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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 대사는 바람을 부르고 비를 자유자재로 내리게 하는 신통한 도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대사께서 일본에 갔을 때 간사한 일본사람들이 대사의 도력을 시험하느라 밤새도록 방에 불을 때고 아침에 보았더니 방안에는 고드름이 얼어있고, 대사는 도리어 방안이 왜 이렇게 추우냐고 꾸짖었다는 등 일화가 참 많습니다. 듣기만 해도 통쾌한 대사의 신통 이야기는 당시 혼란한 세상에 백성들이 얼마나 대사를 의지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사명당 유정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과 도가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1544년에 태어나신 스님은 법명은 유정(惟政)이며, 자는 이환(離幻)입니다. 스님에게는 송운(松雲)이라는 호도 있지만, 세상에는 사명당(泗溟堂)의 호로 더 잘 알려져있습니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15살의 나이로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년 뒤 18세에 승과에 합격하고는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재상인 노수신으로부터 노자 장자 열자 등 도가서와 시를 배웠습니다. 사명당 문집을 읽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선사의 학문이 넓고 깊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선조 8(1575)년 31살 때,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서산대사 휴정을 찾아 선(禪)을 닦았습니다. 이윽고 42살에 옥천산 상동암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 서산대사를 따라 승병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친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2년이 지난 해인 선조 37(1604)년 2월, 스승의 부음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일본에 사신으로 가달라는 임금의 명을 받았습니다.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에서 승려를 나라의 대표로 보낸 것입니다. 그 해 8월 20일, 유정스님은 노구(60세)를 이끌고 일본을 향해 배를 탔습니다. 대사는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정부와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으며, 일본 스님과도 만나서 법담을 나누었습니다. 일본의 민중들은 사명당대사를 살아있는 부처로 대접했습니다.
스님은 다음 해 5월 귀국길에 올랐는데, 이 때 전쟁에 끌려간 우리 백성 1,500여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동원된 선박만 40척이었습니다. 1,500명은 당시 교통사정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규모입니다. 사명당대사집에 보면,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도 스님은 계속 일본과 접촉하여 포로송환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2년 뒤에는 당시 조선정부가 다시 1,500여명을 더 데리고 오게 되어, 모두 3,000여명의 포로가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일설에는 3,500여명이라고도 합니다.)
노예로 끌려간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온 대사의 행적은 실로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여기에는 스승 서산대사의 유촉이 있었습니다. 서산대사와 스님은 참으로 선과 보살행이 둘이 아닌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스님은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선사들과 선의 종지에 대해 법담을 나누었는데, 그 인연으로 고국에 돌아와서도 이 스님들에게 편지를 보내 남아 있는 우리 백성들의 소환을 부탁했습니다. 다음은 대사께서 일본의 선승 원길(겐끼츠 元佶, 1548~1612)에게 띄운 편지인데, 이 편지는 스님이 입적하기 두 해 전인 1608년 봄에 쓴 편지입니다.
서역에서 온 노래 한 곡 일찍이 형들과 함께 불렀었지요. 잠깐 만나고 꿈길처럼 헤어진 것이 바로 어제만 같거늘, 그 사이 두 번이나 봄과 가을이 바뀌었습니다. 멀리서 생각해 보아도 노형(老兄)들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면목으로 능히 큰 광명을 내어 그 섬의 백성들을 구제하고 있으리니 참으로 놀랍고도 장한 일이시오. (중략)
나의 원래 소원은 그저 우리나라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돌아옴으로써 “생령을 두루 구제하라”고 하신 선사(先師 서산대사)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원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참으로 서운하였습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온 뒤로 몸이 몹시 병들고 쇠약해져서 곧바로 묘향산에 들어가 꼼짝도 않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중략) 부디 형께서는 본래 가지신 그 좋은 뜻을 저버리지 마시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원으로써 대장군에게 아뢰어 주십시오. 우리 백성들을 모두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심으로써 노형께서 전날 하신 그 맹세를 어기지 않으신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부디 이 변변찮은 물건이나마 웃으며 받아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 일본 원광사 원길(元佶)스님에게 보내는 편지 (사명당대사집 6권 동국역경원)
사명당대사집에는 일본 선소(仙巢)스님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스님이 만년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중략) 나는 서쪽으로 돌아온 뒤로 몸이 약해지고 병이 찾아와서, 그대로 묘향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분수를 지키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나는 선사(서산대사)의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귀국의 섬에 갔다가 형과 유천과 함께 일본 본토로 들어갔었습니다. 서소장로(西笑長老)와 원광(圓光)장로 및 오산(五山)의 여러분들과 종지를 담론하여 그 유래를 구체적으로 밝혔으니, 아름답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본래의 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기에 그 서운함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원하기는 형께서 더욱 마음을 써서 우리 백성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심으로써 전날의 기약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변변찮으나마 이 물건을 웃으며 받아 주기를 바라면서 이만 그칩니다.
