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유다 문화권에는 전달하고 싶은 말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는 표현 방식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는 바로 앞의 청원기도인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의 강조 반복입니다. 곧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그리고 나의 삶에 그분의 주권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청원을 다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청원기도에 대한 설명보다는 내 삶에서 어떻게 그분의 뜻을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자기 인생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씨름하며 애를 쓰지만 찾지 못해서 괴로워하거나, 잘못 찾은 것 같아서 후회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엉뚱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들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하다가 차량이 정체되어 서 있는데 우연히 그 근처에 필리핀 대사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 선교에 관심이 있던 터라, 그것을 하느님께서 자신을 필리핀에 선교사로보내기 위한 메시지로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퇴직을 하고 치킨 가게를 열었는데, 그 까닭은 어느 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무작위로 펼치고 손가락으로 찍었는데, ‘가축’이란 단어를 찍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빵’을 찍었다면 지금 빵집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기발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그 사람의 출생연도를 바탕으로 결정된다는 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1952년생이면,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창세기 19장 52절에 있다는 것입니다.(굳이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유는, 창세기가 세상과 인간의 창조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2000년생이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창세기 20장 0절은 없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판관기의 기드온처럼 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어떤 식으로든지 확실히 드러났으면 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농사꾼이던 기드온은 어느 날 하느님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확신이 서지 않던 그는 하느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청을 받아들여 그가 바친 희생 제물을 불태우십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석연치 않았는지 타작마당은 그대로인 채 양털 뭉치만 이슬에 젖게 하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로 해 주십니다.
이쯤에서 기드온은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다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다른 표징을 청합니다. 이번에는 양털 뭉치는 말라있고 마당만 이슬에 젖게 해다랄고 합니다.(판관 6,14-40 참조) 오늘날 우리도 기드온처럼 자기만의 양털 뭉치를 하느님 앞에 놓고 확실한 표징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언젠가 한 조사기관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한 가지 질문만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질문을 던질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조사 결과 후 두 번째로 많이 나온 질문이 “하느님, 제 인생에서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였다고 합니다.
닉 부이치치Nick Vujicic는 태어날 때부터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걷고 뛰는 것은 고사하고, 혼자서 먹지도 못하고 목욕도 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서 양치질을 하거나 머리를 빗거나 옷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닉은 이런 자신의 모습에 절망해 여덟 살 때 이미 삶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열 살 때는 몇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와 그에게 일어난 것일까요?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성경에 나오는 태생 소경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읽게 됩니다. 제자들이 태생 소경을 가리키면서 예수님께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사실 어린 닉 부이치치가 수도 없이 하느님께 묻고 또 물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 제 아빠와 엄마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가 팔다리 없이 태어나야만 했나요?”
닉 부이치치는 예수님께서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요한 9,3-4)라고 하신 말씀을 읽으면서 존재 자체가 뒤흔들리는 체험, 미래가 밝게 펼쳐지는 체험을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자기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확실하게 깨닫습니다.
“아, 나도 아버지 하느님의 자랑스런 자녀다. 그분에게는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신 특별한 뜻이 있다. 그러니 나는 그분의 뜻을 성취해야 한다.”
닉 부이치치는 사지가 없는 불편한 몸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 내적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삶의 지평을 가슴에 품습니다. 그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유용한 목록을 소개합니다.
- 분명한 목적의식
- 결코 사라지지 않는 확실한 희망
- 아버지 하느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굳센 믿음
- 아버지 하느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용서해 주시듯, 나도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용서한다.
- 나보다 남을 먼저 섬기는 사명감
콜카타 사랑의 선교회에 자원봉사를 하러 온 한 젊은이가 마더 데레사를 만나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더 데세라는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명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지요. 당신이 주님의 뜻을 명확히 알도록 기도하는 대신 당신이 주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이 말은 새겨볼 만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착한 목자이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느님께 우리는 확실한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깊은 신뢰를 드려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착한 목자이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느님께 우리는 확실한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깊은 신뢰를 드려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