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로
신 대 식
불현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면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간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대합실 의자에 몸을 맡긴다. 대합실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들이다. 낯선 곳, 오랜만에 방문할 곳에 대한 설렘이나 기대에 부푼 표정은 없다. 모두가 차 시간을 기다리기에 지루한 모습들이다.
버스 승강장으로 나가본다. 대천, 부안, 목포행 버스들이 나란히 머리를 디밀고서 한 쪽 아가미를 벌린 채 눈을 내려뜨고 있다. 나더러 들어오라며 은근히 유혹하고 있다. 나는 가고 싶은 곳이 많아서 가슴이 뛴다.
요즘은 길 떠나는 이를 위해 터미널까지 나와서 배웅하는 모습은 없다. 승객들도, 고속버스는 오로지 ‘공간 이동’ 수단쯤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나 혼자 설레는 가슴으로 승강장에서 서성인다.
일상생활에 얽매여 살다 보면 마음 따라 자유로이 여행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다가 조바심 이는 마음을 가누기 힘들어 질 때면, 옛길을 더듬으며 나를 달래곤 한다.
어느 해 하늘이 맑은 초가을, 통영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한 연화도에 갔었다. 섬 모양이 한 송이 연꽃처럼 생겼다하여 연화도라 이름 지은 작은 섬. 선착장에 도착하여 차량 한 대가 겨우 통행할 수 있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며 찾아 간 곳이,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동머리’ 마을이었다.
고갯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해변을 따라서 십여 호도 안 되는 집들이 띄엄띄엄 늘어서있는 어촌이었다. 야트막한 언덕에 기대어 망망대해를 등지고서, 잔잔한 내해內海를 향해 돌아앉은 마을은 하얗게 쏟아지는 초가을 햇볕아래 가물가물 오수에 잠겨있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늦더위에 지친 코스모스가 손님맞이도 귀찮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돌담 그늘에 엎드려서 졸고 있던 강아지조차도 게슴츠레한 눈으로 흘깃 쳐다보고는 앞발 위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아버렸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마을은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선창에는 작은 어선 두 척이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손질을 기다리는 낡은 그물 위로 나른한 햇살이 사물거리고 있었다. 선창을 가만가만 두드리는 잔물결만 찰랑거릴 뿐, 마을에는 살아 움직이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갑자기 모든 생명체가 증발해버린 듯, 일체의 움직임이 정지된 유령 마을에 나 혼자 정신이 홀려서 들어온 것 같았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살펴보니 움직이는 것이 있긴 했다. 바닥의 까만 조약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투명한 물속에는 은빛 망사가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물결에 흔들리는 햇살 무늬였다. 그 사이로 수많은 종류의 치어들이 떼를 지어 한가롭게 몰려다니고 있었다.
마을을 한동안 헤집어서 찾아낸 민박집은, 마침 가두리 양식장을 경영하는 노부부와 총각 아들이 살고 있는 아담한 양철집이었다. 작은 어촌에는 주인아줌마가 열고 싶을 때만 빠끔히 열었다가, 이내 찾아올 손님이 없어 닫아 버리는 허술한 가게가 하나 있을 뿐, 둘러볼 데도 관심을 둘 만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시선이 갈 데라곤 하늘빛을 닮은 잔잔한 바다와 점점이 떠있는 섬뿐이었다. 그마저도 지루해지면 마을 뒤편의 능선에 올라서 거칠게 출렁이는 외해의 희미한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내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오늘은 뭘 해야 할까, 내일은 또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하루 종일 나무그늘에 앉아서 바다만 바라보면 되었다. 머리는 한가하고 몸은 편안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는 것도 없이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민박집 총각이 무료해 보이는 나그네가 딱하였던지, 가두리 양식장에 가면 낚시가 잘 된다며 나를 안내했다. 총각이 운전하는 모터보트를 타고서 마을 앞, 가두리 양식장으로 갔다.
