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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문예 권두칼럼>
맑은 영혼과 감사의 일상화(日常化)
- 부부 시인의 하모니 ‘안녕, 나의 사랑!’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고문)
1. 감사에 관한 교시와 감성적 감응
어디까지나 인간의 행위는 감사의 결과와 맞물려 있기에 영성의 소유자들은, 헤르만 헤세가 ‘작가는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관점에 접근하여, ‘꽃향내 묻은 식물성 언어로’ 소중한 연(緣)이 닿은 부푼 생명감에 항상 감동을 회복하는 타자와의 관계성에 감사할 바다. 감사의 문자해석은 ‘타인에 의해 자기에게 보여준 호의에 의한 승인의 정(情)’인 반면, 성서에서 히브리어의 ‘야다(yadah)’는 ‘찬양하다. 감사하다.'라는 개념으로 그 목적어는 오직 여호와다.
또 한편 어느 신학자의 간증처럼 ‘저의 기도를 다 들어주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라는 그 성숙한 믿음으로 감동을 체득할 일이다. 언어는 생명력을 지니기에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 묻은 냄새가 나듯’ 하늘나라의 언어인 감사를 통해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서 감동을 회복시킬 바다. 이 시간 소중한 삶의 잠언은,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 최초의 날이며 최후의 날이다.’라는 절박한 의미추구여야 한다. 까닭에 신앙인임을 자처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향기를 타자에게 나눠주는 축복의 메신저 역할을 담당할 일이다. 한편 말틴 루터는 일평생 ‘감사기도’를 드리는 생활에 일관하였음은 주지할 바이나 아울러 영국 청교도들을 미국 땅에서 도와준 스콴토는 임종의 자리에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그 간절한 영성(靈性)의 기도에 경건함은 새삼 가늠할 일이다.
모름지기 “치열한 전쟁 중에 잠시 투구를 벗어놓고, 작은 성당에서 하나님께 눈물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던 시간이 내 삶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라는 나폴레옹의 간증도 그렇지만, 영혼의 상처로 고통을 받는 인류를 위해 지구촌을 무대로 하여 가스펠 송을 부르는 ‘감사의 화신’ 레나 마리아는 자신의 불행을 ‘감사와 축복의 기회’로 전환을 시키는 위대한 삶을 찬양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획일화된 사고가 우리를 고정관념의 틀에 갇히게 만든다. 까닭에 불확실한 시간대에 몸담을지라도 “듣고 말하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자기변명 뒤에도 존재감을 지켜내되 무엇보다 물음표(?)로 사는 삶이 역사를 변화·발전시키기에 호흡을 가다듬고 감동의 느낌표(!)로 사는 생의 가르침을 수행할 일이다.
또 한편 빈자의 성녀로 감사와 나눔, 그리고 헌신의 실천자인 마더 테레사의 ‘테레사 효과’를 통해 입증됨도 그렇지만, 에네아그램(Enneagram)에서 4대 성인의 정체성을 100룩스 빛의 밝기로 규정하면 ‘감사는 65, 사랑은 60룩스’로 그 명도의 수치가 견주어지는 까닭에, 언어의 생명력은 신선한 충격이다. 무엇보다 ‘감사’의 일상화야말로 그 자신의 삶에 일관되게 실행하는 자에게 이 땅에 임할 하늘의 축복이고 천국의 은총임은 결단코 간과치 말아야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다소 부끄러운 일이지만, 모처럼 필자와 소중한 사제의 연이 닿은 ‘길 위의 시인’인 파워불로거 배선희 대표를 통해 그렇게 우연한 첫 만남이 이루어진 기대감으로 ‘천년 하슬라(何瑟羅)의 땅’으로 일컬어지는 강릉(江陵)으로 향하는 길목에 박성진 시인이 지난 5월 중순께 인터넷의 브런치 카페에 다음에 인용하는 글로 인해 그렇게「헤르만 헤세 기념사업위원회와 광화문 국제아트페스티벌 조직위원회」가 공동으로 묶어 출간한 필자의 화제시집인 ‘수채화와 시가 있는 풍경’『아흐, 현기증이다』(삼영칼러, 2014)가 뒤늦게나마 독자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여기 한국 시 문학의 장르를 초월한 부동의 지성인이 숨 쉬고 있다. 헤르만 헷세를 동무하며 낭만주의 문학을 겸비한 시의 미래를 그분에게 걸어본다. 천연 다이아몬드 원석! 빛나고, 아름다운 가치 있는 보석으로 탄생한 그 이름, 석자가 한국이 자랑할 살아있는 전설 부동의 지성인 엄창섭! 희곡의 선구자 욘포세 괴테와 함께라면 더 좋겠다. 한마디 언어 속에 통찰력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만상 시어의 세계는 윤동주의 서시가 아름다운 영원한 별처럼...새벽을 가르며 뵙게 될 그분을 뵙기 위하여 영동고속도로에 올라탔다. 21세기 큰 별 잎새의 바람과 숨결을 듣게 되리라.”
