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팡세 / 오세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서울의 고등학교에는 한 두 시간 특별시간이 있었다. 모든 학생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그 시간 운동을 하거나 취미할동을 했다. 중학교시절 정구선수 급우들이 부러웠던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정구반에 들어갔다.
금요일 3시 수업을 마치고 나면 두 개의 정구코트에는 각 학년 합해 30명쯤 되는 남녀 반원들이 모여 공을 쳤다. 네 개뿐인 학교 비품 라켓은 상급생들의 차지여서 하급생들은 다른 한 코트에서 개인적으로 라켓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교대로 공을 쳐 나를 비롯한 몇몇에게는 거의 기회도 오지 않았다.
동일계 중학출신이 아닌 신입생이라서 받는 은근한 따돌림에 더하여 자존심이 겹겹으로 상했다. 궁리 끝에 아버지에게 부탁을 드렸다. 당장 라켓이 필요하다고-. 당시 아버지는 모 석유회사 인천 출장소장으로 계셨고 나는 서울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 토요일, 아버지가 직접 들고 학교로 나를 찾아오셨다. 본사에 일을 보러 올라왔던 길에 라켓도 전해주고 담임선생님도 뵐 겸 들렀다고 했다.
아버지가 준 정구채는 볼이 유난히 좁은, 옛날 당신이 학생 때 쓰던 구형 라켓이었다. 나도 초등학교 때 집 다락에서 몇 차례 보았던 컷이 끊어져 가지고 놀지도 못하던 구닥다리 고물이었다.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런 걸 어떻게 학교에 가지고 간단 말인가. 더구나 여학생이 반이나 되는 정구반에 이걸 들고 가서 친다고? 얼마나 웃음거리가 될 줄 아버지는 짐작도 못하시는 건가. 피란지에서 올라와 직장을 구하신 지 겨우 3년. 아홉이나 되는 대식구를 데리고 출장소 사무실 2층이 옹졸하게 얹혀사는 아버지의 곤고한 입장을 왜 모를까만 그래도 실망이 너무 컸다. 신품 라켓이야 못 사주시더라도 중고품일망정 신형을 장만해주실 거라 여겼던 기대가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날 아버지와 나는 서울역 건너편 남산 길을 함께 걸었다. 그 아래 판잣집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밀집해있는 양동을 내려다보면서 아버지가 말씀했다.
“높은 데만 보고 살지 말거라. 낮은 곳도 살피가며 살아야 한다. 욕심이란 한이 없는 게야. 위만 보고 살면 족한 줄 모르게 된다. 만족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행복도 모르게 돼.”
값의 차이 때문에 신형을 마련 못한 민망함을 변명하려던 건가? 말씀하시는 뜻이 이해는 됐지만 가슴이 영 받자하지를 않았다.
그 구형라켓을 나는 단 한 차례도 학교에 갖가지 않았다. 주말에만 근처 초등학교를 찾아가 벽에다 대고 공을 치며 한 주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버지로부터 신형의 새 라켓을 받은 건 여름방학 시작 첫날 이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면서도 죄송했다. 얼마나 어렵게 구하셨을까.
방학 내내 나는 인근 인천고등학교 선수들에 섞여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 가을 그 라켓을 들고 전국체전에도 참석했다. 비록 1회전에서 대구상고 선수들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그해 겨울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가 있으면서 나는 아버지의 사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날도 나에게 사무실을 지키게 하고 서울본사에서 내려온 부장 두 사람과 다방을 다녀오신 아버지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서랍을 열더니 <팡세>부너 꺼내셨다. 갑자기 무얼 찾아보실 게 있나 궁금해 다가서는 나를 흘낏 쳐다보며 “오늘도 30환 굳었다.”라고 혼자말씀이듯 하시며 지갑에서 10환짜리 석장을 꺼내 책갈피에 끼워 넣으셨다.
“뭐예요?”
“응, 이거? 난 오후엔 커필 안 마시거든.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자. 다방에서 보리차만 마셨으니까 커피 값이 굳은 게 아니냐. 이렇게 끼워두었다가 10장이 되면 100환짜리로 바꿔 넣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너희들 책값이 되고 용돈이 되지.”
그 순간 나는 나의 새 라켓도 저 <팡세>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전란이 끝나고 재활과 복구가 활발하던 1950년대 후반의 우리사회는 다방문화라고해도 좋을 만큼 거리 곳곳에 다방이 흔했다. 딱히 약속해서 만날 장소도, 갈 곳도, 만나서 이야기할 곳도 없던 당시에 사람들은 일상처럼 다방에서 만나고 일을 보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 알기로 아버지는 당신의 돈으로는 일 년에 단 한 차례도 다방을 출입하지 않았다. 혹 공무로 들어가 남에게 대접을 해도 당신은 보리차만을 마셨다.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 건 낭비요 분수에 안 맞는 사치라고만 생각했던 분. 손님들 앞에서는 오후에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잔다고 하면서도 비오는 저녁이면 아버지는 창문을 열어 놓고 빗소리 속에 어머니와 마주 앉아 즐겨 커피를 드셨다.
그 겨울 알게 된 아버지의 검약과 커피 한잔 값이면 짜장면이 한 그릇이라는 실질적인 계산에 지금도 나는 커피숍 앞에 서면 선뜻 들어서질 못하고 멈칫멈칫 머뭇거리다 등을 돌리기 일쑤다. 어쩌다 마지못해 사람들을 따라 들어가도 앉아있는 내내 불안하고 어색하다. 그리고 또 여전히, 어쩌다 헌 책방에 들르기라도 할참이면 나는 높게 쌓인 책들 사이에서 을유문화사판 연두색 양장본 <팡세>를 두리번두리번 찾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