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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부터 4살 때 까지의 기억은 없다.
4살 때였을 거다.
여름에 커다란 빨간 고무대야에 물을 반쯤 받아 그 안에서 물놀이를 하고 엄마는 옆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같다.
포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5~6살 때 중앙 어린이 집이라는 곳에 다녔던 것은 기억난다.
장은우라는 아이와 같이 다녔고 그 아이랑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같이 놀았다.
7살 때 엄마가 근무 중인 철원초등학교에 있는 병설 유치원에 다녔다.
이효성이라는 남자아이와 장은우(이하 은우)와 별별 놀이를 했다.
주로 블록으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동물들을 흉내 내며 놀았다.
8살 때 학교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윤영란 선생님이셨다
정말 온화하시고 아이들을 정말 아이들로 바라봐주시는 분이셨다.
집(학교 관사였다.) 양쪽에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까마귀가 한 마리씩 까악까악대서 그걸로 그냥 중얼중얼했는데 엄마가 시로 써보자고해서 쓴 시가 금상을 받고 학교 신문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9살 때 생일 선물로 탑블레이드라는 팽이를 받았다.
정말 좋아했다.
작은외삼촌이 오셔서 큰외삼촌이 만든 게임테스트를 해야 된다며 같이 피시방을 가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재미있는 게임은 찾기 힘들 것 같다.
학교에서 자습시간에 메이플스토리 만화책을 보고 있었는데 다른 애들이 시끄러웠다는 이유로 발바닥 10대를 맞았다.
내가 한 일이 아닌데 그 무리에 속해있다는 것만으로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것이 억울했다.
그래도 학교는 좋았다.
비 올 때는 안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맑을 때는 딱지치기를 하거나 5학년 형들과 축구를 했다.
형들은 주로 나를 골키퍼로만 새워놨다.
엄마랑 아빠가 이혼한 것도 2학년이였다.
나보고 밖에서 잠시 혼자 놀고 있으라고 해놓고 두 분이 안방에서 심각한 예기를 했다.
딱히 싸우거나 울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누런 서류봉투를 놓고 예기를 했을 뿐이였다.
그래도 원래 아빠는 2주에 한 번꼴로 만났으니까 별 상관이 없었다. 사실 이혼한 줄도 몰랐다.
10살
놀려고 밖에 나왔는데 한쪽 발이 없는 고양이 한마리가 있었다.
그 고양이한테 우유랑 멸치를 줬다.
그 뒤로 2일에 한번꼴로 집으로 찾아왔다.
그래서 이름을 '삼발이'라고 지어주고 매우 아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비오는 날이면 내방 뒤쪽에서 고양이 소리가 났다.
또 2주정도 지나고 나니 더이상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친구랑 부메랑 던지며 놀다가 집 뒤쪽에 떨어져서 찾으러 갔다.
우리집과 옆집 담 사이에 철조망이 조그맣게 있었다.
그 철조망에 비에 젖고 살은 다 썩어버린 고양이 가죽이 걸려있었다.
정말 끔찍한 장면이였다.
11살
친아빠의 엄마 즉,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날짜상으로는 10살인지 11살인지 12월 25일에 엄마가 지금 아빠랑 재혼하셨다.
그 뒤로 외할머니께서 나보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고 강요했다.
아빠라고 한번 부르기 시작하니 쉽긴 했지만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그래도 어색했다.
이때부터 강요에 대한 엄청난 거부반응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현곡께서 글 쓰라고 말이라도 꺼내시면 이틀 동안 설사를 해대니 말이다.
12살, 5학년 때 친구와 크게 다투고 한동안 친구가 없었다.
교실 안에서 외톨이가 된 그 기분은 정말 비참했다.
그래서 엄마랑 예기했더니 둘이 화해시키고 선생님께도 찾아가서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까지 하러 갔었다.
그리고 나에게 제일 큰 사건인 동생이 태어났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독차지하고 있던 가족들의 사랑을 한순간에 빼았아 가버린 존재였다.
엄마는 아기에게서 한시도 안 떨어지고 있어서 약간의 탈선을 했다.
피아노학원에 가야 할 시간에 그 옆에 있는 마트에 비치된 오락기에서 죽치고 게임을 하다가 할머니께 잡혀서 들어가고
친구들이랑 놀다온다고 해놓고 피시방에서 10시까지 게임하다가 또 할머니께 붙잡혀 들어가서 매를 맞고의 반복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고도 할머니께 몹시 죄송할 일이었다.
