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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 뇌물을 전달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데, 이처럼 뇌물을 주는 행위를 관용적으로 ‘인정 쓴다’라고 표현을 했다. 사람이 지닌 감정을 의미하는 ‘인정(人情)’이란 단어가 뇌물을 좋은 의미로 포장하는데 사용된 셈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인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사람들 사이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특히 민원인이나 하급의 관리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물건을 건네거나 향응을 베푸는 것을 ‘상납(上納)’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마저도 그저 ‘사람사이의 정(인정)’이라는 표현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체로 뇌물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준 사람에게 더 큰 대가로 돌려주는 것이 보편적이었기에, 본래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근래에도 이러한 관행이 이어지고 있기에, ‘청탁금지법’을 제정하여 일정 금액 이상의 물건이나 향응은 법 위반으로 명시하고 있다. 과연 ‘뇌물’과 ‘인정’을 일정 금액으로 한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는 하나, 법으로까지 규정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사회적 관습으로 용인되었던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조말생 뇌물사건의 재구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는, 아버지인 태종 때부터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조말생이라는 인물에 대한 탄핵 상소로 세종과 대신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과 사건의 경과에 대해 다루고 있다. 누군가의 청탁을 받아 노비를 수십 명 증여받았다는 내용으로, 고위 관료인 조말생이 받은 뇌물은 당시의 법률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로 밝혀졌다. 지금과 달리 왕조시대인 조선에서는 형벌의 최종적인 결정권자가 왕이었기에, 세종은 원칙대로 사형에 처하라는 대신들의 주장에 맞서 유배형을 내리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왕의 결정을 법 규정에 맞도록 바로잡기 위해 직언을 하는 대간(臺諫)들의 비판에 직먼하였지만, 세종은 끝내 자신의 의지를 꺽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의 개요로만 보자면, 조말생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은 ‘법치를 거스른 세종의 인사’로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세종 당시 남쪽의 왜군과 북방의 이민족들의 영토 침범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에 주목하고 있다. 태종 당시 병조판서로 재임하면서 대마도 정벌을 수행한 경력이 있었기에, 세종은 유배가 끝난 조말생에게 다시 직첩을 주어 태조 이성계의 근거지인 함길도(함경도) 지역의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결정을 북방의 경계 지역인 ‘사군(四郡)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영토 확장에 대한 포부가 컸던 세종의 ‘자주 국방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말생을 활용하기 위한 ‘실리주의’로 평가하고 있다.
조말생의 부패사건에 대해 원칙적인 법 적용을 주장하는 대간들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따라 원칙과 달리 적용할 수 있다는 ‘권도(權道)’를 내세우며 세종은 끝내 유배형으로 마무리하였다. 더욱이 세종에 의해 다시 고위 관직에 오르며 승승장구했던 조말생이 이전의 뇌물사건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자, 세종은 애써 그의 주장을 무시하였다고 한다. 평균 수명이 길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나이 70살이 넘은 신하들에게 왕이 측별한 의자(几)와 지팡이(杖)를 하사하는 궤장연(几杖宴)을 베풀어주었다. 70살을 맞은 조말생에게도 세종은 궤장연을 베풀어 그의 능력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조말생 역시 ‘국가에 공로가 있어 두루 존경을 받는 늙은 신하를 예우’하는 대접을 받았지만, 실록 등 역사 기록에서는 ‘옥에 티기 신상의 오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아울러 “당대 및 후세의 조선 사람들은 조정을 송두리째 뒤흔든 조말생 사건을 전형적인 부패이자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았다.” 지금도 중대 범죄를 저지르고 형벌을 받았으나 일정 기간이 지나 복권(復權)이 되면, 마치 자신이 떳떳한 듯 행동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분에 넘친 발언을 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역사는 이를 냉정하게 기록하여, 후세에까지 그 평가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새길 필요가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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