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서 장성할수록 용서와 배려에 대한 마음이 더 필요하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용서와 배려의 마음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나 자신이 점점 용서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니~’라는 마음,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거야’라는 마음, ‘나도 그런 적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않았나? 사실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나도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을 크게 깨닫지 못하면 항상 ‘완전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남의 부족이나 실수를 용서하거나 배려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조금만 부족한 것이 보이면 참지 못하고 지적하고 비난하려고 한다. 기이한 것은 남에게는 이렇게 철저하면서도 나의 부족을 지적하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화를 낸다는 사실이다. 나를 먼저 바라보자. 나의 부족을 크게 생각하자.
나이를 먹을수록 얼마나 용서가 필요한가. 먹고 마시는 일에서도 실수하고 떨어뜨리고 흘리며 안타까워한다. 보고 듣는 것에서도 부족이 많고 정확하지 못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배려하는 마음으로 용납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날마다 일어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잘못된 선입견이 용서와 배려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통하여 이방인인 고넬료를 기꺼이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이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비난했을 때 베드로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고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반문했다(행 11:17). 할례라는 장벽을 치고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을 차별하며 교회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 신분과 경제력 등이 장벽이 되어서 용서와 배려를 막고 차별과 멸시와 비난을 일삼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항상 “내가 누구관대”라는 생각을 하면서 남들도 나와 같고, 나도 남들과 같다는 생각을 하기 원한다.
용서를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과 용서를 받은 자임을 알 때 그 은혜의 힘으로 남들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배려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2-13). 교회 역사를 보면 견뎌내기 어려운 핍박을 받으면서도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죽어간 신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것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것에 비하면 자기들의 핍박과 고통은 너무나 작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바르게 깨달은 사람만 제대로 남들을 용서할 수 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사랑을 많이 받으면 사랑이 넘치고 용서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주님을 따를 때 별명이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에 가시려던 예수님과 제자들을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을 보며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던 그를 보면 도무지 용서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늘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자신을 만찬석에서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있었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기록하였다(요 21:20). 나중에 그가 쓴 성경을 보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을 거듭 말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풀어 이야기한다. 그는 ‘우레의 아들’이 아니라 ‘사랑의 사도’가 되어 있고, 이제는 모두를 품고 사랑하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기도를 드리는 분이 되어 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은 결국 예수님의 사랑에 잠겨서 그 사랑으로 가득하고 그 사랑이 넘쳐 나오게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면서 작은 실수와 허물은 용서하고 배려하며 웃어넘겨야 한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롬 14:15-20)
먹고 마시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그러다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방에 불 좀 꺼라’ ‘수돗물 좀 아껴 써라’ ‘네 방 정리 좀 해라’ ‘머리 좀 감아라’ 등 지극히 사소한 것을 매일 수시로 지적하는 부모님의 말에 견디기 힘들어하는 자녀들이 마음을 닫는 일들이 생긴다. 그러면 자녀의 더 중요한 문제인 학교생활이나 진학 문제에 대해서 자녀들이 부모님과 진심으로 대화하거나 의논하는 일이 어렵게 된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며 사랑해야 할 관계이면서도, 그리고 훨씬 중요한 일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사소한 것들을 지적하고 다투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대개 밥상에서 하는 지적, 옷 입는 것과 관련한 지적, 청소나 방 정리 등에 관한 지적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마음이 식고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커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상대가 얼마나 귀중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가를 인정해야 마땅한데 그것을 잊고 우선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만 크게 생각하고 무분별하게 말하고 행동함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되도록 보고도 못 본 체, 듣고도 못 들은 체하면서 넘어가는 생활을 연습하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하자. 그렇게 지적을 하면서 관심을 보이는 만큼 사랑의 표현도 잘하고, 배우자의 장성을 위하여 무엇을 하면 좋은지에 대해 관심과 협조를 다하며, 배우자가 용기를 얻도록 존중하고 격려하며 칭찬하는 말도 많이 하도록 하자. 배우자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자신이 배우자에 대해 해야 할 것과 해야 할 말을 먼저 하려고 노력하자.
격려와 칭찬의 색안경을 끼는 것이 필요하다. 물이 반쯤 담긴 컵을 보고서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이 반이 있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사건을 보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혹은 냉정하게 사실대로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에게 유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누군가를 볼 때에 그의 잘못이나 부족을 먼저 보려고 하기보다는 그가 가진 장점을 찾고 그것에 박수를 보내며 칭찬을 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용서와 배려의 마음은 격려와 칭찬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아니 격려와 칭찬을 먼저 하다 보면 용서하지 못할 일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아예 격려와 칭찬의 색안경을 낄 필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격려와 칭찬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혹시 색안경이라고 잠시 빼놓을 위험이 있다면 아예 콘택트렌즈로 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고사와 함께 알려진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귀중한 것을 인정하고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과대평가하면서 괴로워하고, 남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며, 자신의 실수를 크게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다 만드신 다음에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진화론과 유물론, 그리고 공산주의가 나타나서 이런 귀중한 인간을 동물이나 물질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거짓말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우리 안에는 보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하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사랑받는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짐작하게 하는 다음 이야기(보스톤 한인교회 설교- March 19, 2018-에서 인용함)를 읽어보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우리의 행복을 기뻐하며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용서해 주자. 우리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칭찬해 주자.
어느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도시 한가운데로 강이 흐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아침마다 다리를 건너 시장에 가고 일터로 갔습니다. 그 다리가 낡고 오래됐기 때문에 새로 선출된 시장이 그 옆에 튼튼한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시장은 새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통행량을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일을 맡은 감독관은 통행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는 일을 도와줄 조수를 물색하다가 한 청년을 소개받았습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청년은 말이 적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일에 적임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감독관과 청년은 다리의 양쪽 끝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수레와 자전거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정확한 통계를 위해 서로의 숫자를 맞춰 보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센 모든 숫자가 일치했으나 사람 수의 경우에는 언제나 한 명의 차이가 났습니다. 이들은 한 달 동안 통행량을 조사했는데, 날마다 감독관이 계산한 것보다 청년이 센 숫자가 한 명 부족했습니다. 한 명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의문이 든 감독관은 청년에게 매일 정확히 한 명의 숫자가 부족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청년은 눈을 반짝이며 말합니다. 아침마다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성이 그 다리를 건너 일터로 간다고…. 그녀는 자기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숫자’에 포함시킬 수 없는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