발밑으로 보이는 한려수도의 맑은 바다는 햇빛에 비치는 파란 속살이 사파이어처럼 고왔다. 그 밑으로는 켜켜이 가라앉은 어둠마저 보였다. 저 아래, 무거운 어둠 속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잔잔한 너울을 타고 가두리 널판이 일렁거렸다. 펼쳐놓은 낚싯대 끝 초릿대도 덩달아서 오르락내리락 리듬을 탔다. 수면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너울을 따라 물속으로 잠겼다, 솟았다 하는 찌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지럼증이 일어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란 속살이 투명한 빛을 내면서 눈앞으로 다가오다 멀어져 가곤 했다. 아늑한 품으로 뛰어 들어오라, 유혹을 하는 듯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의식이 점점 몽롱해졌다. 한 순간, 다리가 휘청하더니 상체가 기우뚱하며 물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다.
비명도 지를 틈 없이 머리가 물속에 잠기면서 귓속에선 도랑물 밀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엉겁결에 콧구멍으로 빨아들인 짜디 짠 바닷물이 뒷골을 후벼 판다. 숨을 멈추고 가만히 있으리라. 절대로, 볼썽사납게 허우적대지는 않으리.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라앉겠지. 수면 바깥, 하늘의 구름이 흔들린다. 하얀 기포가 보글보글 위로 솟는다. 이대로 소리 없이 생을 마감한다 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햇빛이 미치는 경계를 지나면서 어두운 심연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온 세상이 캄캄해진다. 아득한 적막···.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등골이 저리도록 외로움이 밀려온다.
한껏 멈춘 호흡이 한계점에 이르자 심장이 통증으로 인해 터질 것 같다. 입과 코가 저절로 벌어지면서 벌컥벌컥 바닷물을 들이킨다. 아! 시원한 바람 한 모금만···. 머리가 폭발할 것 같다. 세상은 캄캄한 어둠.
가위눌린 듯 숨이 막혀서 허우적대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식이 환각상태에서 빠져나왔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한동안 물끄러미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란 속살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바다 밑으로부터 거뭇거뭇한 무리들이 날카로운 은빛 섬광을 번득이면서 쏜살같이 몰려나왔다. 수많은 점들이 소리 없이, 빛살처럼 빠르게 떼를 지어 달려왔다. 이번에는 정말 나를 잡으려고 몰려오는 저승사자들 같았다.
낚싯대 끝이 두두두 하며 물 속으로 처박혔다. 순간, 나는 상상의 늪에서 깨어났다. 고등어 떼였다. 하얀 뱃살이 파드득 햇살을 튕기면서 고등어 몇 마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요동을 쳤다.
고등어 떼는 우르르 몰려왔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러다가 잠시 지나면 또다시 몰려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동료 몇 마리가 바늘에 꿰어서 하늘로 사라져버려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먹이만 보고서 질주하는 삶. 나도 그동안 저 고등어처럼 먹이만 보고 달려온 것은 아니었을까.
가두리 낚시는 초보자라도 거저 먹기였다. 총각이 즉석에서 떠주는 고등어 회는 연한 살맛이 고소했다. 술 한 잔이 한 병으로 넘어가면서 거나해진 기분에 널판에 등을 대고 누워버렸다. 하늘 멀리 흰 구름이 시야에 가득하고, 가두리 널판에 부딪히는 물결소리가 아득했다.
바다는 하늘을 닮는다. 하늘이 평온하면 바다는 파랗게 반짝이며, 하늘이 노하면 바다도 거칠게 심술을 부린다. 바다는 하늘과 하나다. 내가 바다 위에 누워 있는 건가, 하늘 품에 안겨 있는 건가. 바다 위에 떠서 구름을 덮고 누워있으니 나도 바다와 하나 되고, 하늘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내 가슴 속에도 너울성 파도가 밀려오고, 구름이 흘렀다.
깜박 졸음에 빠져드는데 해풍에 실려 오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머리칼처럼 출렁이면서. ‘아바’의 노래를 좋아한다던 총각이 영화음악 ‘맘마미아’를 튼 모양이었다. 저쪽 널판에서 갑오징어 잡이 릴낚시를 던져놓고서 하늘을 보며 앉아있는 총각의 옆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루 종일, 외지인 한 명 볼 수 없는 섬마을에 살면서 무료함이 몸에 밴 총각의 표정은 드넓은 바다를 닮았다. 조용조용한 말소리에 흔들림 없는 선량한 눈빛은 항상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외지를 향한 동경을 접은 걸까, 언제나 그의 표정은 온화하고 담담했다.
