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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상처를 통한 길 찾기' 과제를 받고 '상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상처는 무엇인지 고민하며 쉽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길 찾기였다.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 내가 그것을 통해 진정 만나야 하는 것은 나의 길이었다. 내가 찾은 나의 길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얼마 전에 인디밴드의 공연을 보러 서울에 다녀오면서 졸업한 선배들의 자췻집에 다녀오게 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희수 누나가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에 들러 오래된 얘기를 나누며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보고싶던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론 왠지모를 좋지 않은 기분이 겹쳐져 뒤숭숭하게 자리에 있었다.
새벽 2시쯤, 가게가 끝나고 애써 기분을 정리하며 그들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의 밝은 하늘을 볼 때까지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하며 즐겁다고 생각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쌓은 벽돌이 무너지듯 잠자리에 들며 꿈을 꾸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서울에 살고 있었다. 많은 일이 스쳐 지나갔고 그들처럼 아르바이트하며 보통의 사람들이 살듯이 하루 하루를 버겁게 보냈다. 나와 그들은 움직이는 송장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죽음보다 조금 더 나은 것을 선택하며 살았다. 학교에 돌아와서 나는 그 이상한 기분을 되새겨 보았다. 그들의 삶이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들처럼 살 것 같았다. 항상 그들을 동경해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처럼, 대부분 젊은이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스승과 배움, 영감과 기쁨 대신 진상 손님과 술병, 돈과 환멸로 사는 것은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이런 뒤죽박죽인 타래를 풀고 싶어 현곡과 이야기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들의 삶과 나도 그 삶을 살아내는 것에 대한 걱정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현곡은 그들의 삶을 그들이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버둥거리며 사는 것을 그들이 직접 체험하고 싶어 했다고. 그런데 분명 그 말이 맞는다. 나도 그들이 선택하는 것을 보았다. 현곡은 그들이 나가지 않기를 바랐고 그들은 경험하고 싶어 하여 갈등을 빚는 과정을 나도 분명히 지켜보았다. 현곡은 그들의 선택이니 그저 응원한다고 하셨다.
나도 지금껏 열심히 살아내는 그들을 보고 저렇게 살고 싶었고 경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현장을 직접 보니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살고 있고 나는 그 삶을 응원하지만, 너무나 힘겹게 지친 몸으로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더 슬픈 것은 그들뿐만이 아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물음이 생겼다. 모든 이야기가 그들처럼 집을 나가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며, 모든 깨달음이 아님을 경험하고 결국 아는 것이라면, 그걸 뒤집을 순 없는 것인가? 계속 알아가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가는 곳마다 집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나는 멀리 돌아가는 것이 아닌 곧게 바로 나아가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의 나에겐 없다. 하지만 현곡은 그 과정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셨다. 민들레반 수업 중에 '신과 나눈 이야기' 책을 보다 이런 내용이 나왔다. 글쓴이인 닐이 신에게 이렇게 여쭌다. 고통을 없앨 방법은 없습니까? 그러자 신은 답한다. 그 자체로 고통인 것은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덜 방법은 있다. 모든 창조의 과정인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를 뒤집으면 된다.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라.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현곡은 네가 되고 싶은 어떤 모습, 하고 싶은 어떤 것을 당장 실행하면 된다고 하셨다. 네가 원한다면, 네가 바라는 아티스트가 되도록 앨범을 내고, 공연하게끔 도와줄 많은 사람이 이미 준비되어 있고 충분히 가능하다. 네가 어떤 판에서 놀고 싶다면 그 판으로 뛰어들어라. 더 용기를 내고 배짱을 부려서 행동해라.
분명 수업을 하면서 머리로는 알던 내용이었는데 실제로 체화할 수 있다는 것에 몹시 놀랐다. 나는 당연히 음악으로는 돈을 벌 수 없으니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의 테크닉은 대중을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기술적인 부분을 더 배우고 다듬어서 훨씬 완성된 모습으로 세상에 나갈 거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나중에 더 완성된 모습이라는 것은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지금이 가장 완벽하여 언제나 완벽한 나 자신과 그런 나를 창조한 영혼과 스승을 모조리 부정하는 말이었다.
얼마 전 민들레반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몇 주전부터 5살 차이나는 동생 지원이가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같은 반이 되었다. 같이 학교에 다닐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학교에 오게 돼서 신기하기도 했고 겁도 먹었다. 동생은 조금 두려운 사람이었다. 막무가내 성격에 거침없이 내뱉는 험한 말로 종종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동생을 좋아했지만, 동생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걔가 나를 공격하면 나는 거기에 몇 배나 되는 대응으로 언제나 동생을 눌러 내리려고 했다.
