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어진 삶(The Buried Life)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월든’(Walden) 호숫가 숲속에 통나무집을 지어 놓고 2년간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그가 숲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인생을 의도적으로, 다시 말해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이란 무엇을 뜻할까? 이는 그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아는 자기 정체성 찾기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러나 내부에 깊숙이 감추어진 삶의 궁극적 목적을 끌어내어 영원을 향해 구도의 정신으로,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관해 전도서 기자는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미국 댈러스 신학대학 철학 교수이자, 사역자이며, 세계관 전문가인 데이비드 노글(David Naugle)은 그의 저서 「세계관(The World View, The History of a Concept」에서, “하나님이 설계한 인간 본성 때문에,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종교를 추구하며 삶의 비밀을 이해하고자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굶주림과 갈증이 있다. 인간이 처한 상황의 알파와 오메가를 이해함으로써 쉼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마음속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의 시, ‘감추어진 삶’의 시구보다 이런 갈망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한 글은 없다.”라고 했다.
매슈 아널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그의 시 ‘감추어진 삶’은 영국 문학세계에서 고전이 되었다. 이 시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성찰이고, 삶의 의미에 관한 추구이며, 수많은 독자에게 영감을 주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장시(長詩)는 일곱 개의 연(連, stanza)으로 되어있다. 그중, 감추어진 삶을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가장 두드러진, 제6연의 첫 번째에서 열째 시행(詩行, (line)에서는 잠재의식 깊숙이 묻힌 감정과 사고(思考)가 언제,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러나 시의 화자(話者)는 소란스러운 싸움터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욕구가 일어나게 되며, 이러한 욕구는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이 욕구는 감추어진 우리의 삶의 지식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며, 탐구의 열정으로 나오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스스로에 속한 감추어진 삶을 조금이라도 경험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게 되고, 그 경험 깊은 곳으로 탐구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 3개 시행(詩行)에서 아름답고 명료하게 요약되어 있다.
즉, “우리 안에 이토록 사납고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마음의 신비’를, 탐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솟구친다.” 이 ‘마음의 신비’를 데이비드 노글(David Naugle)은 그의 저서에서, “마음의 신비는 그 마음이 품은 세계관의 신비이다. 세계관의 신비는 마음의 신비이다. 마음에 묶인 세계관과 세계관에 묶인 마음은 삶이 오고 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내재 된 힘의 근원이다. 그것이 시간과 영원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이런 귀중한 충고를 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서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언 4:23)”
이제 저녁노을에 지는 해를 바라보는 연수가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궁극적인 목적, 다시 말해, ‘감추어진 삶을’ 과연 충실히 살아내었는지를 물어보게 된다. 부모님의 자식으로, 가장으로, 부모로서, 그리고 아내의 남편으로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의 구성원으로, 시민으로, 개인으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을 성실히 살아내었는지?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를 따라 자신을 구현해낸 삶을 후회 없이 살았는지? 무엇보다 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살며, 궁극적인 물음인 영원을 향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신비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의 시, ‘감추어진 삶’은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던져주고 있지만, ‘드러난 삶’에서도 무엇 하나 자신 있게 보여줄 것 없이, 이 땅에서의 게을렀던 삶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붙임 :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의 시
‘감추어진 삶, 6 련(連) 일부(1-10 lines)’
‘하지만 종종 세상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소란한 싸움 속에서
우리의 감추어진 삶을 알고 싶어 하는
형언할 수 없는 욕망이 솟구친다.
우리의 불같은 열정을 쏟아부어
우리의 참된 근원적 경로를 추적하고 싶은 갈증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 안에 이토록 사납게, 이토록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이 마음의 신비를
탐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솟구친다.’
-데이비드 노글(David Naugle)의 「세계관」 번역서에서-
첫댓글 인간의 한계를 넘어 계신 하나님의 뜻
인간의 마음은 영원토록 알 길이 없으니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는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높은 학자들이 변명을 해도
그분의 섭리 안에서는 무용지물이며 생각조차도 감히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죄인입니다
네, 옳은 말씀입니다.
연수가 더 해 가자 아직 영원을 사모하지 않는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 생명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분주히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