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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윤식 목사입니다. 강구만 장로님께서 멀리 계셔서 답을 못하신다고 제게 부탁하시네요.
방언과 치유는 성경에서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로 열거하고 있는데,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고 방언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고전 14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은 성령을 받았으면 방언을 해야 하고, 치유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부터가 방언이나 치유 기적이 성령 받음의 중요한 증거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언이나 치유 기적은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체험된다는 것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역사, 성령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매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의 세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역사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눅 17:20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답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이 볼 수 있고 체험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늘의 표적이 있는 나라고 능력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놀랄 표적이 나타나고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영광된 나라로 세우는 능력으로 행해지는 것이 그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지만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알 수도 인식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방언과 치유를 성령의 역사, 믿음의 역사로 여기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참된 믿음의 세계, 성령이 역사하는 참된 세계를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되는 것만 가지고 믿음을 말하고 성령을 말하기 때문에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방언과 치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다면 사도들부터 방언과 치유사역을 강조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기적을 행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많은 서신을 썼지만 바울 자신이 병고침 등의 기적을 행한 내용은 없습니다. 또한 성령의 증거로 방언이나 치유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처럼 사도들이 행한 기적 이야기가 사도행전만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지만 세상에 남겨진 사도들을 세워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여전히 주님의 일을 행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고 지상에서 사도들만 남겨졌기 때문에 이제는 사도들의 힘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께서 함께 하셔서 주가 일하신다는 증표로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을 사도들을 통해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행하진 기적을 자신이 행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전14장에서 방언을 말한 것도 방언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방언으로 인해 발생한 고린도교회의 분란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어디에서도 성령 받은 사람은 방언을 해야 하고, 치유 기적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방언과 치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방언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는 방언은 참된 방언이라고 할 수 없고 성령 충만의 증거도 물론 아닙니다. 저도 누군가가 방언 하는 것을 들어보았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몇 가지의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언어는 몇 가지 단어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어가 하나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그것이 소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들은 방언은 문장으로 구성된 언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언은 무당의 세계에도 있는 것이고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훈련 받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혀가 꼬이더니 이상한 말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자기 체험에 붙들리는 것이고 참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막 16:17절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새 방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 중의 하나를 새 방언으로 말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새 방언은 믿음에 의해서 말하게 되는 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가 새 방언이며 믿음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에 있어서 참된 방언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들을 귀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들을 귀가 없으면 진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로 받아들이게 될 뿐입니다. 즉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새 방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 같지도 않은 이상한 말을 방언이라고 하며 마치 그것이 성령의 표적이고 믿음의 표적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성경과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치유 기적도 다르지 않습니다. 막 16:18절을 보면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믿음의 표적을 독을 마셔도 괜찮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실제로 독을 마셨을 때 괜찮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치유 기적을 믿음의 표적이라고 말하려면 손으로 뱀을 집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뱀이나 독은 인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과 독에도 괜찮다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신자는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고 해롭게 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즉 믿음의 표적은 사망을 이긴 영원한 생명으로 역사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손을 얹은즉 나은 것도 몸의 병이 낫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영혼이 치유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회개함으로 인해 그 영혼이 깨끗함을 얻고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이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에도 계속되는 진정한 치유입니다. 따라서 방언과 치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흔히 이해하는 방언과 치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은사는 다양하지만 은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은 동일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눈에 보이는 은사에 매일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방언을 하든 병 고치는 은사가 있든 그것만을 성령의 역사로 볼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의 삶을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성령 안에서 살아갑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이 계속된다고 해도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에 의해 살아지고 있는 것입니다.이것을 방언이나 병 고침을 행하는 사람보다 못한 삶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신자가 자신의 삶 전체가 성령과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때문에 방언이나 병 고침이 없는 삶이라 해도 성령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방언과 치유를 말하는 사람들의 잘못은 눈에 보이고 체험되는 그것으로 성령 안에서의 삶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