이때부터 게임이 인생의 도피처가 되었다.
아! 애들이랑 놀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조금 지나서 자전거 타고 빠른 속도로 집에 가던 중에 골목길에서 나온 무소(차종)와 부딪혔다.
운전자분께서 놀라서 괜찮으냐고 물어보시고 빨리 병원 가자고 차에 타라고 하셨다.
그때 당시에 어린이 유괴사건이 한창 뉴스에 많이 나오던 때라 학교에서 유괴방지 교육을 받았다.
낮선 사람 차에 타지 말 것!!!
그 생각이 나서 괜찮다고 말하고 빨리 가봐야 한다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에 도착해서 왜 이렇게 늦었냐고 꾸중을 들어서 오다가 교통사고 났다고 상황까지 다 말했다.
돌아오는 말의 첫 번째는 걱정이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지, 그 사람 인상착의는 어땠는지, 번호판은 기억나는지, 연락처는 받았는지
다친 곳은 왼쪽 무릎, 오른쪽 옆구리, 오른쪽 팔꿈치, 왼쪽 코 위에 찰과상, 인상착의는 그때는 기억났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번호판은 모름, 연락처는 빨리 오느라 못 받았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고 잘했다고 하셨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교통사고 나면 병원부터 가라고 하셨다.
외할머니께서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으셔서 병문안을 갔다.
할머니자리에 가보니 음료수 한 박스가 있어서 엄마가 이거 차에 좀 넣어놓으라고 하셨다.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팔에 문신을 한 남자 2명이 따라서 탔다.
내려가는 도중에 '꼬마야 음료수가 맛있어 보이는데 삼촌한테 하나만 주지 않을래?'라고 말하면서 내 엉덩이를 계속 만졌다.
기분이 더러웠다.주차장에 갔다가 올라와서 엄마한테 갔더니 화를 내시면서 나를 끌고 안내데스크로 갔다.
여기 CCTV좀 보자고 애가 지금 성추행을 당했다고
돌아오는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여기 CCTV없는데요
이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다음 날 병원 전 구역에 CCTV가 설치되었다는 뒷이야기...
앞에서 말한 친구가 오두현이라는 아이인데 다문화 가정이었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다.
하지만 친구 관계에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랴 그 친구랑 철원에서 떠날 때까지 같이 잘 놀았다.
내가 탁구를 배우고 싶었다고 할 때 엄마가 같이 신청해 주셨고 금액 부담도 다 엄마가 하셨다.
그만큼 엄마의 사랑이 차고 넘쳤다는 것을 이제 와서 느낀다.
13살
진심으로 선생님을 만났다고 느꼈다.
애들을 대할때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봐 주셨고 고민이 있을 때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조언을 주셨다.
키자니아라는 직업 박람회를 갔다.
이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무엇을 하고싶으냐고 물어보셨다.
제과제빵 코너에 갔는데 그때 나는 이미 골격이 잡혔고 그곳에서 알바하는 누나가 나를 보고 흠칫했다.
것 모습만 보고 무서워한다니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더 상처를 받았었다.
담임선생님이 베이스 기타를 치셨다.
멋있다고 느꼈다.
앞에 있던 선생님들은 자신의 취미는 공개하지 않으셨지만 6학년 담임선생님은 때때로 쉬는 시간에 연주하셨다.
교무님 아빠가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이 너무좋아서 기타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14살
중학교에 들어가서 첫 시험을 봤다.
평균 60점대로 기억한다.
초등학생 때 90점 미만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기에 나에게 너무나도 실망했다.
점수를 잘 받으면 잘 받을수록 칭찬을 들었었기에 더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두려웠다.
그래도 엄마는 격려를 해주셨지만, 그것에 만족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공부했다.
그렇게 성적은 조금씩 올랐고 전교 9등까지 해봤다.
10등 안에 들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그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 또 공부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생은 공부하고 게임하고의 반복이였다.
그나마 변화가 있었던 것이 학기 중에 음악 선생님이 강원도 연주경연대회가 있어서 한번 나가보라고 하셨다.
종목이 클래식 기타연주였다.
나는 첫 연주였고 당연스럽게 실수를 했다.
내 차례가 끝나고 분위기는 싸늘했다.
다음 차례부터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것을 보다가 더이상 볼 수가 없어서 나왔다.
