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파는 카페
최영애
아마,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건물 모퉁이에 들어앉은 카페, 하얀 격자무늬 문 위에 앞으로 돌출된 간판이 눈에 들어와서다. 옆으로 긴 타원형 나무 위로 흰 바탕에 초록 넝쿨이 테두리를 장식했다. '기억을 파는 가게', 마치 줄기를 잡고 수액으로써 초록물이 흐른 것처럼 꼬부랑거리는 손 글씨체가 그저 좋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아, 언제였더라. 내 삶의 화두는 기억인 것처럼 어느 한순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기억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생각해본다. 기억이란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일. 나라면 지난 삶의 골목 어딘가에서 잃어버렸을 남루해진 서정들의 잔상을 되찾아 오고 싶다.
누구나 기억의 둘레 안에서는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아니, 기억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제 디지털기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모든 기억을 그곳에 저장하고 살아간다. 그것도 기억의 한 방편일까. 아니다. 가상공간에도 휴지통이 존재하고 삭제 버튼 앞에서도 아무 망설임도 없이 날리기도 한다. 이미 그때부터 알게 모르게 기억의 잔혹사는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기억을 사고팔 수 있다면? 아니, 미래에는 기억이라는 말조차 아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단 한 번만 살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까. 사고 싶지 않은 누추한 기억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너무 불공정한가. 제일 많이 예상되는 것은? 혹시, 한정판으로 너무 많이 몰려드는 건 아닐까. 필요조건 하나, 기억을 사려면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팔아야 가능한 일, 누구나 기억을 함부로 사고팔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방송에선가 만약 자신이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면, 어느 순간을 선택하겠느냐는 물음에 많은 사람이 '첫사랑'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첫사랑이 남루해진 모습으로 앉아 있다 해도, 아린 가슴을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게 될지라도 그 순간을 되돌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최초의 기억은 어떤 걸까. 푸르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글이 생각난다. 주인공이 가리비 모양의 마들렌 한 조각을 홍차에 적시는 순간, 자연스럽게 '콩브레'에서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카페 유리창을 캔버스로 삼아 '샘뻬' 풍으로 그린 흰색 아린이 시선을 간접 차단한다. 투명한 선 그림 너머엔 현재로부터 단절된 오랜 날의 기억이 나를 부를 것만 같다. 나는 기억의 실을 천천히 풀어가며 뜨개질을 할 것이다. 이때쯤 나는 기억을 얹을 선반 하나쯤 매고 싶어진다. 눈앞에 레이아웃이 시작된다. 이곳은 아날로그 리스트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보랏빛 바이올렛부터 흰 이빨을 드러내고 활짝 웃는 운간초, 크로커스까지 오종종한 화초를 창가에 배치한다. 애플민크와 쵸코민트, 스피아민트도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면 좋겠다.
살아간다는 건 기억이 많아지는 거라고 했던가. 삶의 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어딘가에 저당 잡힌 기억을 하나하나 되찾아오기 위해 우린 이렇게 많은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기억을 떠올리는 자체도 끈질긴 시간의 귀소본능일지도 모른다. 살바도르 달리의 <끈질긴 기억>처럼 지친 시계 하나, 걸터앉을 공간도 마련해주고 싶다. 그럼 시간은 천천히 가야하리. 한 바퀴 돌면 늘 제자리에 돌아오는 시계도 관성을 잊고 기나긴 휴식에 들도록 잠을 재워야만 할 것 같다.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듯, 로즈마리는 테이블에서 꽃향기를 준비하고 있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꽃', 이파리를 살짝 건드리는 순간, 톡 쏘는 향기가 눈앞에서 졸음을 몰아낸다. 전축 턴테이블 위 LP판이 늘어지면서 그로테스크한 목소리로 들려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건 과거로 들어가기 위한 워밍업, 바늘이 튀고 다시 제자리를 돌아도 '기억의 습작'처럼 여길 테니까.
어색하면서도 윙윙 반복되는 그 소리가 거슬리면서도 좋아 나는 구석진 창가의 한 자리만을 고수할지도 모른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내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가는 나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많은 날이 지나고.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가사 중에서 애잔한 가사와 멜로디가 귓가에 감기며, 심상의 음계를 넘나든다. 조용히 창밖을 보며 달아난 순간 하나 불러오고 싶다. 나는 어쩌면 방금 낙하산을 타고 온 것처럼, 하늘색 아사 원피스 자락을 편 채, 잔디밭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얌전한 스텐 카라에 U자 프릴이 가슴에 달린 원피스는 스무 살의 상징이었다. 책 몇 권을 옆에 끼고 나타나는 사람, 검정 테 안경에 모범답안 같은 얼굴을 한 첫사랑과 조금은 부끄러운 조우를 할지도 모른다. 하늘색 바탕에 안개꽃 무늬가 별 사탕처럼 흩뿌려진 그 원피스를 입고 공중전화박스 앞을 서성이던, 그 순해지는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을 지날 때면 습관처럼 멈추어 선다. 나는 맞은편 도넛 전문점에 들어가 그 카페가 앉아 있던 자리를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다. 그 카페마저 모퉁이에 서 있던 기억을 팔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냥 이렇게 지나간 시간 앞에 멈추어 서게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해지는 건 왜일까. 언제 어디서나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열고 사는 디지털 노마드족 digital nomad族에 끼어 살면서도 이런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드는 건 뭐라고 해야 하나. 시대를 역행하더라도, 시간의 열차를 역방향으로 돌려놓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몇 년 후쯤 될까? 후미진 골목에 외로운 고양이처럼 찾아드는 나이,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 하나가 '기억을 파는 카페'라는 간판 하나달고, 안경 위로 눈알을 굴리며 좀 고리타분하게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친 영혼들과 동시대의 기억을 향유해가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누가 알랴. 현관문에 달린 '엔틱 종'이 그 아래 달린 '새끼 종'들을 딸랑딸랑 깨울 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하나, 중절모를 벗으며 한 손엔 젖은 우산을 들고 실내를 두리번거린다. 그때 서로 조금씩 시간을 벌어가며 말을 더듬고 서 있을지도….
"저… 기억을… 사고… 싶습니다."
"어떤 기억…을 사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