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향교 유림회원 경북지역 성현 유적지 탐방
진주향교 유도회 회원 180명이 관광버스 5대를 대절하여 경북지역 성현의 유적을 탐방했다. 처음 계획은 대구향교, 인흥마을, 낙동서원, 육신사, 도동서원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연세가 높은 어르신이 많아 행동이 민첩하지 못해 일정이 계속 지체되는 바람에 도동서원은 방문하지 못했다.
제일 먼저 들렀던 곳은 남평문씨의 중시조로 알려진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이 대구에 입향하여 세운 수백당(守白堂)이다. 수백당에 걸려있는 현판 사백루(思白樓)와 이청각(履淸閣)의 글자를 초서로 쓴 관계로 회원들이 그 글자를 알아내기 까지 갑론을박이 있었다.
이곳은 수백당 외에 품격을 갖춘 고택 기와집 수십 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야말로 영남지방 양반 가옥의 맥이다.
인흥마을의 지리적 형상도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이라 일컫는 배산임수와 장풍득수의 지세를 닮았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이 대구 향교이다, 대구 향교는 규모, 운영 프로그램,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처리가 처음 보았는데도 격이 높았다. 이곳에서 오늘 방문한 회원 180명이 도열하여 대성전에 봉심을 했다. 그런데 의례절차가 격조 높고 엄숙했다.
안내판 기록에 의하면 이 향교는 1398년(태조 7년)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교동(校洞)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었으며, 1400년에 불타자 곧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1599년(선조 32) 현재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하였다. 1605년 교동으로 이건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932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의 위패를, 동무·서무에는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30인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었다.
점심식사를 한 후 낙동서원을 방문했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이 낙동서원 (洛東書院)은 본래 우배선(禹拜善)을 제향하기 위하여 1708년(숙종34)에 건립되었던 덕동서원이었다. 고 한다. 이 서원이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고 또 건물도 없어졌다. 이 낙동서원이 복원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965년 단양 우씨 판서공과 종인의 협조와 17대손인 종식, 종묵 형제가 상인동 885번지에 사비로 건립하여 향내 유림에 헌납한 것이다. 이 서원의 서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던 우배선과 우탁(禹倬), 신현(申賢), 우길생(禹吉生), 우현보(禹玄寶) 5분이 모셔져 있는데 오히려 이 건물이 돋보인다.
육신사는 삼촌에게 왕권을 빼앗긴 어린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으로 일컫는다.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 해설사의 입담이 압권이었다. 해설을 16년 했다는 여성분인데 사적 내용과 지세 등에 관해 해박함을 갖추고, 듣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읽어 내는 능력이 출충하여 해설을 듣는 동안 흥미를 더했다.
이 분의 설명에 의하면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선생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를 지냈는데 선생의 현손(玄孫)인 박계창이 선생의 기일 날에 꿈을 꾸었는데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는 것이다. 그 후에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냈다. 그 뒤 하빈사(河濱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숙종 20년(1694년) 낙빈(洛濱)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서원(書院)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충효 위인 유적정화사업’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고,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는 것이다.
오늘 나와 같이 옆자리에 앉아 동행을 한 사람은 강기현 선생이었다. 나의 제자인 강혜숙의 숙부다. 고향이 하동 고전이다. 내가 첫 발령을 받았던 학교가 하동 고전초등학교였다.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의 외조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신 연유와 묘소가 고전면 성천리에 있었는데 학부모를 통해 우연히 묘소의 위치를 알게 되어 성묘를 한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강선생님이 그러한 내용으로 지금 글을 쓰고 있다고 하면서 외조부님의 자료를 보내 달라고 하기에 즉석에서 내 카페에 있는 내용을 복사하여 전송해 주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또한 묘한 인연이다. 세상은 이렇게 관계가 지속되는 순환의 연속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