나와보니 같이 간 친구도 나와있었다.
친구도 실수했다고 했다.
그나마 안심을 느꼈다.
15살
엄마의 철원에서의 교사생활이 끝나서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게 원주다.
철원에 있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매우 아쉬웠다.
2월달이었나? 원주로 이사를 하고 전학도 했다.
원주중학교가 학구가 제일 좋은 곳이라고 해서 그곳 교장 선생님이 할머니의 친척분이라 교장 선생님 추천으로 쉽게 들어갔다.
1학년 마칠 때라 애들이랑 많이 친해질 시간은 없이 학교 가면 친구들이랑 게임 예기밖에 할 게 없었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시험을 보고 또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다.
철원보다는 도시여서인지, 아니면 애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높아서인지 어려웠다.
공부와 게임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담임선생님이 이쁘셨다. 가르치는 과목이 일본어였다
방과 후에 일본어 수업을 듣는데 어떤 학생이 담임쌤께 선물을 드리고 도망쳤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애들의 텃세가 심하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딱히 공감대가 없어서 게임하는 애들 3명이랑 친해졌는데 그 구조가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은 웃기다.
이수성이란 애는 리더쉽이 강했고 다혈질이었다.
원준희라는 애는 수성이를 잘 따랐고 오른팔 같은 느낌이었다.
이민규라는 애는 제일 멍청하고 제일 둔해도 부하 같은 느낌으로 같이 다녔다.
그 당시 나는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것만으로 민규보다 밑에 있었다.
점심시간에 술래잡기해도 나를 술래 시켜놓고 다 사라져 버리고 나는 열심히 찾다가 수업 종이 치면 들어갔다.
교실에 가면 넌 뭐하다 이제 오냐면서 딴청을 피웠다.
그렇다.
중 2때만 해도 은따(숨은왕따)였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일지 몰라도 거의 확실했다.
버티고 버텨서 2학년을 마쳤다.
16살
3학년이 되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이 몇 없었다.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며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이번 애들이 2학년때 애들보다 더 심하면 어떡하지?
그 생각은 기우였다.
애들과 매우 빠르게 친해졌고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애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3학년이 되면서 내가 한 것은 애들한테 맞추지 말고 내 삶을 잘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집>학교>학원>피씨방>집
계속 이렇게 살았지만 학교와 학원에서 워낙 재미있었기 때문에 별로 큰 지장이 없었다.
학교에 가면 8시 30분까지 애들과 폰게임을 하면서 있었고
점심시간만 되면 밥 먹고 체육관에서 배드민턴만 주구장창 했다.
그냥 삶의 낙이 배드민턴이였다.
체육 시간에 민턴 수업이 있으면 매우 좋아했고 방과 후에도 계속 체육관에 있었다.
주말만 되면 친구들을 불러서 시립체육관에 모여서 6시간씩 운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결과는 학교 내 대회에서 1등은 가볍게 했다.
정말 16살에는 배드민턴으로 꽉 찬 1년을 보냈다.
17살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봄방학이 끝나고 고등학교 배정표를 봤다.
진광고등학교라는 곳이다.
하필이면 집에서 제일 먼 곳에 떨어졌다.
친했던 친구들 대부분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서 앞으로의 걱정이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식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지루했다.
왜 그랬던 걸까
새로운 환경으로 가는 것은 흥미진진해 마땅할 텐데 말이다.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생활에서 한 과정이 빠진 것뿐이고 집에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져 갔다.
집>학교>학원>집
6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와 학원의 전날 못한 숙제를 했다.
7시 14분에 스쿨버스를 타고 가며 잤다.
8시쯤 학교에 도착하면 폰을걷고 수업 시작
국어 시간은 정말 지루 그 자체였다.
그저 교과서에 있는 지문을 선생님이 다 읽다시피 하셨는데 지문을 다 읽으면 수업이 끝났다.
수학 시간은 학원에서 이미 다 배운 것이였지만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그나마 성실하게 들었다.
사회 시간은 선생님이 이쁘셔서 쌤 얼굴만 보며 시간을 때웠다.
과학 시간은 일단 수업이 재미있기도 했으면서 졸면 주먹으로 맞았기 때문에 애들 맞는 것조차 재미있게 봤다.
영어 시간은 선생님이 할아버지셨는데 워낙 재미있게 하셨다.
