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며”
새 시대(신약시대)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죄인들을 구원의 삶으로 이끄신 행위들을 통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있는 것입니다.”(마태 12,28)
병에 걸렸거나 악령 들린 사람들만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하루 품삯을 다 받은 일꾼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도 아버지 품에 안긴 탕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용서를 받은 여자,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여 삶을 포기했다가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마리아 여자, 동족에게 배신자 비난을 받던 세리 자캐오 등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의 통치와 돌봄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리게네스는 예수님을 ‘아우토바실레이아’라고 합니다. ‘아우토바실레이아’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서 이미 이 세상에 왔고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라면, 왜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는 걸까요? ‘오시며’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어서 오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의 정확한 의미는 ‘아버지의 나라가 어서 완성되시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신학자들은 ‘이미, 그러나 아직’이란 유명한 명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땅에 뿌려진 씨앗이 하루하루 자라나면서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낟알이 맺힌다. 이 중 어떤 것이 하느님 나라일까요?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완성은 종말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를 기도하는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가 한시라도 빨리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종말에 그분의 나라가 완성되면, 곧 그분의 주권과 통치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면 어떤 모습일까요? 먼저 ‘종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종말의 의미를 지닌 ‘마지막 날’에 쓰인 단어는 ‘에스카톤’인데, 이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시대의 종말의 뜻합니다. 주님 재림과 함께 에스카톤 곧 종말이 올 터인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파괴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말을 세상 종말로 잘못 알고, 종말이 되면 세상이 없어질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청동기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따는 말이지, 세상이 끝났다는 말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종말이 와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이요(묵시 21,1 참조), 정의와 비폭력, 자유와 평화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이사 11,6-8 참조)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감사송
우리가 지금은 서로 “찬미 예수님!” 하고 인사하지만, 초대교회 신자들은 “마라나 타!” 하고 인사했습니다. 그 의미는 “주님, 어서 우리에게 오십시오!”입니다. 그들이 “마라나 타!” 하고 인사한 것은, 어서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하느님의 주권이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어서 재림하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오늘 밤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면 과연 몇이나 그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거나 아니면 “저는 아직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었으니 오늘 밤은 말고요. 내일도 말고요. 먼 훗날에 오시기를……”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을까요?
이렇게 대답하는 이들도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바치면서 주님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는다고 고백하고, “신앙의 신비여”를 노래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 재림을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그분께서 너무 빨리 오시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내가 지금 폭력과 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고, 종교의 자유가 없어서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고 있다면, 나치에 의해서 죽어간 유다인들이나 미얀마의 로힝야족처럼 인종청소의 대상이 되어 살해당하고 있다면, 사기와 강간과 강도를 당하고 있다면, 진통제조차 듣지 않는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나는 주님께서 한시도 지체치 말고 어서 재림하시기를 고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모든 불의와 절망과 미움을 정의와 사랑과 평화로 바꿔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 우리 삶의 태도를 결정짓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언젠가 다시 오시어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거라는 희망은 우리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결정적 동기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는 우리의 희망이 담긴 기도입니다.
상실과 슬픔의 날에
분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
존경과 평화, 사랑의 가슴이 무너지는 날에
우리는 주님을 찾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을,
부활의 주님,
아직도 도시는
절망의 자리가 될까요?
우리의 심판관이신 주님,
오늘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여, 여기에 오시옵소서.”
- 에릭 루틀리
하느님의 나라가 내 삶의 자리에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 자신 안에 그 나라가 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 나라가 자기 영혼 안에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말씀은 우리가 일상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태 6,33)을 먼저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꼭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만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400년 전 로렌스 수사는 자신의 소임터인 수도원 주방에서 온종일 바삐 일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계란을 뒤집을 때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려 했고,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로렌스 수사이 삶의 태도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출간된 <하느님의 현존 연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연습’이란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에 머무는 연습입니다. 로렌스 수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분을 자주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분과 함께 있겠습니까? 거룩한 습관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분을 자주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콜로 3,17)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단순하고 평범하며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의 행위를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기쁘고 의미 있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아기를 돌보면서, 직장 일을 하면서, 문을 열고 닫으면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된다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다음에 “아버지의 나라가 내 삶터에 오시며”라고 덧붙여 기도하면서, 내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하면 내 삶터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구체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지 성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 떼이야르 드 샤르댕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하느님의 현존 연습’이란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에 머무는 연습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