2. 시 의식의 합리성과 단조로운 정감
어디까지나 절제의 매혹은 추상적 개념이 아닌 행간의 틈새에서 비롯된 타자와의 끈끈한 관계성을 사려 깊게 주의 집중할 정신작업이다. 그렇다. 불확실한 현상에서도 덴마크의 심리학 교수 스벤 브링크만이『철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불안과 허무에 시달리던 어느 날, 철학이 내게로 왔다.’를 가늠하며 분별력을 지니고 없는 못내 경계할 일이다. 이같이 특정한 누군가의 시편을 통해 비정한 물질 만능의 시간대에서도 자족할 그 여유로움은 응당 지켜보아야 할 정황이다. 여기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 망각한 ‘불의 꿈’을 눈부시게 발화를 시킨『문학바탕』과『신문예』를 통해 등단한 박성진 시인이 의욕적으로 선보인 연작시「별 헤는 밤 동주를 노래하다」의 결(結) 고운 틀 짜기의 서정적 정조는 가일층 감미롭고 경이롭다.
또 한편 평자가 올곧게 지적하는 시 감상의 일면이지만, “오, 놀라워라. 민족의 시인 윤동주는/끝내 이 나라 회복시키고/영원히 살아 숨 쉴/저 눈부신 성좌(星座), 겨레의 넋이다.(인왕산 숲길에서)”도 그렇거니와 ‘후쿠오카의 밤하늘이 낚아채 가고 하늘의 슬픈 비 온통 밤새 내렸지.’라는 그 감회가 어린 “후쿠오카의 밤하늘이 낚아채 가고/하늘의 슬픈 비 온통 밤새 내렸지.(슬픈 비)”에서 ‘슬픈 비’라는 감각은 느꺼움에 맞물려 있기에 종종 지켜볼 바다. 특히 강렬한 집념 뒤에 ‘못내 시 한 편은 봄날의 오수’인 심리상황에서 “민족의 역사요, 혼(魂)인/그 조선어 시 한 편에/끝내 그대 발걸음 무사하려나.(시 한 편)”의 보기나 또 의연한 결기(結己)가 날(刃) 푸른 “절망과 치욕(恥辱) 앞에서도/결단코 포기하지 않으리다.(못다 쓴 참회록)”와 맞물린 다소 호흡이 긴 산문시 양식의 “가슴은 못내 두근거리고, 그대 숨져 홀로 묻힌 이 언덕에 오르면 놀랍게 뛰는 심장의 충동(衝動)이다.(그대 흔적)”라는 충정은 ‘뼈마디에 저며오는 통증의 느꺼움’으로 깊은 감동을 안겨주기에 그 존재감이 빛난다.
이 같은 현상에서 묵언의 응시 끝에 논의하려는 시편은 개아의 동일화 양상에서 시적 차별성이 점차 돋보일뿐더러, 깊은 밤에도 견고한 고뇌 끝에 깊은 사유(思惟)를 거친 여백의 틈새 좁히기와 맺어지기에 시적 작위(作爲)의 온전한 수행은 회감(懷感)이 묻어있다. 또 하나 그 자신의 시편 일체는 사고가능성의 긍정적 맥락에서 그 자신의 극명한 시혼을 눈부시게 지상의 꽃으로 피워내며, 절제된 감성의 매혹은 추상적 개념의 절제가 아닌 행간의 여백에 맞물린 타자 간의 끈끈한 관계 층위라 사려 깊게 지켜보며 주의 집중할 정신적 행위다. 그렇다. 미래가 불확실한 삶의 시간대에서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하라, 곧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고 자신의 자연과 조건들을 전유하라.”라는 리듬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지적이 생성된 공간의 개념으로 통용되는 일례임은 주의 깊게 음미할 것이다.