- 선소(仙巢)에게 보내는 편지 (사명당대사집 6권 동국역경원)
몇 달 전 가까운 후배가 책을 몇 권 보내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사명당 대사의 문집과 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송운대사 분충서난록>이었습니다. 유학자 김중례가 쓴 서문에는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인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송운(사명)대사께서 입적한 후에 문집을 낼 때입니다. 법제자인 남붕스님이 대사의 일기를 가져왔는데, 표지에는 골계도(滑稽圖)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골계(滑稽)는 해학, 또는 풍자를 뜻하는 말이니, 세상사를 풍자하는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해서 골계도는 '한바탕 웃으면서 보는 책(자료, 기록)'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서문을 쓴 유학자 김중례가 대사의 일기를 열어 보니, 놀랍게도 사명대사께서 임진왜란 중에 왜장 가등청정을 상대로 회담을 벌이면서 쓴 적정의 정탐 및 상소문과 일본의 스님들에게 보낸 편지 등 중요한 문서가 많았습니다. 김중례는 <골계도>가 제목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생각 끝에 스스로 제목을 <송운대사분충서난록>으로 바꿨습니다. 송운대사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은 '송운(사명당)대사께서 충성심을 떨쳐 나라의 어려움을 덜어준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선승(禪僧)의 눈으로 보면 한바탕 웃으면서 보는 책이지만, 유학자의 눈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국난을 이겨낸 기록으로 보인 것입니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시 한 수로 역적을 모의한다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시는 선승의 눈으로 세상사를 읊은 것입니다.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굴이요,
천하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로다
창문에 뜨는 밝은 달을 베고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 소리 어지러이 들리네
萬國都城如蟻垤(만국도성여의질) 千家豪傑若醯鷄(천가호걸약혜계)
一窓明月淸虛枕(일창명월청허침) 無限松風韻不齊(무한송풍운부제)
어느 박복한 사람이 임금의 총애를 얻고자 이 시를 반역의 혐의가 있다고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세상사를 개미굴이요, 하루살이로 보았던 선승들의 세계를 어찌 충효를 논하며 공훈을 따지는 속세의 선비들이 짐작할 수 있을까요.
금강경 마지막 구절에서 부처님은 일체 만법을 꿈이나 환상, 물거품이나 그림자(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로 보라고 법문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실답지 않은 것(空)으로 보았기 때문에 서산대사 휴정스님은 전쟁이 끝나자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사명당 유정스님은 벼슬을 권하는 임금의 손길을 사양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스님 모두 전란 중에 나라를 위해 쌓은 공훈을 누구에게도 묻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일도 어렵지만, 일을 마치고 나서 미련 없이 자신의 종적을 감추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명당대사의 시 한 수를 읽어봅니다. 이 시는 대사께서 일본에 있을 때, 도꾸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의 큰 아들이 대사의 설법을 듣고 재삼 한 마디를 청하자, 대사께서 지어준 시입니다.
큰 허공은 넓고 넓어 무진장인데,
그 아는 성품은 고요하여,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다네
지금 성성하게 설법을 듣고 있는데, 무얼 번거롭게 묻는가?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다네
(여운 의역)
一太空間無盡藏(일태공간무진장) 寂知無臭又無聲(적지무취우무성)
只今聽說何煩問)(지금청설하번문) 雲在靑天水在甁(운재청천수재병)
(사명당대사집 제7권)
옛 선사들은 우리 본래의 성품을 허공(태허 太虛)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품은 속이 텅 비어 있어 한 물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공은 능히 인연에 따라 끝없이 천지만물을 내고 거두어들이니, 마르지 않는 곳간(무진장)입니다. 노자는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절대 놓치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도덕경 73장). 작은 기미 하나도 놓치지 않는 허공의 성성한 '아는 성품(슬기 知)'은 고요하여 냄새도 소리도 없습니다.
이렇게 도의 대강을 설명한 스님은 셋째 구절에서 읽는 이의 눈을 번쩍 뜨게 합니다. 스님은 설법을 듣고 다시 한 마디 더 청하는 덕천의 아들에게 '지금 성성하게 설법을 듣고 있는데 다시 무얼 의심하느냐?'고 추상같은 법문을 던졌습니다. 설법을 듣고 이리저리 궁리하는 청년의 눈과 귀를 막아 버렸습니다. 서산대사는 '공적으로는 바늘도 용납하지 않지만, 사적으로는 수레와 말이 오간다'고 했습니다. 막힌 숨통은 스스로 틔어야 합니다. 백봉선생님은 '가물치 판 돈은 통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 셋째 구절을 '설법을 다 들었으면 이해가 됐을 텐데 다시 무슨 의문이 있는냐?'고 해석한다면 스님의 형형한 선지(禪旨)를 땅에 파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를 보면,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를 안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분이 없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명예와 칭송은 아라한에게도 장애가 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했습니다. 사명당 유정선사가 벼슬을 사양하고 산에 들어간 것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물론 칭송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자리에서 말한다면, 달리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단순히 벼슬의 유혹을 뿌리쳤다고만 한다면, 대사의 속을 한참이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사양한 것이 아니라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임금과 신하가 모인 자리에서 모두 대사를 보고 한바탕 웃어버렸다면, 대사는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님이 일기 제목을 <골계도>로 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벼슬로는 스님을 부를 수 없습니다. 설령 온 나라의 땅을 다 내 놓아도 스님이 앉을 방석 하나 깔기에도 궁색합니다. 오히려 허공에 방석을 깐다면 대사께서 한 번 눈길을 돌릴 것입니다.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다.> 이 마지막 한 구절에 사명당 유정선사의 평생의 살림살이가 들어 있습니다.
(여운 2016.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