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21』 2021. 9.10 마감 - 발송완료
두텁나루숲 하루 꿈 3
강을 건너는 하루 꿈 본다 건너편 사시나무 이파리들이 흔들리며 반짝인다 저편이 흔들리는 만큼 이편도 흔들렸다 세상은 흔들리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운데 시절의 꿈은 이토록 선명한데 나의 꿈은 아직도 스스로를 통속通俗하지 못한 채 선악의 한 금을 그었다 위선僞善의 끝은 어디인가 배롱 꽃 피고 지는 붉은 날들이 가는데 그대 이승의 꿈 하나는 강을 잘 건너고 계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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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 21』 2021. 9.10 마감 - 발송완료
두텁나루숲 하루 꿈 4
두텁나루숲에 들어온 후 세월의 더께 같은 미망未忘의 시간들이 많이 지워졌다 그것들도 서서히 늙어가는 게다 다만 저녁노을이 지면 어둠과 함께 되살아나는 오랜 지병持病같은 기억들이 실핏줄을 타고 역류한다 아직도 실재實在에 닿지 못하는 하루 꿈이 슬프다 어쩌면사는 일의 절반은 견디는 것이었다 어디에 있든 누구든 생生의 반쯤은 견디며 사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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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10월문학제』 2021. 9.10 마감 - 발송완료
10월의 꿈
세상에서 사라진 시간들은 어디로 갈까 꿈도 없는 깊은 잠 너머로 갔을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色도 없이 하나 되어 골똘한 의식이 되어 아, 그곳엔 어떤 세상이 또 있을까 1946년 10월의 꿈과 대구의 거리에서 사라진 내 아버지는 그곳에 있을까 내 아버지가 아닌 누구의 얼굴로 억새꽃 흩날리는 제주의 어느 오름에서 총을 쥐고 있을까 아직도 여수의 애기섬으로 가는 배를 타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까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그 시간에서 풀려났을까 깊은 잠 너머 골똘한 의식마저 사라진 그곳에 해원의 바다는 있을까 그곳에 이르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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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눌인문학』 2021. 9.30 마감 - 발송완료
두텁나루숲 하루 꿈 1
인시寅時에 눈을 뜨니 창밖의 서늘한 강바람이 이마에 닿는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 고요에 드는 동안 애기동백은 이슬을 털며 깨어나고 벽오동 넓은 잎이 여명을 받아낸다 어둑새벽의 강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새들이며 두텁나루숲의 목숨붙이들이 저마다 숨을 고르며 다시금 새로운 하루 꿈을 빚는다 나는 텃밭에 나가 이랑을 북돋우며 풋고추 세 개 신선초 다섯 잎 가지 한 개의 내 하루 꿈을 아침밥상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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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눌인문학』 2021. 9.30 마감 - 발송완료
두텁나루숲 하루 꿈 2
바르게 앉아 꿈 덩어리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촘촘히 들여다본다 육신의 탐욕으로부터 골수의 절망까지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저 수천수만의 꿈 조각들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육도六道의 시간을 흐르는 저 무량의 꿈들 두텁나루숲 한 가닥 휘파람 소리 강을 건너는 고니 한 마리의 그 오늘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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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 문예연구소』 2021. 9.30 마감 - 발송완료
무등無等의 숲
안개 자욱한 무등無等의 숲 마타리 같은 꽃들도 새들의 울음소리도 촉촉이 젖어 우울한 잠이 들고 바람 하나 없는 안개의 숲은 상가喪家의 조등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어둠 속 물줄기 하나 무등無等의 숲을 빠져나와 배고픈 다리를 건너 저자거리의 미망迷妄에 합류하였다. 위기와 절망의 시절이 아니래도 무등無等은 매일 거리로 내려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고을의 안부를 물었다. 세속世俗의 경계를 지우는 것부터가 무등無等의 시작이었다. 경계가 지워지는 자리에 입석과 서석이 들어서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무등無等의 높이를 살았다. 오월이 그렇게 갔고 오월은 또 이렇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