까닭에 엄숙한 창조적 활동을 다양하게 펼쳐나갈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영감의 비의(非義)를 해명하는 사제(司祭)로서 비공인의 입법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차제에「시 의식의 합리성과 단조로운 정감」은 끊임없이 가늠할 점도 그렇거니와 지극히 메르헨(Marchen)적인 시 의미를 수사적 기법(craft)으로 처리한 시집『씨앗』(지식과 감정, 2023)을 묶어내며 ‘인생이란 철새도 사람도 고단한 것이 인생입니다’라는 시적 해법의 당위성을 역설한 김은심 시인의 <피아노의 음률에>를 포함한 일렬의 시편은 시적 긴장감이 응축되어 시적 분위기가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기에 그 의미와 가치는 동시대의 정신작업에 종사자로서 응당 감당할 몫이다.
여기서 이채롭게도 ‘피아노의 선율에 따라 마음도 육체도 흔들어 보는’ 일상의 삶에서 “가끔 섬세한 음률의 가닥 풀어놓고/짐짓 작은 심사(心事)도 따라간다.(피아노의 음률에)”의 보기에서나 또는 “하얀 캔버스 위의 물방울/영롱하고 크고 작은 형체(形體),/크고 작은 물방울 또르륵 구른다.(화가의 물방울)”을 통해 잠시 묵언으로 응시하면 피아노의 건반에서 튕겨 오르는 맑은 선율이나 아름다운 화폭이 무채색의 정신풍경화로 클로즈업되어 그 자신의 내면의식이 명백하게 입증될 것이기에 시적 능력의 가능성을 지닌 시 의미의 다양성을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아니하다.
무엇보다 ‘쉼표와 느낌표(!)로 또 그렇게 비가 내린다.’라는 그 자신의 지상에 갈 앉은 나직한 음조도 신선한 충동감이나 “가슴속에서 임 그리며/비 오는 날의 그 설렘이다.//오늘도 마냥 그대 앞에서/설렘으로 다가오는 정한(情恨),/하염없이 느꺼움인 듯 비는 내리고.(비 오는 날의 설렘)”에서 명증되듯이 따뜻한 서정성은 감성의 합일로 그 존재감은 따뜻한 느낌표(!)의 잇닿은 설렘일뿐더러 상처받은 영혼도 맑고 투명하게 치유(治癒)하는 역동성의 교시에 의한 푸른 생명감이다.
모처럼 바람의 향방은 가끔 불투명할지라도 화자(persona)인 그 자신이 ‘깊은 가을의 여러해살이풀’인 해국(海菊)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달빛에 젖는 그 형상(形狀)은/정녕 모를 일이다.(해국)”의 그 일면도 그렇거니와 붓꽃의 꽃말이 비 내린 뒤의 무지개처럼 ‘기쁜 소식’이듯 “너무 정(情)겹고 싱그러워서/가슴 설렘의 충격(衝擊) 놀랍다.(붓꽃)”에서 그 감성은 따뜻하고 다감하다. 따라서 경건한 생명 외경심을 충직하게 지켜내며 전율 같은 가슴 떨림에 의한 시적 작위(作爲) 또한 아득한 유년의 동기부여로 칙칙한 어둠의 그늘마저 말끔 걷어내기에 비교적 순결함을 지극선(至極善)에 담아낸 일면이 특이하다. 따라서 그 자신의 대다수 시편은 응축성이 다소 풀어져 느슨한 시적 감응을 불러줄 것이나 ‘미적 세계의 창조’라는 고정관념을 고집하지 아니하면서도 시적 상상력을 인자(因子)로 한 연유로, 체험의 정체성에 의해 시흥(詩興)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이처럼 김은심 시인의 ‘정감과 느낌, 그리고 육성’이 푸른 식물성 기표와 이미지의 형상화로 연유한 공감각적인 창조물은 충직한 독자에게 거리감이나 경계심을 허락하지 않기에 호흡을 가다듬고 응시할 바다.
3. 맑은 영혼의 감응과 부부의 하모니
그간에 평자가 오랜 날 역설하였듯 필립 라아킨이 “시란 맑은 정신의 문제,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는 시론과 전통적 질료를 보편적 정서와 소우주의 표징으로 접합시켜 중량감을 안겨줄 생명적이고 담백한 격조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거부감이 없다. 따라서 “이 시집은 배우 이선균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우리 사회의 책임을 통감하며 애석하고 그립고 아픈 마음으로 썼음을 고백한다.”라는 정겨운 부부 시인의 시집의 서문 격(格)인「시인의 말」은 암담한 심사(心事)에 가늠된다.