한여름 양철지붕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던 폭염이나 폭풍우 몰아치던 날의 거친 파도도 한 순간에 흘러가는 꿈에 불과할 뿐, 바람이 가고나면 젊은 날의 열정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인생이란 걸 일찌감치 터득한 건가. 하늘과 바다만 바라보고 살면서도 총각의 심성은 자연에 동화되었나 보다. 그의 해탈한 모습에, 예순에 몇 해를 더 보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양식장을 등지고서 가두리 널판에 걸터앉아 낚시를 하면서 또 며칠을 보냈다. 연화도에서 지낸 날들은 내 기억보다 더 아름다운, 한 폭의 아늑한 풍경화였다.
밤이면 랜턴 하나 밝혀 놓고서 물결에 흔들리며 앉아 있던 수도승 같은 섬마을 총각이 그립다. “저 녀석 장가라도 보내야 할 텐데···.”라던 총각 어머니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지금쯤, 참한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을 했을까.
문득 부르릉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변산행 버스가 출발시간이 되었나 보다. 바퀴가 스르르 구른다.
차창 쪽으로 혼자 앉은 긴 머리 아주머니와 눈길이 마주친다. 싱긋 웃어 주며 손을 흔들어 본다. 마치 배웅 나온 애인처럼. 잠시 멈칫하던 그녀도 활짝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든다. 하얀 치아가 곱다. 정인을 떠나보내 듯 내 가슴 한켠이 싸아해진다.
첫댓글 눈길에 갇혀서 금년도 여정을 접었습니다. 새 봄이 오면 다시 날개를 펴야지요
네! 그렇게 날개를 펴서야죠 신 장군님. 마음의 여로 또 한 번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주 뵙기를 기대합니다. 아니 내일은
뉴 국제호텔에서 뵙게되었군요. 좋은 수필 자주 올려주세요. 고맙습니다.
어제 송년회 반가웠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술맛 계속 즐기시길 바랍니다.
따끈따끈한 등단작품이군요. 그저 한적한 섬 풍경 한폭을 그려주시는 데 그치지 않는 다양한 메시지가 있어요.
출렁이는 깊은 바다를 드려다 보다 의식의 한 자락이 그만 그 안으로 빠져 들어가버린 듯 간접체험으로도 생생히 살아나는 묘사나
섬총각의 모습에서 읽어내는 자연과 인생의 의미들, 작가 자신의 시선 같은 부분들이 은근한 흡인력으로 다가옵니다.
어쩐지 그 섬에 저도 가고싶어지네요.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시간도, 머리 회전도, 생체리듬도 모두 정지된답니다. 물론 늙지도 않겠지요. 그런데, 적막함이 견딜 수 없는 사람은 큰일 나지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했습니다. 어촌의 기억이 지루하지 않았고 민박집 총각을 보고픈 마임까지 들게 하니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상상 속 죽음의 세계를 독자와 함께 빠지게 합니다. 문학의 힘이군요. 건필을 빕니다. 잘 읽었습니다.
죽음, 언젠가 맞이할 나의 일이니 평시에 늘 생각해야 할 일이지요. 그러면 현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길 떠나길 좋아하시는 신대식 선생님 따라 연화도에 잘 다녀 왔습니다.
정말 영화 속 풍경인 듯도 싶고, 은빛 그물 푸른 바다만이 아니라 심연의 어둠까지도 느끼게 해주시네요.
가두리 널판에 앉아 낚시 드리운 선생님과 수도승 같은 그 총각.
아름다운 풍경화에 마음 적시고 갑니다.
문득 - 내가 여기서 죽으면 심심해서 죽은걸꺼야 -얼마전 저도 섬에 갔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글 중간에 죽음 부분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에세이 문학 다 읽은 것 같은데도 새롭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심심해서 죽은걸꺼야." 빙긋 웃음 띄게 하는 표현이군요.
그러나, 섬에 가면 심심할 일은 없지요. 바다를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시커먼 바닷속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나를 향해 눈을 흘기고 있는 도다리놈도 보이고,
나를 건드리기만 해봐라, 내 똥배로 밀어붙일 테니, 라며 유유히 헤엄치는 복어 아줌마도 보이지요. ㅎ 상상이긴 하지만.
다시 또 마음의 여로를 따라가 봅니다--
또 읽어도 감동입니다-- 새해 건안 건필하소서 -감사합니다
저도 낚시대를 드리우고 마음의 여로를 구경하고 왔습니다.. 표현이 엄청 섬세하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