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
이혜연
아랫녘에서 친정어머니 친구 분이 올라오셨다. 오십 년 지기 중의 한 분이시다. 세 분 중 한 분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뜨셨고 한 분은 캐나다로 이민하셨으니, 결국 가까이 남은 유일한 친구인 셈이다. 우리는 그 분을 광주 아주머니라 부른다.
그 분을 맞는 어머니의 모습은 살갑기 그지없다. 이제는 연로해지셔서 문 밖 출입이 예전 같지 않아진 데다 변변한 말상대마저 없는 어머니로서는 그 분의 상경이 어느 피붙이의 방문보다 더 반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제는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나이에 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주머니의 방문이 반갑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를 남겨두고 대문을 나서는 마음이 가벼울 수 있어서다. 아주머니와 나란히 누워 밤새도록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워하는 어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평소 내가 풀어드리지 못한 어머니의 갈증을 대신해 풀어주고 있는 그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곤 한다. 그래서 하루는 짬을 내어 두 분을 모시고 가까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천지엔 봄기운이 넘실거리는데 꽃구경 한 번 시켜 드리지 못했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 싶어서였다.
경기도 광주 쪽에서 올라가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드라이브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숲은 갓 돋아난 어린잎들로 연둣빛 안개를 두른 듯 부드럽고 신비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마냥 즐거워하는 두 분을 룸미러로 훔쳐보며 굽은 길을 막 돌아섰을 때였다. 때늦게 활짝 꽃을 피우고 있는 두 그루의 벚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 꽃 좀 보세요!”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고 바라보던 광주 아주머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매오매, 좋은 거!”
차의 속력을 늦추었다. 뒷유리창 너머로 꽃나무가 사라질 때까지 목을 길게 빼고 보면서 아주머니는 ‘오매오매 좋은 거’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나를 부르셨다.
“어이, 나는 무식헝께 그런디 자네는 글 쓰는 사람잉께 더 좋은 말로 좀 해보소. 나는 ‘오매오매 좋은 거’밖에 모르겄네.”
갑자기 내 머리 속이 부산해졌다. ‘글 쓰는 사람’에 걸맞는 근사한 표현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곧 막막해지고 말았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오매오매 좋은 거’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없네요, 아주머니….”
공들여 쌓아왔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쑥스럽기만 하던 노래방 출입이 자연스러워진 것은 순전히 윤 선배 덕분이었다. 모임 끝에 헤어지기가 아쉬워 미적거리는 문우들을 선배는 으레 노래방으로 잡아끌었다. 귀청을 찢을 듯해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프게 하던 반주음에도 익숙해져 이제는 오히려 그 소음에서 안도감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웬만한 실수쯤은 덮어주고 어설픈 노래 실력도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는 반주음의 마력 때문이다. 처음에는 흥겹게 노래 부르는 선배들을 그저 바라만 보다가 한두 번 마이크를 잡아본 후로 자신감을 얻어 별 두려움 없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도 다 그 기계의 그런 마력 덕분이었다.
노래방 출입이 잦아지면서 익숙해진 것이 또 하나 있다. 소위 뽕짝이라고 하는 트로트 가요다. 노래방 분위기에는 뭐니 뭐니 해도 뽕짝이 제격이다. 프로급의 노래보다는 목청 큰 서투른 노래에 후한 점수를 주는 기계이고 보면, 노래방에서는 노래 솜씨를 자랑하기보다는 함께 어울려 흥겹게 놀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탬버린을 흔들고, 더러는 서투른 스텝도 밟아보며 “언니! 오빠!”를 외치는 파격의 유쾌함을 주기로는 뽕짝이 단연 으뜸이다. 물론 그날 함께 어울린 사람들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분위기에 탄력을 주고 흥을 돋아주기로는 뽕짝만한 게 없지 싶다. 랩송을 흥얼거리는 신세대들도 노래방에서만은 뽕짝을 즐겨 부른다는 것을 보면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뽕짝의 위력을 알 듯도 싶다.
그런데 단지 흥겹자고 즐기던 뽕짝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차츰 내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치하고 진부하게 들리던 가사며 멜로디가 절절하게 다가와 심금을 울린다. ‘눈이라도 마주쳐야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면 ‘이름표를 달아 내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고 싶다가, ‘님 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도로 남이 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그 사람이더라’처럼 지나고 보면 그래도 ‘내 눈물 밟고 갔지만 당신이 최고’로 보이는 것이 사랑의 속성 아니던가. ‘재방송 없는 생방송’이 인생이요, ‘잘나면 잘났지 못나면 못났지 사는 게 행복’인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뽕짝은 현실이다. 우아한 클래식도, 감미로운 크로스 오버 뮤직도, 멜랑콜리한 칸초네․샹송도 환상이요 착각일 뿐. 그저 우리에게는 ‘한 구절 한 고비 꺾어 넘어가면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눈물도 짓는’ 네 박자가 진실이며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점잔을 빼고 내숭을 떨어 봐도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이라든가 ‘봄날은 간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목이 메어오는 것은, 그것이 바로 부정할 수 없는 지금 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인생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공감과 감동일 것이다. 그런데 복잡하고 난해한 것보다는 단순하고 진솔한 것일수록 감동의 폭은 크다. 뽕짝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런 솔직성과 단순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애써 외면하고 부정해보지만 결국은 돌아가게 되는 본질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살아보니 인생은 영락없는 유행가 가사더라는 말도 있듯이, 제아무리 심오한 철학도 기실 그 두터운 껍질을 벗고 나면 한낱 뽕짝의 가사에 다름없는 것 아닐까.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은 시를 써서 지나가는 노파에게 들려주고 이해하지 못하면 고쳐 썼다고 한다. ‘대악필이(大樂必易) 대례필간(大禮必簡)’ 이라 했듯이 예술도 학문도 그 완성은 어쩌면 쉽고 간결한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쉽고 솔직한 것이 모두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며, 구어(口語)와 문어(文語)의 한계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광주 아주머니의 표현을 되새겨보고 뽕짝을 들으면서 나는 요즘 부쩍 문학적 표현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곤 한다. 그리고 내 글들을 돌아본다. 나는 내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얼마나 진실했는가.
그러면서도 노래방을 나서면 여전히 뽕짝을 외면하고, 원고지 앞에 앉으면 더 좋은 표현을 찾는답시고 머릴 싸매고 앉아 시간만 죽이고 있으니, 사고(思考)와 실천 사이의 거리는 내게는 아직도 멀고도 먼 것만 같다.
첫댓글 뽕짝을 잘 부르려면 꺾기를 잘 해야 하는데, ㅋㅋㅋ
그래야 한 곡을 불러도 구성지게 불러볼텐데
그걸 못하니 감히 도전도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