동생이 입학하고 같은 반에서 수업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은 빠르게 학교에 적응하고 민들레와 반 친구들에게 본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말을 할 사람이 없었고 언제는 왕따를 당했으며 집에 오면 서로 신경 쓰지 않는 가족들의 독립적인 성향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외로웠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또 그런 삶을 끊으려는 시도를 해봤다는 말도 했다. 동생은 자기가 죽어도 가족 중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노력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를 판단하고 결정짓는 것이 화가 났다. 나는 동생의 극단적인 표현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에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해 동생과 자주 놀았다. 동생을 나의 친구처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친구면 나와 비슷한 성숙함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여 동생을 자꾸만 크게 보았다. 나이에 맞는 어리광을 부릴 때면 상대도 하지 않았고 어리다며 낮잡아 보았다. 동생에게 기대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대놓고 무시하며 동생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동생이 화를 내며 싸움을 걸어올 때 나는 그때만 오빠가 되어 동생을 쉽게 제압했다. 언젠가 동생이 나한테 말했다. 왜 오빤 만날 이겨? 좀 져주면 안 돼? 그때 나는 지금 말하기 정말 창피한 대답을 했다. 내가 이기고 싶어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냥 이기는 거라고.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이 동생이다. 그 상처는 나의 상처이고 나의 열등감이자 우월감이었다.
동생이 수업시간에 그런 공격적인 말을 하자 나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동생에게 태클을 걸었다. 네가 지금 죽어서 우리 태도를 다 지켜봤냐, 그런 걸 혼자 확신하고 말하지 말라. 동생에게 지기 싫었다. 얘는 언제나 나보다 어린 사람이고 미숙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말을 뱉고 지금까지도 동생한테 모질게 대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아주 한심해 보였다. 미안함과 화해의 의미를 담아 책에 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너는 언제나 지금이 가장 완벽하고 멋지니까 그것을 항상 인지하고 기억하면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지금이 가장 부족한 모습이었고 완성된 나의 모습은 항상 미래에 있었다. 나는 순간마다 동생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었다. 동생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 할 때면 죽음을 가볍게 생각한다 여겼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피해망상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한테도 동생만큼 만만하게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눈치 살피며 비위 맞추기에 바빴다. 나의 모든 분풀이는 동생의 몫이었다. 내가 친구가 없던 것, 짜증 나는 사람이 있던 것, 막상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 없이 참다가 동생한테만 막 대하고는 했다. 동생은 내 친구니까. 동생은 나보다 어리고 미숙하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경멸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용납이 안 됐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성인식 준비를 하고 음악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멋진 사람인데 누군가에게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나를 보니까 그런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성인식 준비가 뭔데, 음악하고 노래 부르는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인데. 나는 동생에게 끔찍한 가해자 같았다.
동생과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동생은 어리지 않았다. 내가 어리고 미숙했다.
동생이 나에게 무엇을 경험하게 하려고 서로 만나게 되었는지 물었다.
'사랑과 두려움. 그리고 그것의 관계'
사랑의 부재인 상태가 두려움이다.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인 것처럼.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악역과 천사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한때는 작은 영혼이었다가 가슴에 칼을 꽂는 용감한 영혼이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은 기억하는 것뿐이다. 가슴에 칼을 꽂는 당신이 나에게 용서를 경험하게 하려고 용감하게 그 역을 자처한 영혼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와 동생은 서로에게 작은 영혼이면서 용감한 영혼이었다.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용서를 구하는 방법과 용서하는 방법이다.
나는 언제나 세상의 피해자로 생각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이며 거기에 순종해야 하는 나는 명백한 희생자라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커다랗고 작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던 건 동생뿐이었다. 나는 이것을 그만두고 싶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지배하는 이런 악순환을 끊어내고 싶다. 그 방법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지금 순간에 내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빠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용기를 내어 가슴에 칼을 꽂는 영혼이 되려고 한다. 내가 꿈꾸던 나의 삶을 지금 여기로 데려오는 연습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와 나의 모습은 내가 되고 싶은 것들이 아니었다. 못된 오빠의 모습도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과정뿐이니 음악적으로 부족한 나의 모습도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나의 모습도 그저 존재로서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바로 나아가겠다. 지금 나의 음악을 하고, 지금 나의 노래를 부르며, 지금 나의 삶을 살리라.
그래서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와 같은 것들에 속고 속지 않으려 계속 기억하겠다. 세상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낭만에 살지 말고 낭만을 살아라.'
충동적으로 살란 말씀인가요?
'아니. 충동적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네가 피아노로 연습했던 것처럼. 느낌을 따라가거라. 그곳에 네가 있을 것이다.'
현곡과 나눈 얘기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꿈만 꾸지 말아라.
나는 아마 꿈만 꾸며 살지 싶다.
첫댓글 다음 과제 화이팅!!~~~^^
오늘도 나는 이 악물고 버티며 근무를 마치고 집에 왔지만, 이것이 내 선택이라는 것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삼무곡이 아닌 이곳에서도 배움은 여전하다. 설거지를 하든, 캐셔를 하든, 디자인을 하든 어디에도 배움은 있다. 삶은 내 손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나에게도 여전히 꿈은 있다. 모든 건 선택하기 나름이니까. 나는 아직도 꿈에 살고 있다. 또한 꿈을 꾸고 있고. 나와는 다른 꿈을 꾸고, 어쩌면 나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는 너를 내가 따라가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뒤에서 천천히 이 길 저 길 돌아가며 네가 앞서 나아가는 걸 바라보련다. 고요한 박수를 보낸다. 축하한다.
고맙다. 그리고 용서를 구한다.
택배 왔어요 나
응원할께... 모두를...
모두가 선택한 삶을... 정민이도, 무아도, 해준이도...아, 병헌이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