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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구이신왕에서 비유왕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대한 의문점의 개인적인 견해.. ^^
조선국왕 인종 추천 0 조회 182 07.09.07 18:16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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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9.07 19:07

    첫댓글 공감 안 가는 내용이 있군요. 영락 6년에 벌어진 태왕의 기습적 남정으로 사실상 백제가 멸망했다는 것은 공감이 안 갑니다. 사실상 멸망한 나라라면 장수왕이 굳이 남정을 벌여서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어야 했고 동성왕~성왕에 걸쳐서 왜 고구려는 백제와 전쟁을 벌여야 했을까요? 또 아신왕이 무릎꿇었다고 해서 그것이 백제가 멸망한 것이라면 청태종에게 인조가 무릎을 꿇었으므로 조선은 사실상 멸망했다고 봐야하는 것일까요? 개인이나 국가나 가다보면 크나큰 실패나 시련을 겪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 실패나 시련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나 국가가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07.09.07 20:29

    전지는 오랫동안 왜국에 있었기 때문에 정작 본국에 돌아오려고 했을 때는 자신을 지지해줄 정치적 기반 세력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동생인 설례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 반란을 해씨 세력의 도움으로 평정하고 이 해씨 세력과 손잡고 본국 내에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죠. 삼국사기 전지왕 2,3년 조에 해씨 일족을 달솔, 내법좌평, 병관좌평으로 임명한 것은 전지왕의 정치적 기반 확대라고 생각합니다.

  • 07.09.07 20:33

    그리고 해씨 세력이 이렇게 막강했다면 굳이 구이신을 제치더라도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을 옹립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유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구이신이 오릅니다. 그것은 목씨 세력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구이신왕 무렵에 '목만치'가 권력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구이신 역시 목만치를 필두로 하는 목씨 세력들이 지지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비유왕이 실제로 해씨 출신 후궁의 소생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해씨 세력이 옹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 3년조를 보면 해수를 상좌평으로 삼은 것으로 보면 말입니다.

  • 07.09.08 08:53

    왜는 백제보다 국력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영락대제기에는 仁德 천황이 나옵니다. 국력이 강할 때 국제적으로 팽창하는게 이치입니다.

  • 07.09.08 10:17

    왜가 백제보다 국력이 우위에 있었다고 볼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영락대제기'라는 사서는 제가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집니다. 영락대제기의 기록을 근거로 왜가 백제보다 국력이 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만..

  • 07.09.08 11:46

    천만의 말씀! 민족주의 배제하고 잇는 그대로 봐야 보이죠^^

  • 07.09.08 15:14

    '영락대제기'라는 제목에서부터 벌써 이 사서가 위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태왕으로 기록하지 않고 대제라고 기록한 점, 둘째, 연호+대제의 형식이 고구려 시대의 것이 아님. 연호에 제나 대제를 붙여 당대 황제를 칭한 것은 명나라 태조 홍무제(홍무는 연호)가 1명의 황제가 오직 한 개의 연호를 써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생겨난 형식임. 따라서 영락대제기는 조선시대의 저작일 확률이 높습니다. 김용만 선생님도 수레책에서 박창화가 남긴 사료들을 이렇게 추측했습니다.

  • 07.09.08 21:43

    st-james님, 이 책이 조선시대에 쓰인 건 당연한거죠. 위서가 아니더라도 영락대제기의 저자가 님이 말씀한 형식을 일부러 썼을 수도 있는거죠. 그리고 중요한 거는 조선 시대에는 고구려시대의 직접적인 기록물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과 당시 조선에서 금기시했던 민족주의 사서들이나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옛 기록들이나 쪼가리를 저자가 참고해서 썼을 경우도 있습니다.

  • 07.09.08 21:53

    아니요, 꼭 형식상 그런것 뿐 아니라 광개토태왕릉비문과 비교하여 봤을 때 내용상으로도 문제가 많습니다.

  • 07.09.08 23:05

    일본이 백제보다 국력에 우위가 있었다? 전혀 아닐텐데요? 제가 주장한 것이지만 기술력이 전혀 없고 군마 도입도 서기 5세기 초반에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라가 막강한 기마군단을 자랑하던 고구려나 다른 북방계열과의 전투로 단련된 나라한테 국력 우위라니 아무리 보아도 그건 아닌 듯 싶습니다.

  • 07.09.08 23:09

    그리고 인덕천황이 유명한 이유는 3년간 조세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라는 거는 전 일본인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이걸 해석하면 당시 일본이 엉망진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비약이긴 하다만, 흔히 조세를 안 거두는 경우는 국가재정이 워낙 튼튼해서 도저히 조세 관리를 안 해도 되는 행복한 상황이고 다른 반대는 도저히 조세를 거둘 형편이 안 되는 경우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기상이 상당히 나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시는 소빙하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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