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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따마(고타마) 싯다르타는 언제 침략을 당해 무너질지 모르는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꼬살라국의 지배를 당하는 속국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사색에 잠기던 고따마는 한 나라의 왕자이기 때문에 더욱 더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에 민감했습니다. 미래의 불안은 자신의 장래를 좌우하는 일입니다.
왕자는 세상의 고통과 혼란에 대해 고민하다 마침내 집을 떠나 구도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 장차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리라 기대했던 아들이 집을 떠나자 부모는 물론 주위 친척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야밤에 몰래 나온 것이 아니라 부모와 일가친척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왕궁을 나섰습니다.
"나는 그때 나이 젊은 청년으로서 맑고 깨끗하고 새까만 머리에 한창 나이인 29세였다. 그때 한없이 즐겁게 유희하고, 화려하게 장식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나는 그때 부모님이 울부짖고 여러 친척들이 좋아하지 않았지만,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했다."
- 중아함경 제56권 <라마경> 동국역경원 (요약)
"내가 나중에 젊은 청년이 되어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다복하고 혈기왕성한 인생의 청춘에 이르렀으나, 부모를 즐겁게 하지 않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가운데,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츨가했다."
- 밋지마니까야(전재성 역) 1-3 비유법의 품.<고귀한 구함의 경>
이때는 이미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전쟁이 횡행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피해는 모두 농민과 하층민에게 돌아갑니다. 사회의 질서를 이끌어가던 기존 종교(바라문)는 현실의 혼란을 외면했습니다. 일부 종교가들은 왕에게 접근해 제사를 지내주며 전쟁을 부추기고, 전리품에 눈독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제사의 규모가 클수록 바라문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컸으니, 제사는 점차 화려해지고 희생되는 짐승의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이 큰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5백 마리의 큰 황소와 5백 마리의 수소와 5백 마리의 암소와 5백 마리의 산양과 5백 마리의 양들이 제사를 위해 기둥에 묶여 있었다. 또한 왕의 노예와 심부름꾼과 하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짐승을 도살할 것을 두려워하여, 공포에 떨며 슬픈 얼굴로 울면서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쌍윳따니까야(전재성 역) 3:9(1-9) <제사의 경> 일부 인용
현실에 실망한 지성들은 기존의 종교를 거부하고 집을 떠나 머리를 깎고 무소유와 불살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따마도 왕궁을 떠나 이런 사람들(사문 沙門 sramana)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부처님이 살던 당시 인도에서는 현실의 고통이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주로 전통종교를 지켜온 바라문들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비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명상을 하거나, 신체적 학대를 통해 미움과 폭력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고행주의자이거나, 또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자였습니다.
고통이 전생의 악업에서 왔다고 보는 바라문들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안전을 위해 땅이나 재물을 기부하도록 부추겼습니다. 특히 땅을 보시하면 큰 복을 얻는다고 말해 많은 토지를 챙겼습니다. 바라문들은 기부행사를 장엄하게 만들기 위해 제사의 규모와 형식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주문도 이때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에 반해 고행주위자들은 신체적 학대를 얼마나 가혹하게 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정화가 좌우된다고 믿어 다양하게 고통을 경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오래 동안 밥을 굶거나 더위나 추위에 알몸으로 지내는 등 고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전통적인 도덕을 거부하고, 논리적인 모순을 이용하여 지식의 의미를 부정하였습니다. 이들은 급기야 도덕적 인과마저 거부하게 됩니다. 2차대전과 베트남 전쟁 이후 서구의 젊은이들이 전쟁을 거부하고 기존 사회의 편입마저 거부하며 히피(그들은 머리를 길렀지요)가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집을 나선 고따마는 스승(알랄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을 차례로 찾아 먼저 선정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며 목격한 그들의 삶을 보고는 실망했습니다. 스승들은 선정에 들어 있을 때는 번뇌를 여의는 듯 했지만, 실제 삶속에서는 여전히 분노와 교만이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선정의 스승들은 수행이 뛰어난 고따마에게 함께 대중을 지도하자고 제안했지만, 청년 고따마는 단호하게 이들을 떠났습니다.
