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청정이건기挹淸亭移建記
선성(宣城)의 남쪽 외내[烏川里]는 광산 김씨(光山金氏)가 세거한 마을이다. 시랑공(侍郞公)이 이곳에 터를 잡은 후로 아들 운암(雲巖) 탁청정(濯淸亭) 형제가 덕학과 벼슬로 세상에 명성이 알려졌다. 운암의 아들 후조당(後凋堂) 읍청정(挹淸亭)과 탁청의 아들 산남(山南) 양정당(養正堂) 설월당(雪月堂) 다섯 종형제가 모두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높은 제자가 되었으니, 한강(寒岡) 정 문목공(鄭文穆公)이 일컫기를, “외내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를 이어서 여러 현인이 배출되어 부자 형제가 아름다움을 잇고 나란히 하였으니, 여채(呂蔡) 가문의 명성이 컸다. 후조당이 마을 한 가운데 있고 그 서쪽에 읍청정이 있으니, 읍청정은 계선생(季先生)이 지은 것이다.
선생은 뜻을 가다듬고 학문에 독실하여 어진 부형의 가정에서 분위기에 젖고 큰 스승의 가르침에 훈도를 받았다. 일찍이 성균관에 오르고 늦게는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 취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곧 자취를 거두어 한가로이 지내며 자신의 형비(衡泌)를 즐겼다. 청량산이 아득히 멀리서 눈에 들어오는 까닭으로 정자 이름을 ‘읍청(挹淸)’이라고 하였으니, 실로 퇴계 선생이 명명하여 이미 편액을 써주고 또 12수의 시를 지어 보냈던 것에서 장려하고 기대함이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임천(林泉) 화석(花石)에 선생의 향기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자애로운 자손이 대대로 지켜 쇠하지 않았다. 근래에 정부에서 낙동강을 개발하는 사업으로 인하여 낙동강 백 리가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외내가 강에 가장 가까워 온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국가의 대계를 막을 수 없지만 조상의 유업을 어찌 폐기할 수 있겠는가? 이에 마을 북쪽 몇 리쯤 물이 미치지 않는 곳을 새로 택하여 산을 등지고 터를 닦아서 대소 종택과 여러 정자를 모두 이건하니 바둑판을 펼치고 별이 늘어선 것 같았는데, 이 정자는 옛집이 퇴락하여 복원할 수 없었다. 종택과 정자를 이건하는 데 크게 비용을 쓴 나머지 물력이 부족한 탄식이 있었는데, 후손 기영(基泳)이 비용을 혼자 부담하여 모두 새로운 재목으로 옛집 규모보다 확장하여 오래지 않아 장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었다. 그 특별한 뜻과 참다운 정성이 조상에게 빛을 냄이 있다고 말할 만하니, 이 어찌 지금의 쇠퇴한 시속에 얻기 쉬운 것이겠는가?
아! 낙동강은 우리나라의 이락(伊洛)이니 활수(活水)가 넘치고 숙기(淑氣)가 모여서 유학의 발원지가 되었다. 도산(陶山) 아래와 호계(虎溪) 위의 낙동강 좌우에 원림과 정자가 늘어서서 서로 이어진 것은 퇴계 선생이 농운정사(隴雲精舍)에서 학문을 강론하던 날 그 문하에 이르렀던 여러 제자들의 집이 아님이 없고, 지금까지 4백 년 남짓한 동안 의관 문물의 영향이 남아 오히려 정려(鼎呂)의 형세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유림의 연수(淵藪)가 변하여 어룡(魚龍)의 굴이 되고 마니, 취규(聚奎)의 운세가 옛날에는 어찌 그리 성대했다가, 덧없는 변고가 지금은 어찌 이렇게 지극한 데 이르렀는가? 운수가 한 번 상승하고 한 번 침몰함이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인가? 광산 김씨가 일으킨 이 일은 곧 시세를 따르고 변고에 응하여, 가문의 유형(遺型)이 옛날처럼 보존되고 조상을 사모할 장소가 있게 되었다. 이 마음을 가지고 나간다면 비록 만겁(萬劫)이 겹쳐 나온다고 하더라도 어찌 선대의 자취가 사라져 없어질 것을 근심하겠는가?
이건을 마치고 어진 후예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기문을 청한 여러 사람들과 퇴계 선생 문하의 동문 후손인데다 외손의 처지에 있고 또 우리 마을 도목촌(桃木村)도 역시 같은 변고를 만났기 때문에 이 정자에 오름에 감개한 정회와 경모의 사정이 남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이에 감히 참람함을 잊고 이건의 사실을 대략 기술하여 삼가 정자 벽에 적는다.
선성(宣城) :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禮安面)의 옛 이름이다.
시랑공(侍郞公) : 김효로(金孝盧, 1445∼1534)를 말한다. 자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聾叟),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480년(성종11)에 생원이 되었다.
운암(雲巖) : 김연(金緣, 1487∼1544)의 호이다. 자는 자유(子裕)이다. 1519년(중종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언(正言), 지평(持平),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탁청정(濯淸亭) : 김유(金綏, 1491∼1552)의 호이다. 자는 유지(綏之)이다. 1525년(중종2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후조당(後凋堂) : 김부필(金富弼, 1516∼1578)의 호이다. 자는 언우(彦遇)이다. 1537년(중종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읍청정(挹淸亭) : 김부의(金富儀, 1525∼1582)의 호이다. 자는 신중(愼仲)이다. 1555년(명종1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저서로는 《읍청정유고》가 있다.
산남(山南) : 김부인(金富仁, 1512∼1584)의 호이다. 자는 백영(伯榮)이다. 1549년(명종4)에 무과에 급제한 후 낙안 군수, 호조 정랑, 창성 부사, 이조 좌랑, 경상좌도병마절도사,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낙천정사(洛川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산남집》이 있다.
양정당(養正堂) : 김부신(金富信, 1523∼1566)의 호이다. 자는 가행(可行)이다. 1558년(명종1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설월당(雪月堂) :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의 호이다. 자는 돈서(惇叙)이다. 1555년(명종1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저서로는 《설월당집》이 있다.
한강(寒岡) 정 문목공(鄭文穆公) : 정구(鄭逑, 1543∼1620)를 말한다.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저서로는 《한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여채(呂蔡) : 중국의 여씨(呂氏) 형제와 채씨(蔡氏) 부자를 말한다. 여씨 형제는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았던 대충(大忠), 대방(大防), 대균(大勻), 대림(大臨) 4형제를 말한다. 이들 형제는 남전에서 향약(鄕約)을 실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채씨 부자는 남송(南宋)의 학자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 1135∼1198)과 그 아들 구봉(九峰) 채침(蔡沈, 1167∼1230)을 말한다.
12수의 시 : 《퇴계집》 권5 속내집(續內集)에 〈김신중 읍청정 12영(金愼仲挹淸亭十二詠)〉이 실려 있다.
이락(伊洛) : 중국 하남성의 이천(伊川)과 낙양(洛陽)을 말한다.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형제가 이 사이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정려(鼎呂) : 하(夏)나라 보배 구정(九鼎)과 주(周)나라 보배 대려(大呂)인데, 비중이 큰 인물 또는 사물을 말한다. 구정은 하나라 우임금이 주조한 것이고, 대려는 주나라 종묘의 큰 종이다.
취규(聚奎) : 문사(文士)가 성대하게 모이는 것을 말한다. 규성(奎星)이 문운을 맡고 있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