왔기에 관심과 애정을 지님은 당연한 처사다.
무엇보다 치밀하고 행복한 언어 집짓기에 의한 기념시집의 대표 시편인 “저녁 산책길에서 만난 들꽃 한 송이/자기를 잊지 말라며 내 발목을 잡네/몸웃음치며 유혹하는 그 마음 내칠 수 없어/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나누며 새벽을 맞네(시 그 꽃의 이름은 묻지 않았네)”의 일면처럼 행간을 좁혀가는 적당한 거리 두기는 시인의 자서(自序)「시집 앞에」서 호흡이 짧은 ‘절제와 비움’에 의한 대화체 어투인 “나는 누구를 만나 기쁜 거지/강릉선교장 매화꽃 같은 너를 만나서지(꽃밭에서)”에서 구도적 대응은 못내 신선한 충격이다.
또 한편 그 자신의 대다수 시편은 시의 본말인 순수서정성의 확립과 생명에의 변주에서 기인(起因)된 파동의 탐색이기에, ‘인류의 정신적 스승’인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가 “작가는 독자가 아니라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그 의미심장한 지적은, 시적 여백의 좁히기와 느림의 시학을 검증한 결과의 합일이다. 따라서 소중한 연이 잇닿은 시인과의 조우(遭遇)는 정신기후를 따뜻하게 조성시켜 주는 행위이기에 묵언의 응시로 관망할 바다. 아울러 비록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대에서 세월을 흘려보낸 그 자신의 정신적 결과물로 “군락을 이뤄 바람에 출렁이니/저 꽃밭 속을 헤엄치고 싶네요(개망초꽃)”도 그렇거니와 “산산한 산정山頂에서 눈 밝히며/오두막 같은 집을 짓고 사는구나(산꽃다지)”에서 ‘꽃의 언어기표’로 분망한 삶의 일상에서 체득한 ‘대상의 개념 및 시 의미의 확장, 그리고 생명 경외의 엄숙성’이 연계 층위로 처리된 ‘오두막’이 ‘시막(詩幕)’으로의 자리매김은 이채롭다. 비록 시격(詩格)이 더없이 담백하여 따뜻한 감성마저 경건한 시인에게 이처럼 한 편의 시는 마치 ‘꽃은 비에 젖어도 꽃의 향기는 비에 젖지 아니하듯’ 동시대를 살아가는 충직한 독자에게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켜줄 것은 물론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려는 그 자신의 시 짓기(詩作) 또한 본질적 의미를 확장할 것이라는 믿음이 주어지기에 그 존재감은 자명하여 못내 현기증이다.
2. 서정성의 양감(量感)과 시적 담론
차제에 「서정성의 양감과 시적 담론」에서 지극히 선한 심성과 담백한 품격으로, 그 자신이 시적 이미지를 엄격히 통제하고 즉물적 현상을 적확하게 풀어 보인 합리성, 그 모순에 대한 감수성에 예민하게 반응한 그 자신이 행간의 틈새를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시의 틀 짜기에 우리가 접하는 세계와 물상은 일정한 패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지향한 파상(波狀)으로 인식할 일이다. 모름지기 한 편의 시는 내면의식의 증상이기에 ‘미학의 발전을 역사 진화와 진리추구의 중요 인자(因子)’로 역설한 아도르노(T.W.Adorno)가 비록 서정시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대조적으로 양적 진화의 측면에서 꽃을 중심 테제로 삼아 그 자신이 순수서정의 시편을 펼쳐 보임에 시의 모태인 서정시가 건재함은 지극히 다행스럽다. 또 한편 전통적으로 서정성은 심층의 내부에서 공명된 삶의 비의(秘意)를 응축해 왔기에 서정성의 소외감을 떠올리는 한순간, 시적 작위(作爲)가 연민의 대상이 됨은 지극히 유념할 바다.
