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서원이건기泗陽書院移建記
옛날 철종 갑인년(1854)에 기호 지방 사림이 계룡산 아래 화해사(華海祠)를 건립하여 문정공(文貞公) 불훤재(不諠齋) 신선생(申先生)을 봉안하고 선생의 아들 간재(簡齋) 문간공(文簡公)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배향하였으니, 실로 일국의 공의를 따른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의 금령으로 사당이 훼철되고, 수십 년 후에 또 다시 세웠지만 세상의 변고가 거듭 생겨나고 물력이 탕잔하여 마침내 제향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포은 선생의 위패는 그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 봉안하고, 선생 부자의 위패는 그대로 땅에 묻었다. 그후 영남에 있는 자손들이 영남의 유림과 도모하여 여러 해 동안 계획하여 청송 서쪽 사수(泗水) 가에 터를 살펴서 사당, 강당, 동서 양재(兩齋)를 신축하고 병오년(1966) 봄에 길일을 택하여 선생 부자를 봉안하고 원운곡(元耘谷) 선생을 추향하였다. 서원 이름은 마을 이름을 따라 사양서원(泗陽書院)으로 고치고 사당의 편액은 화해사(華海祠)를 이전대로 사용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불훤재 선생은 세상에 드물게 나는 진유(眞儒)이다. 고려 말의 정치가 혼란한 날을 당하여 일개 벼슬 없는 선비로서 천자의 빈사(賓師) 지위에 있으면서 왕도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를 천하게 여겼으며 중화의 문명으로 오랑캐 풍속을 변화시켰다. 위로는 역동(易東)의 가르침을 받고 아래로는 포은(圃隱)의 학문을 열었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망복(罔僕)의 제현들이 모두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의리(義理)를 강론하여 밝히고 강상(綱常)을 일으켜 세워서 한 모퉁이 동방에 유학의 교화가 크게 행해지고 사문(斯文)의 정맥이 오래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누구의 공인가? 다만 우리 동방만 그러할 뿐 아니라, 명나라의 예악 문물이 2백 년의 아름다운 운을 열었던 것 역시 선생이 앞에서 인도한 힘이었으니, 훌륭하도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세도가 험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어 가문이 적몰(籍沒)을 당한 화가 두세 차례 거듭 닥치니, 여러 제자들이 편찬했던 《화해사전(華海師全)》도 아울러 화재를 당하여 깊은 산에 숨겨진 것조차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선생의 자취는 세상에 크게 꺼림을 당한 것이 쓸쓸하게 4백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왔는데, 원운곡(元耘谷)과 범복애(范伏厓)가 지은 선생의 묘지명과 행장이 나왔으니 참으로 믿을 만한 역사이다. 선생의 성대한 덕업이 환하게 다시 밝으니 진시황의 분서 화염이 비록 매서워도 공벽(孔壁)에 간직된 글이 마침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어찌 정기(正氣)가 죽지 않아 천지신명이 사랑하고 보호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성균관으로부터 여러 도의 향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목소리로 찬탄하여 선생의 성대한 덕업을 드러내 밝히고 높여서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 서원을 지어 제향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당시에 이미 사액(賜額)을 청하는 거사와 문묘(文廟)에 배향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국가의 일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마침내 멈추고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서원이 어찌 향선생(鄕先生)이 돌아가신 후 향사(鄕社)에 제향하는 일과 같은 차원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천하가 어지러운 물결에 잠기고 휩싸인 지금 선생이 당시에 만났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니, 어찌하면 선생 같은 분이 일어나 한 손으로 거센 물결을 막아 사람들이 서로 빠지는 것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군음(群陰)이 세도를 막지만 일양(一陽)이 마침내 반드시 회복되고, 무수히 어지러운 말들이 다투어 시끄럽지만 성현의 가르침은 없어질 수 없다. 선비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지 못하고 다만 향사를 드리는 허례만 숭상하는 것은 자못 서원을 설립한 본의가 아니고 또한 시의에도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선생을 높여서 향사하는 것은 곧 공자의 도를 높이는 것이고, 공자의 도는 마땅히 천지와 더불어 함께 무궁할 것이니, 다만 이 서원으로써 항상 선생을 사모하는 장소로 삼아 존양(存羊)의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옛날의 예법에 집착하여 지금의 시의에 어긋난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천추에 반드시 돌아오는 것은 천리의 상도이니,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하늘이 잊지 않을 것이다.[千秋必返 理之常也 弟子好學 天不忘也]”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함께 힘쓸 바가 아니겠는가?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문정공(文貞公) 불훤재(不諠齋) 신선생(申先生) : 신현(申贒, 1298∼1377)을 말한다. 자는 신경(信敬), 호는 운월재(雲月齋)·불훤재(不諠齋),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의 문인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학문을 전해 주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원운곡(元耘谷) 선생 : 고려 말의 은사 원천석(元天錫, 1330∼?)을 말한다.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고려 말의 정치가 혼란함을 보고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일찍이 조선 태종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쳤는데, 태종이 즉위하여 기용하고자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망복(罔僕) : 망국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으려는 의리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하려 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夏書 微子》
《화해사전(華海師全)》 : 고려 말의 학자 신현(申賢, 1298∼1377)의 학문과 언행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신현의 문인 정몽주(鄭夢周)가 원천석(元天錫)에게 전해 원천석과 범세동(范世東)이 편집해 간행하려 했으나, 고려 말 어지러운 상황 속에 간행을 보지 못하였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그 후손 또한 몰락해 원(元), 범(范), 공(孔) 삼가(三家)에 비장되어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1년 강영직(姜永直)이 군산에서 발견해 원본의 오자 낙서를 바로잡아 편집, 교정하여 비로소 간행하였다.
범복애(范伏厓) : 고려 말의 학자 범세동(范世東)을 말한다.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厓), 본관은 금성(錦城)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69년(공민왕18)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 부윤(德寧府尹), 간의대부 등을 지냈다. 원천석(元天錫, 1330∼?)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편집하고,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을 편찬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가 고향 나주(羅州)로 돌아갔으며, 조선 태종이 여러 번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사후에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벽(孔壁) : 고문(古文) 경서(經書)가 나온 공자의 집 벽을 말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말기에 노공왕(魯恭王)이 공자의 집을 헐어서 그 규모를 넓게 하려 할 때 벽 가운데서《상서》, 《예기》, 《논어》, 《효경》 등 수십 편이 나왔는데 모두 고자(古字)였다.
존양(存羊) : 본질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정한 형식을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