수업시간마다 팝송을 하나씩 외우게 하셔서 그것 또한 재미있었다.
미술 시간은 수행평가 아니면 잤다.
음악 시간은 없었다.
2학년 때 한다고 했다.
체육 시간은 그냥 그저 그랬다.
축구 아니면 농구를 했다.
한국사 시간은 수녀님이 하셨다.
이 학교는 가톨릭 재단에서 만들어진 사립학교라 1년에 2번 정도 학생 전체가 참여하는 미사를 한다.
그래서 신부님, 수녀님이 계셨고 한국사시간은 재미있었다.
철학 시간이 있었다.
신부님이 수업하셨고 열심히 재미있게 들었지만,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나서는 공부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취미 생활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토록 좋아했던 배드민턴과 게임을 못하게 되었고 건강 또한 악화되어갔다.
그 와중에 엄마는 나에게 장래희망에 대해 지속적으로 물어보셨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기에 질문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없던 스트레스성 장염이 생겼고 심해졌다.
1학년 과정이 끝나갈 때쯤 엄마가 대안학교는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무슨 대안학교에요 거기 사고친애들이나 가는 곳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던 도중 엄마가 '소소'라는 작은 한식 뷔페에서 밥을 먹자고 하셔서 갔다.
가자마자 그곳 사장님 남편분과 인사를 했다.
엄마 학교 방과 후 강사님이라고 하셨다.
엄마랑 몇 마디 나누시고는 나한테 "기타 좀 칠 줄 안다며? 한번 쳐봐" 하고는 직원분을 물러서 기타를 가져오게 했다.
나는 튜닝해야한다면서 좀 오래걸린다고했더니 그냥한번 쳐보라고 하셨다.
그냥 쳤다.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는 그런 노래가 아닌 것을 연주했다.
몇 마디 연주하지도 않았는데 "됐다. 공연해" 이러시더라.
딱히 거부권이 없어 보였다.
공연 날이 돼서 갔더니 '코드 다섯 개'라는 팀이 있었다.
내가 공연 오프닝을 맡게 되었고 성공적으로 연주했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부모님께 가서 남은 공연을 보는 도중 '사과꽃'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열매 맺으려 애쓰지 마라
꽃 속에 열매가 있다.
그대
꽃다운 나이
내일 걱정으로 시들지 마라
오늘 꽃으로 피어나면
그 꽃 속에 열매 있나니
족하다
그대
꽃 피는 봄날이여
들으면서 그저 펑펑 울었다.
고1이 될 때까지 그렇게 운 것은 태어날 때 빼고는 처음이었다.
나는 항상 무슨 일이든 잘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매우 노력하며 살아왔다.
매일 3시간씩 자며 공부하고 어른들 말씀은 항상 잘 들어야 하며 규칙은 무조건 지켜야 되고 내가 하는 일은 100% 성공적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노래 한마디에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면서도 속이 시원해졌다.
겨울방학이 되고 나는 도저히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힘이 부쳤다.
겨울방학에는 강제적인 보충학습이 있었는데 집에는 7시에 나오면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하며 선생님께는 손목에 부상을 입어서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가야 된다고 했다.
모든 조치는 취해졌다.
그렇게 7시부터 5시까지 피시방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공부해야 되는데 등 우울증일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다.
어느 날 저녁에 엄마랑 또다시 장래희망에 관해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가 엄마가 이 글 한 번만 읽어보라고 하시면서 핸드폰을 내미셨다.
그 글의 시작에는 한 남자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 밑에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웃고 있는 그 표정만이 생각났다.
엄마가 "너만 괜찮다면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번 가보자."하셨다.
그래서 삼무곡에 와봤다.
애들은 정말 자유분방하게 잘 놀았다.
그 애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현곡의 한마디가 나를 삼무곡으로 이끌었다.
"자유로운 학교다."
나는 '자유'라는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삼무곡에 오기 전까지 다 쓰고 보니 모든 상황이 재미있는 상황밖에 없었다는 것을 느낀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 버틸 상황이라도 그 상황 또한 내 인생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 힘든 상황들도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내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을...
제일 중요한 것은 엄마가, 모두가 내가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조언들도 나를 사랑하기에 했던 것이라는 것도 느껴진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있었던 성추행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건조차도 내 기억의 왜곡이 있었을지 모른다.
정말 귀여워서 궁디툭툭을 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이거 하나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