그렇다. 푸른 바다와 낮은 산자락이 잇닿은 사천(沙川)의 바닷길을 거닐며 저토록 생명의 봄날에 ‘천상의 달(月)을 배경으로 하여 종종 지상에 헌화가(獻花歌)와 이름 모를 풀꽃을 피워내는 그 자신의 개아적(個我的)인 시적 묘미’는 응당 충직한 독자라면 황홀감에 취(醉)할밖에 없다. 이처럼 생명감이 가득 밀려오는 바다와 달을 원경으로 배치하여 풀꽃의 미세한 움직임도 치밀하게 통합시킨 시적 형사(形似)의 일관성이야말로 ‘꽃의 시인으로 일컬어도 거부감이 주어지지 않는’ 박용재 시인만의 시적 역량이며 매혹적(魅惑的) 당위성이다.
까닭에 그 자신의 정신적 창조물인 시집『애일당 편지』,『꽃잎 강릉』,『신의 정원』에 이어 꽃의 계절에 모처럼 출간한 시첩(詩帖)을 펼쳐 들면 “저기 저문 들판에/이름 모를 작은 꽃잎 하나/툭하고 쓸쓸히 떨어지니/발밑 지구가 꿈틀하네(작은 꽃잎 하나)”에 끝내 눈물방울이 떨어질 것이다. 차제에 1984년『心象』등단 이후 끊임없이 40년 ‘시의 집’을 짓는 그 자신의 해명은 합리적이다. 그간에 오진현의 탈관념 시학인 ‘꽃의 문답법’이나 정용진의 ‘꽃의 시학’, 그리고 김동원의 ‘꽃의 시학(봄)’에 견주어 박용재 시인의 ‘꽃의 시학’은 그 존재감의 빛남이다.
특히 그 자신의 사행 시편의 틀 짜기로 꽃을 질료로 삼은 시편을 페이지 순에 의거 무작위(無作爲)로 선별하여 그 중량감과 서정성의 미감에 접근하면 “별의 눈으로 보아도 너는 꽃이고/바람의 손으로 느껴도 너는 꽃이고/새의 입으로 말해도 너는 꽃이고(동백꽃)”이나 “나비는 기쁘리 꽃을 만나서/나는 누구를 만나 기쁜 거지/강릉선교장 매화꽃 같은 너를 만나서지(꽃밭에서)”도 그렇거니와 “올해도 어김없이 풀꽃의 신들은/이쁜 꽃을 잔뜩 봄에게 보내주셨네/나비가 하늘을 펄럭이며 노래하네(나비)”의 일면처럼 그 양상은 다채로울뿐더러 꽃가지의 틈새로 하늘에 걸린 낮달 하나’의 조화는 몽환(夢幻)과 같은 환상의 조합이기에 못내 경이롭다.
각론하고『카프카와의 대화』에서 체코의 작가 구스타프 야노흐(Gustav Janouch)가 “고향을 알기 위해서는 타향으로 떠나야 한다.”라는 그 역설만큼이나 그 자신은 지혜로운 삶의 잠언(箴言)은 지극히 적절성을 수용한 감각적인 묘미랄까? “종탑 높은 성당의 종소리 울려 퍼지자/들판에 서서 저녁기도를 드리는 냉이꽃 한 쌍/저 작은 풀꽃의 눈동자가 어찌 그리 맑은지/신들도 눈물이 날 지경이겠지요(냉이꽃 한 쌍)”에서 새삼 확증되듯이 이처럼 맑은 영혼에 투사되어 마치 ‘꿈에라도 뵐 수 있었으면 먼 하늘 창가 환한 미소’로 또 그렇게 변형(變形)될 따름이다.
모처럼 삶의 비중이 실린 사행시집에서「꽃의 우주, 우주의 꽃」으로 전제한 경희대 교수 홍용희 평론가가 “박용재의 시 세계는 꽃들이 살고 사랑하고 춤추는 화원이다. 4행의 정제된 형식에 제각기 다른 꽃들의 생기, 표정, 움직임 등이 내밀하게 자기 조직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화원에서는 시적 자아 역시 꽃이다. “아침 꽃밭 내가 나팔꽃으로 피어 웃네(하루)”라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꽃의 시선으로 꽃의 세계에 말을 걸고, 듣고, 생각하고, 향유하고, 의지한다.”라는 그 담백한 해설은 따뜻한 감성과 지극히 다감한 분위기는 이처럼 명백히 감지된다.
