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귀의 연가시 / 윤태근
사마귀는 딱한 녀석이다. 그 탐욕이 끝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녀석의 식욕은 왕성하다. 작은 곤충들은 얘깃거리가 안 되고 덩치가 비슷한 방아깨비를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먹어치운다. 그뿐만 아니다. 청개구리나 작은 새는 물론 새끼 뱀까지 잡아먹는 식충이다. 걸귀 서너 마리가 뱃속에 들어앉아 있는 게 틀림없을 것 같다.
곤충계의 최고 포식자답게 녀석의 사냥기술은 천하무적이다. 이 힘의 원천은 태생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우를 연상시키는 심각형 얼굴은 교활한 꾀를 감추고 있다. 깜박이지 않는 눈과 차갑고 매서운 눈매가 그대로 냉혈한이다. 녀석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은 애초 그른 일이다. 긴 목처럼 보이는 늘씬한 앞가슴과 단단한 등판, 유연한 몸매 모두 천부적인 사냥꾼임을 증명한다. 날카로운 이빨과 억센 턱, 녀석은 이 강력한 무기로 상하좌우 어떤 각도에라도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비장의 무기는 다른 데 있다. 근육질의 권투선수를 닮은 팔뚝이다. 다리에 비해 터무니없이 굵고 긴 팔엔 톱날과 같은 가시가 촘촘하고 양 손은 낫과 같이 예리하다. 이 날카로운 낫과 톱날에 걸린 곤충들은 그 누구라고 빠져나갈 수가 없다.
녀석은 위장술에도 능하다. 계절에 따라 몸의 색을 바꾼다. 봄여름엔 녹색, 가을엔 갈색이다. 주변의 풀줄기를 이용해 위장을 하고 두 팔을 앞으로 모은 채 꼼짝 않고 있을 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자세지만 그 집중력이 가상하다. 이런 모습을 보도 서양 사람들은 ‘기도하는 예언자’라고 했다. 신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투사한 표현으로 어찌 보면 그럴듯한 발상이다. 이럴 때마다 녀석은 끈질기게 자신의 기도문을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양육강식이라는 자연의 이법을 외면하고 사해동포의 사랑 운운하는 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신이시여, 아무 놈이라도 좋으니 먹어치울 수 있는 얼빠진 놈들을 많이만 주소서. 저는 아직도 굶주렸나이다.”
그래도 자신이 정한 규칙 하나만은 충실히 지키는 녀석이다. 스스로 사냥한 것만 먹겠다는 원칙. 아마도 무예 집안의 정통 후손이라는 자존의 오만함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먹다가 떨어뜨린 것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녀석은 허풍도 세다. 자신보다 큰 강자를 만나면 몸을 최대한 부풀려 대항한다. 다리를 쭉 뻗쳐 몸을 들어 올린 다음 붉은 속 날개를 활짝 펴서 실제보다 큰 몸통을 과장한다. 방어자세로 치켜든 양 팔을 좌우로 흔들어 위협하며 상대를 빈틈없이 노려본다. 때때로 이런 공갈협박에 속아 녀석의 사냥감으로 희생되는 넋 빠진 것들도 있으니 세상사 재미있다고나 해야 할까.
끝 모를 욕망의 화신인 녀석은 포악한 살생자다. 호랑이의 위용과 자세를 닮은 곤충계의 제왕이기에 ‘버마제비’로 불리기도 한다. ‘범과 같은 아제비’라는 교만함으로 녀석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웬만해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말 그대로 만용이다. 오죽하면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하기야 저돌적인 공격성과 날렵함을 본 따 중국인이 만들었다는 당랑권(螳螂拳)이 유명세를 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한다. 그러나 매미를 노리고 있는 자신의 뒤에, 자기를 노리는 새가 있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기도 하다.
천부적인 사냥꾼의 신체조건, 용맹과 자부심, 끈기 있는 집중력의 소유자. 이 정도면 여유 있는 삶을 누릴 법하건만 녀석은 늘 배고픔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녀석을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지난여름 어느 날이다. 오솔길에서 녀석이 죽어가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다. 평소에 뽐내던 위용은 간곳없이, 비틀걸음으로 휘청거리더니 길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것이 아닌가. 가슴의 상처는 필경 분수를 모르고 날뛰던 흔적이었으리라.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더듬이와 다리를 파르르 떨고 있는데 녀석의 배를 뚫고 나오는 생명체가 있었다. 가는 철사 굵기의 뱀 모양으로 길이는 손가락 세 마디쯤, 두 마리나 되었다.
알고 보니 이 괴생물체는 녀석의 뱃속에서 기생하던 ‘연가시’였다. 녀석들은 모두 한 마리 이상의 연가시를 갖고 있단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기생하는 놈들에게 양분을 뺏겨서란다. 더구나 기생하던 이놈들은 숙주의 상처가 깊어 위기를 느끼면 그 즉시 뚫고 나와 결국 숙주를 죽게 만든단다.
아하, 이제야 알 것 같다. 녀석이 탐욕을 부리던 속내를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악귀가 되어 살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숙명을. 무적을 자랑하는 호랑이의 위용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당랑권의 대가면 무엇을 하리? 그 뱃속에 연가시를 품은 것을….
요즘 들어 부쩍 삶이 허전하다. 혹여 내 안에도 또 다른 이름의 연가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