어느 때 꼬살라국 빠세나디(파사왕)왕과 부처님이 함께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여러 명의 고행자가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수행에 전념하여 겉모습만 보아도 머리를 숙이게 할 만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합장하며 경의를 표한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에게 저 사람들이 참된 수행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가려 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젊은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청정한가 하는 것은 같이 대화를 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대화를 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흔들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같이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재난을 만났을 때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지혜가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논의를 함으로써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 주의가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
- 쌍윳따니까야(전재성 역) 3:11(2-1) <일곱 명의 결발행자의 경> (요약)
부처님의 말은 당시 선정의 스승을 따라 수행을 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망한 고따마는 고행자의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나는 하루에 한 번 식사를 했고, 이틀에 한 번 식사를 했고, 사흘에 한 번 식사를 했고, 칠 일에 한 번, 나아가 보름에 한 번 식사를 했다. 나는 숲 속의 나무뿌리나 열매로 연명을 하였다. 나는 한 겨울 차가운 밤 서리가 내릴 때면 노천에서 밤을 지새우고, 숲에서 낮을 보냈다. 뜨거운 여름의 마지막 밤에는 노천에서 낮을 보내고 숲에서 밤을 보냈다. 나는 죽은 자의 뼈를 베개 삼아 무덤가에서 잤다. 소치는 아이들이 다가와 내게 침을 뱉고 오줌을 싸고 나의 귀에 막대기를 넣었다. 나는 하루 한 개의 열매를 먹었다. 그러자 나의 머리 가죽은 주름져 시들고, 나의 창자는 등에 붙어버려 창자를 만지면 등뼈와 만났고, 등뼈를 만지면 창자와 만났다.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는 똥이나 오줌을 누려 하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고행의 실천으로도 인간을 뛰어넘는 법, 고귀한 이들이 갖추어야 할 탁월한 앎과 봄을 성취하지 못했다.”
-맛지마니까야 12 ‘사자후에 대한 큰 경’, 전재성 역(요약)
고따마는 이들의 한계를 경험하고 설산을 떠나 스스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에 이릅니다. 고따마가 고행을 포기하자 함께 수행하던 고행자들은 '타락한 수행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함께 고행을 닦던 옛 수행자들을 찾아 녹야원에 갔을 때, 그들(다섯 명의 고행자, 5비구)은 부처님을 이렇게 모욕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사문 고따마가 온다. 그는 욕심이 많고 구하는 것이 많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쌀밥, 보릿가루․우유죽․꿀을 먹고, 삼씨기름을 몸에 바른다. 지금 그가 다시 오고 있으나, 우리들은 아예 일어나 맞이하지도 말고, 또한 예도 올리지 말며, 미리 자리를 준비하여 앉기를 청하지도 말자. 그리고 그가 오거든 그대가 앉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자.”
그들은 부처님에게 말했다.
“그대 고따마여, 그대는 이전에 그러한 행과 그러한 도의 자취와 그러한 고행을 하고서도 오히려 사람의 법을 벗어난 지극히 거룩한 앎과 소견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물며 욕심이 많고 구하는 것이 많아 맛있는 음식과 좋은 쌀밥 보릿가루 우유죽 꿀을 먹으며 삼씨기름을 몸에 바르는 오늘에 있어서이겠는가?”
- 중아함경 제56권 ‘라마경’, 동국역경원
고행자들은 부처님을 그냥 고따마라고 하대해서 부릅니다. 쌀밥 우유죽을 먹는다는 말은 부처님이 고행을 중단하고 수자타에게서 우유죽을 얻어 먹은 일을 욕한 것입니다. 설산을 떠난 부처님은 바람이 시원하여 사색하기에 적당하고 인근에 마을이 있어서 탁발하기 좋은 네란자라 강가에 자리를 정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고행자들의 입장에서는 네란자라 강가에서 머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타락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극한적인 고행을 한 부처님으로서는 고행자로서도 존경을 받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자신에게 어떤 깨달음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세상을 살수록 이런 결단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감합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자기의 수행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수행자에게 자부심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부심은 자칫 자기가 속한 단체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나 충성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단체에 비리가 있거나 수행현실에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해도 눈을 감습니다. 단체에서 누리는 기득권은 이처럼 수행자에게는 큰 유혹이요, 독입니다.
바라문들의 위선과 고행자들의 허구를 통찰한 부처님은 세 가지 관념(견해)을 버릴 수 있어야 진정한 수행자(성인 聖人)의 대열에 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교에 귀의하여 처음 얻는 성과(聖果)를 교리적으로는 수다원(입류 入流, 성인의 반열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수다원과를 얻기 위해 버려야 할 세 가지 견해는, 1) 규범과 금계(금기, 터부)에 대한 집착(계금취견 戒禁取見), 2) 몸속에 자아가 있다는 생각(유신견 有身見), 그리고 3) 매사를 의심하는 회의(매사의 의심 疑)입니다.
수다원과는 단순히 수행의 단계로 이해하기보다, 당시 바라문이나 유행자들의 가르침을 버리고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귀의하는 첫 결단으로 보아야 그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몇 겁을 닦아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외도의 견해를 버리는 결단을 통해 얻어집니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와 팔정도 등 부처님의 가르침은 위 세 가지 견해를 버리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에 살면서 술을 먹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재가신도를 부처님이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한 것도 그 한 예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우리 불교에도 부처님이 경계하던 세 가지 견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합리한 권위, 맹목적인 고행과 기복의식,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신비한 힘에 의지하는 태도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유로운 지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고따마는 탐욕과 분노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 스스로 깨달은 사람(붓다)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성찰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 스승을 찾아 선정과 고행을 닦으면서도, 맑고 투명한 지성(知性)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했던 부처님은 교만, 권위, 맹목적 추종과 신비주위에 빠지기 쉬운 오늘 우리에게 수행의 기본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여운 2016.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