무엇보다 『푸른 꽃』의 저자로 독일 낭만파의 대표 시인 노발리스(Novalis)가 “철학이란 본래 향수요, 고향을 만들려는 하나의 충동이다.”라는 역설처럼 인간은 맑은 영혼의 존재이기에 “돋보이게 하는 가는細 소금 같은 꽃잎/그 마음이면 더 이상 바랄 게 있더냐?(안개꽃)”의 물음 앞에서 즉물적 대상은 끝내 “그래서 이름 있는 것보다/이름 없는 것이 더 평화롭지요(그냥 꽃이면 되는 거지요)”의 일면에서 일체의 시 의식은 또 다른 체념에 해당한다.
차제에 매몰차고 우울한 우리네 일상에서 신이 허락한 존재임을 확증하기 위하여 틈틈이 창의적 부산물로 형상화한 시편은, 유추컨대 2024년 생명의 봄날에도 ‘절제와 비움으로’ 빚어졌기에 시를 읽는 독자의 기쁨이며, 또 하나의 행운이다. 따라서 생의 황혼에 그 어스름을 응시하며 낮은 산자락을 보행하며, 행복한 꽃나무 가꾸기와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으로 해명되는 그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인연의 매듭을 풀어내는 일면은 비장감이 묻어있다. 모처럼 ‘부자父子 간의 정성으로 조성한 아버지 정원庭園’을 다녀와서 담담히 읊조린 시편 “수국水菊 나무 사이로/아버지 손길이 분주하다//신이 다녀간 것처럼/그 손길이 고운 꽃을 피우니(어흘리 수국나라-최종훈 옹께)”의 보기나 “젖은 숨 내쉬니/온 언덕에 봄꽃 만발하고(숨-최순일에게)”의 예시를 통해 비교적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야말로 지상에서 유일한 하늘의 언어인 ‘감사(感謝)’가 묻어남은 한순간 충만한 생명감인 삶의 환희다.
각론하고 인간 심리의 잠재적 가능성의 결과로 원형관점에서 사행시집의 파격(破格)으로 호흡이 짧고 시상을 응축시켜 2행으로 처리한 “죽음 또한/한 인연이지요(죽은 풀꽃이 산 풀꽃에게)”의 양식이나 “죽음 같은 건 슬퍼 않는다네/다만 당신을 만나기 위해(붓꽃과의 대화 1)”에서 입증되듯 ‘죽음’의 이미지는 모태 의식인 ‘어머니의 대지’로, 무의식이 지배하는 깊음의 공간은 창조의 질서가 마련된 처소다. 까닭에 “요 녀석들 다시 살게 할 수 있다면/나는 영원히 잠들어도 소원이 없겠네(나와 들꽃과 풀벌레)”에서 ‘나와 들꽃과 풀벌레’를 삼각대위(三角代位)로 결부시켜 그 자신이 ‘신神은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롭게 하는 사물의 기운과 신성한 에너지’로 개념화한 형상은 특이하다.
까닭에 꽃말이 '열정적인 사랑'인 ‘능소화나무에 고독이 덩그마니 앉아 있는’ 현상에서 “거미줄에 걸려 죽어있는 여치 녀석 너무 안쓰러 능소화 꽃잎 내 눈물처럼 흐르륵 떨어지네(꽃잎눈물)”를 통해 그 자신이 지극선(至極善)의 수행자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임은 <꽃잎눈물>에서 확증되지만, 능소화는 쌍떡잎식물로 일명 금등화(金藤花)로도 불리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또 한편 그 자신이 “가을 산책길에서 만남 풀꽃에게 물었다/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냐?(풀꽃의 거처)”라는 반문 앞에서도 극명할 것이나 보헤미아 출신으로 후기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를 떠올리며 “그대 호숫가 오두막에 놀러온 새들이/대지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다지에토!(오두막-구스타프 말러를 들으며)”를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혼잡한 질서를 뚫고 피어나는 노래’ 강인한 생명력을 깨달음의 미학으로 변주시킨 정신작업은 깨끗한 순수서정성의 미감에 그 존재감은 이같이 명백하다.
3. 개아(個我) 다스리기와 시적 합리성
보편적으로 시작과정에서 일률적으로 구도 처리한 박용재 시인의 사행 시편은, 시 맛(詩味)이 가일층 매혹적이고 충격적임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그 자신의 처연한 삶의 지문(指紋)에 해당하는 시적 기법은 멕시코의 문인으로 외교관 신분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Rozano)의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 하는 본래의 경향을 지닌다. 그 점은 신비스러운 중력의 법칙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라는 주장처럼 바람의 초상에 견주어 언어의 응결체가 시적 상상력을 작동시켜 현대시의 이중구조를 적절히 처리한 동질성의 일례다.
