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서원, 움직이는 서책
허석(허정진) 책 읽는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 했다. 예부터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 리, 사람 향기는 만 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인향(人香)의 싹은 책향(冊香)에서 나온다. 서원은 ‘책의 집’이다. 전통을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배움의 전당이다. 지난 5백 년 조선의 철학과 사상을 관통하던 성리학의 상징적 장소이고, 유가적 이상인 존현양사(尊賢養士)의 실체적 공간이다. 세상에 맛있는 것보다, 눈에 즐거운 것보다 마음에 위안과 평온을 찾고자 할 때가 있다. 나 안의 내가 누구인지, 세상 앞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다 잡아야 할지 가슴이 답답할 때 선비정신의 원형인 서원을 간다. 곧은 붓끝 그윽한 먹물 향기, 서원에 가면 고본상의 문자 향처럼 고절함과 예스러움의 정취가 바 잡은 마음을 넉넉히 감싸주는 것 같다. 화려함은 없다. 그래서 더 좋다.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서원을 에워싼 담장 너머로 결 고운 선비의 글 소리가 시공을 뚫고 낭랑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시끌벅적한 세상 소음들이 역사의 무게감에 잠시 정지된 듯 주위는 고요하기만 하다. 산 너머 푸드덕 날아오르는 산새의 날갯짓도 지극한 정(靜)의 세계를 펼치는 소리요, 몸짓이다. 위치부터 뭔가 남다르다. 물 맑고 풍치 좋은 곳에 외따로 떨어진 다른 서원과 달리 동네 한가운데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2층 누각인 정문 앞에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고 마을은 서원을 향해 길을 내고 집을 지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서원과 한 마음이라도 되려는 듯 집집이 기와지붕을 둘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가 서원 같다. 그래서 무성서원은 마을 정자처럼 태평스럽고 사랑방처럼 친근하다. 근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는 그다음이다. 경내와 당우(堂宇)를 동네 사람들이 마실 가듯 수시로 드나든다. 서원은 마을에 둘러싸여 있고, 마을은 서원을 품고 있다. 동네 이름도 ‘원촌’, ‘서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마을이다. 이곳 태인과 칠보 마을은 조선조 민간 출판업자에 의해 간행된 방각본(坊刻本) 서책이 나오던 곳이다. 자본과 유통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 호남에서는 전주와 나주 그리고 태인, 그 외 경기도 안성이나 경상도 달성 정도가 방각본을 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 고장이고 사람들인가. 정문에 걸린 현가루(絃歌樓) 현판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문은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뜻이다. 이 서원의 문은 천민들에게도 열려 있었다고 하니 배움에 대한 남다른 의기와 결기가 느껴진다. 경내에 들어서니 단아하고 고즈넉한 전각마다 학문의 전당답게 오래된 존재감과 고결함이 곳곳에 스며있다. 목덜미를 스쳐 가는 바람의 층계마다 지혜의 푸른 서기 가파르고, 정감 묻은 시가(詩歌)의 향취 시간 밖의 시간으로 흐른다. 스승과 제자들이 한 공간의 마당을 함께 거닐며 학문을 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배움의 열기가 눈앞에 그려진다. 이기를 논하고 성리를 구하다 보면 밤이 새는지도 몰랐을 테다. 장닭 홰치는 소리에 개벽의 아침처럼 청운의 꿈이 숨 쉬고 의롭고 정의로운 선비정신 또한 새벽 여명을 뚫고 온 누리에 퍼져갔을 것이다. 아침이면 동그랗게 하늘 한 귀퉁이 열리면서 마음은 자유로운 새가 되고 몸은 늘 푸른 청송이 되었으리라. 무성서원은 최치원과 정극인, 신잠을 포함한 일곱 분의 명현을 모시고 그 덕망과 충절을 본받으며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던 곳이다. 이들은 모두 신분의 한계와 시류의 제약으로 젊어서는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정읍에 봉직하고서야 비로소 큰 뜻과 선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정읍의 가슴으로 품고 영정과 위패를 서원에 모셨다.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높일 줄은 모르지만 남을 격려하고 칭찬할 줄은 알며, 소 눈망울같이 둥글고 순하지만 불의나 부정 앞에서는 분연히 일어서는 의로운 고장이다. 호남의 너른 벌판같이 그런 넓은 마음과 높은 정신을 가졌기에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로‘고현 향약’이 시행되고, 한국 가사 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이 태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수령들의 발호가 사라지고 압량위천도 금지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약속하고, 개인과 집단이 결속하여 자치자규하는 문화공동체가 이미 550여 년 전부터 이 마을에 스며들어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온 것이다. 무성서원은 교육 기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민본에 근거한 학문과 사상은 책 속에만 묻혀있지 않고 현실 참여적 실천정신으로 승화되었다. 1906년 호남 유림이 총궐기한 병오창의(丙午昌義)가 결의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미 조선왕조는 기울었지만, 이 땅에 의기마저 꺾인 것은 아니라는 듯 호남 의병 투쟁의 시작이었다. 항일의 기치 안에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고 모여들고, 또 전답을 팔아 군수물자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 여기 태인이고 칠보였다. 선비의 숨결이 오롯이 담겨있는 기왓장 하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풀포기 하나에도 한 나라의 역사를 지켜온 무궁한 힘이 느껴진다. 강당 대청마루에 잠시 궁둥이를 붙여본다. 물리고 버릴 것 분별하고, 지키고 이루고 되살릴 것 잊지 않는 저 꼿꼿한 선비정신의 봉우리를 본다. 썩은 권세 버리고, 부끄러운 세상 비우고 비워 상궤(常軌)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선비 같은 삶을 기대해본다.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자랑이 되는 일인지 청렴하고 올곧은 선비정신과 기개를 가슴에 담는다. 닫혔던 내 삶에 숨구멍이 열린다. 우렁우렁했던 그 낮과 밤의 말씀들 들리고 그 따끔하고 찰싹, 하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명현 한 숨결들이 나를 일깨운다. 세파에 시달리고 온갖 시름에 흔들리며 살다가도 서원에 오면 마음은 늘 경건하고 굳건해진다. 흰 두루마기 깃 눈부신 하늘에 한 점 구름이 닿을 듯 말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