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스트의 창
전화숙
해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하다. 집수리를 하면서 주방 창을 천장까지 닿도록 확장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창을 가진 듯, 하늘이 다 보인다. 아파트 뒷동 지붕과 높은 층들이 밑그림으로 깔리지만 그래도 하늘은 광대무변이다. 창밖은 높고 넓은 하늘이고, 안쪽은 깊은 심층의 세계라면 사람도 자연도 삶도 꿈도 하나의 창에 두 풍경을 가진 화폭이랄 수 있겠다.
자주 창 앞에 선다. 희망이란 창가에 있는 것일까. 풍경 속에 내리는 눈부신 햇살을 보면, 마음 속 아릿한 무언가가 자꾸만 하늘을 차고 오른다. 낭만처럼 왔다가 낭만처럼 떠난 푸르던 날들과 염원에 대한 열정을 되새기게 된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사유의 공간과도 연결된다. 마음 창밖에 있던 사물과 사람에게로 부쩍 사고의 폭이 커져간다. 소소하게 신경 쓰며 애면글면 하고 싶지 않다. 창문이 높으면 더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로마사람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던 카라칼라 욕장이 45미터인 이유도 여기 있나보다. 어린이들에게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 묻지 말고 너희 집 창문에선 뭐가 보여? 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라고 한다.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이야말로 그 창의 존재를 드러내는 실존이다. 남편은 집을 잘 고쳐서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하고. 수명이 일 년 더 연장될 것 같단다.
주방이 벽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들어서기가 싫지만, 창이 있어 바깥으로 트여있으면 일하기가 즐겁다. 입주할 때 주방이 창을 향해있어 좋았지만 큰 창의 밑 부분만 여닫을 수 있었다. 이번에 벽을 더 단단히 다지고 천장까지 여닫을 수 있게 키를 키웠다. 살면서 잘한 일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살림을 무언가를 ‘살리는’것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람을 행복하고 배부르게 만드는 기술이나 전문성을 뜻한다고 정현경은 말했다. 살림을 하는 모든 여성을 살림이스트(Salimist)로 명명하고 죽어가는 지구를 살아나게 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정의인가. 그러므로 모든 주부는 최고의 전문가이다.
주방에 들어서면 FM라디오에서 음악이 흐른다. 온몸으로 맞는 음악이 나를 감싼다. 지금은 비발디의 사계, 가을이다. 매일 조금씩 다른 음식으로 식탁을 차린다. 말끔하던 식탁이 풍성해진다. 남편은 아내가 좋은 음식을 잘해줘서 수명을 또 삼 년 연장할 거란다. 주말부부로 지낼 때 모시 떡 두 개가 한 끼 식사일 때도 있었다. 아내는 자기 먹으려고 열심히 음식을 장만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남편을 반찬이라고 한다. 나는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셰에라자드가 하는 재미난 이야기도 해줄 테니 덧붙여 오년을 연장하자고 말할까 싶다.
이십여 년 전 창가에 서면 전철이 지나가는 풍경이 좋았다. 우리 동네는 온천천 위로 지상철이 다닌다. 바람 말고 구체적인 물체의 이동을 보며 역동적이란 말도 떠올랐고 외출을 부르기도 했다. 한쪽 다리로 서있는 왜가리가 퍼드덕 날고, 팔뚝만한 물고기가 철퍼덕 뛰어오르기도 했다. 청둥오리 부부가 조막만 한 여러 마리 새끼를 데리고 떠다녔다. 자맥질하는 귀여운 모습에 사람들이 둘러서서 봤다. 물 위에 떠있는 교회의 불빛은 첨탑에 걸려있는 불빛보다 더 아름다웠다. 불빛은 물속으로 들어가면 퍼져 보여, 파스텔 톤으로 물들어 행복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오리 떼는 기슭에 잦아들어 부리를 맞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빈터도 넓고 시원했다. 공원으로 조성하면 안성맞춤일 텐데 싶었다. 숲이 우거지고 벤치가 드문드문 놓이고 잔디가 자라며 조용히 사색에 들 수 있는, 고급 주택가가 되리라 생각했다. 기대와 달리 지금은 아파트가 총총히 들어섰다. 내가 정했던 공원 조성 부지엔 이십오 층짜리 동원과 쌍용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 사면이 아파트다. 전철은 여전히 달리건만 볼 수도 없고 소리도 소음도 없다. 안보여서 옛 풍경을 되돌릴 수 없어 아쉽다. 창 앞에 서서 보던 광경은 이제는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입주 후 얼마 안 되어 아파트 담 곁에 칠층인 골든웨딩홀이 들어섰다. 건물 앞 주차장엔 승용차가 색색의 풍선과 꽃으로 한껏 장식하고 예식을 마친 신랑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차려입은 하객들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덕담을 나누는 모습이 풍경으로 남았다. 웨딩홀은 분명히 있는데 상가가 빼꼭이 들어선 바람에 널직한 계단과 주차장은 흔적이 없다.
북쪽 창이 하늘로 향한 길이라면 남쪽 창은 땅으로 향한다. 남쪽 베란다 창과 북쪽 주방 창을 열면 확 트여 바람 길이 만들어진다. 에어컨 켤 겨를도 없이 여름이 떠나간다. 바람은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을 층층이 가르고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다.
베란다 창 너머로 어린이놀이터가 환히 보인다. 브뢰헬*의 ‘아이들의 놀이터’그림이 생생하게 겹친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다양한 인물들과 마을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렸다. 넓은 공간 안에 아이들이 즐기고 있는 각각의 놀이가 잘 묘사되어있다. 동네 아이들이 그림 속 아이들처럼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우리손주들을 눈으로 찾는다. 큰 아이는 작은 아이가 탄 그네를 밀어주다가 정글짐으로 달려가고 그네에서 내린 아이는 오빠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달아나고 따라가고 웃음이 흩어진다.
베란다에는 삼십년 넘어 자라는 무성한 고무나무가 커튼 역할을 맡고 있다. 하루는 매미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소리를 따라갔더니 방충망에 두 마리가 붙어있었다. 귀한 우리의 생명, 사랑을 나눌 둥지를 찾는데 이 철망은 뭐냐고 거칠게 항의를 한다.
그 밑둥치에 댄드롱을 심었더니 고무나무를 휘감고 올라가 여름 지나 가을까지 풍성하게 피어있다. 흰 꽃 속에서 작은 빨간 꽃이 튀어나와 새뜻하다. 초봄 긴기아난 향에 취하다가, 제라늄이 만발하고 치자꽃 향기가 사라질 때 댄드롱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꽃은 줄기 끝에서 창이 된다.
거실에는 액자 두 편이 있다. <세한도>와 <천학도>이다. <세한도>를 보면 청빈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돈이 부족할 때 저 액자를 치워버려야지 몇 번 시도했고, 집수리를 하면서 짐을 삼분의 일쯤 버렸지만 <세한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일붕 서경보 스님의 <천학도>는 주방 큰 창과 같은 크기이다. 보고 있으면 청정한 기운이 날아오르는 느낌이다. 하늘이 가득 찬 창으로 천학이 날아든다.
창문너머의 풍경은 바깥세상이 아닌 우리 내면의 일부이며, 내다보는 사람은 자기 눈에 들어오는 세상의 주인이라 했다. 창도 오묘하고 창밖의 풍경도 오묘하고 바라보는 나도 오묘하다.
*대 피테르 브뢰헬 (Pieter Bruegel Le Vieux, 1528~1569) 16세기 네델란드 화가. 순수한 풍경화를 그린 최초의 화가 중 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