모름지기 바람의 통로와 생명 기표의 교신이라는 양상에서 창조하는 영혼은 아름답고 위대하기에 가슴 따뜻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소외와 갈등으로 인해 마음의 깊은 상처(trauma)로 좌절한 타자에게 힘겨운 삶의 일상에서도 꿈과 비전을 주지시켜야 한다. 까닭에 “한줄기 드리지 못한 인생으로 살다가/신의 곁으로 돌아간다면/저 작은 풀꽃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저 작은 풀꽃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에서 스스럼없이 분별하는 그 자신의 행보와 삶의 여적은 종종 경건함을 지니기에, ‘삶의 꽃잎’을 헤아려 귀 기울이는 삶의 잠언(箴言)은 더없이 신선한 충동일 따름이다. 이처럼 그 자신이 시대적 소임을 충직하게 지켜내며, 날(刃) 푸른 존재감으로 서정의 일상과 감성적 교감을 합일하여 적확하게 통신하는 행위는 또 하루의 삶을 그렇게 빛나게 할 것이다. 또 한편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깊은 고뇌의 시간을 보낼 일이기에 “며칠만이라도 서러움 같은 거 잊고/마냥 웃으면 그랬으면 좋겠어요(어느 봄날 산수유나무가 말했다)”의 보기에서 그 자신이 맺힌 한(恨)을 나직이 토해내지 않아도 멋스러운 평화주의자임은 명쾌히 확인될 것이다.
차제에 따뜻한 일상의 서정적 자아로 한 폭의 무채색 수채화는 정신풍경화로 클로즈업되기에 “별들이 조금이라도 더 밝게/네가 가는 길을 비출 수 있도록/나를 흔들어 하늘을 닦는다(나를 흔들어 하늘을 닦는다)”의 일면은 물론 시집의 말미를 장식하는 시편에서 확증되듯 ‘공동체 인식의 소중함’을 나를 통해 매듭을 짓는 시적인 모티프는 열린 우주로의 지평을 열어 보인 합일의 처소로 ‘하늘의 의미는 천(天)과 공(空)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처리로 장식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인 그 오브제(objet)의 수용성에 맞물림이다. 또 한편 사상과 자유로운 교감을 거쳐 내면의식에 생명체로 존재하는 시가 깨달음의 미학임을 유념할 때, 그 자신의 시 세계는 마침내 지상에서 확산하여 승화되고 우주를 관통할뿐더러 재생적, 미학적인 면보다 생산적이고 생명적 요소에 합일하기에, 나직이 가라앉은 선율에 이미지의 형상화를 수용하여 입체적 구조와 점층적 효과를 조화시킨 삶의 현상은 지극히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양상이다. 그렇다. 오랜 날, 삶의 일상에서 읊조린 처연(悽然)한 기대감은, 비교적 순결한 영혼인 안개꽃 같은 ‘슬픔과 죽음’의 표징은 놀랍게도 소박한 심상(心象)에서 확증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정신 능력의 범주(範疇)에 속한 시적 상상력의 확장은 따뜻한 감성의 편린(片鱗)으로 감동을 회복시켜준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절명(絶命)의 일순간 푸른 식물성 질료를 시적 대상으로 확정하고 그 축(軸)을 중심으로 일관된 윤무(輪舞)도 그렇거니와 심상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여 시의 자주·독자성을 끈질기게 채근(採根)하고 구도적인 자세로 전통의 틀을 쌓고 허물며 아우르기를 반복하는 의지표명은 자못 비장(悲壯)하다. 모쪼록 체내의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여 어둠의 색조마저 ‘부픈 기대감과 용기, 그리고 통섭(通涉)’으로 변형시키는 박용재 시인이 저토록 존엄한 생명감을 불러일으키는 점을, 대륙의 심장에 각인(刻印)하여 우리 현대시문학사에서 존재감 빛나는 고귀한 성좌로 자리매김할 것을 확신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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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평설의 산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