일단 애써 불교의「동종선근설(同種善根說)」에서 ‘부부의 연은 8천겁(劫)을 걸쳐 맺어진 인연임’을 기술하고 있음에 애써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이며 희귀보석 및 운석수집가(박성진), 분당 씨앗 보석 대표(김은심)인 부부 시인의 그 일면으로, 동시대에 함께했던 국제적 유명 영화배우의 비극적인 종말 앞에서 “빛나는 순간 절정에서 생의 끝이 되었다. 누가 이 큰 별을 위로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 앞에서 드려진 처연한 추모사로『안녕 나의 사랑, 나의 아저씨-故평 이선균 배우의 죽음을 애도하며(문학바탕, 2024)』또한「바람꽃의 감응(感應)과 인연의 매듭 – 삶의 정한(情恨)과 아득한 정신풍경화」는 못내 허망하다. 그렇다. 죽음과 삶의 엄숙한 교차로, 순환과 재생의 과정에서 빛남과 눈부심의 징표인 꽃(花)은, 생명현상의 사유를 함축적으로 발화시킨 코아(岩芯)의 결합이다.
특히 이 시집 편집의 구도처리는 결(結) 고운 옷감처럼 4부(1부-3부(박성진의 시 45편), 4부(김은성의 시 16편)로 비교적 섬세하게 직조되어 밤하늘의 빛나는 성좌처럼 “갑옷을 입고 긴 칼을 차고/완전무장하여야/걸을 수 있는/그 붉은 카펫은/제2의 황금종려상으로/그대들을 안내한다.(별 하나)”의 보기로 확증되고 있다. 그 일순간의 몽환은 끝내 허망함일지라도 “한껏 뛰어놀아야 할 멋진 세상/갈기갈기 찢기우고/울음조차 울 수 없어//혼자서 그렇게도 외롭게 가시었소?/작은 것에도 울고 웃던/착한 사람아(별이된 이선균)”의 그 애틋함은 못내 눈물겹다. 특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편목) 경력의 소유자로 독실한 신앙인인 박성진 시인의 경우, “비둘기 한 마리 종려나무 가지/입에 물었다. 부챗살을 편 듯/아름다운 종려나무 잎/입에 물고 당황스러운 비둘기 한 마리(절창은 닫혀있고)”를 통해 시적 분위기가 절감되듯 비록 종려나무(예수그리스도의 상징)나 성령의 비둘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절창이 닫혀있는 현실 정황’은 더없이 안쓰럽다.
각론하고 제4부 김은심 시인의 시편으로 이어지는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만큼이나 또 그렇게 망연(茫然)한 몸짓으로 “가지 말라고 하여도/홀연히 떠나가고/붙잡아도/떠날 사람이었을까?(홀연히 떠나가고)”의 보기도 놀랍거니와 황망히 자신의 삶을 마감한 영혼 앞에서 “그대의 굳건한 발 위를 지나갈 뿐/흔들리지 않는 바람되어/그대의 빛나는 종려의 바람을/안고 서 있다.(흔들리지 않는 바람)”도 그렇거니와 “바람은 서 있을 수 없는 바람되어/그대의 바람 날려 버렸다.(서 있을 수 없는 바람 되어)”에 잇닿은 천상의 층계 오르기로 끝내 그 자신의 순결한 시심(詩心)은 다함 없는 추모의 정을, 꽃말이 ‘순수, 우아한 자태’인 구절초를 지상의 꽃으로 피워내 저토록 “순백의 꽃 구절초/찬 서리에 달랑달랑/겨우 붙은 목숨/찬 서리 맞은 꽃은 슬프다.(하얀 꽃)”의 느꺼움은 이채로워 다감하다.
결론적으로 지극선(至極善)의 심성과 담백한 품격의 소유자로 타자에 대한 지극한 심성이 돋보이는「맑은 영혼의 감응과 부부의 하모니」를 합리적 해법으로 풀어낸 시적 이미지의 엄격한 통제성과 즉물적 현상에 있어 ‘당위성, 그 모순에 대한 사유’는 새삼 친밀하기에 여백의 틈새를 허락하지 않는다. 또 한편 그간에 발표한 박성진, 김은심 부부 시인의 일체감을 지닌 공감대야말로 내면적 성찰을 통한 체험과 일맥상통하기에,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과 행복한 집짓기로 해명되는 시 정신은 식물성 언어에서 비롯된 황홀한 충만감이다. 모쪼록 시적 의미망을 확장하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최선을 다하라.’라는 따뜻한 조언을 거듭 강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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