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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호
소설가 | 평화로운 숲 속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숲을 다스리던 독수리가 늙고 병들자 느닷없이 목소리가 큰 거위가 뻐꾸기를 새
지도자로 추대하고 나섰다.
“자고로 ‘인지장사 기언은 선하고, 조지장사 기명은 애하다(人之將死 其言
善, 鳥之將死 其鳴 哀)’
했거늘, 우리 새들이란 본시 슬프게 태어난
짐승인지라, 슬프게 울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오. 그런데 작금의 새들이 그 본분을 잊어버리고, 노래하듯 즐겁게 지저귄다는 것은 한심하지 않을 수 없소. 슬프게 울지도 않는 새들을 어찌 새라고 할 수 있겠소? 저 뻐꾸기는 자신의 삶이 고달프거나 슬프지 않음에도 여전히 슬프게 울 수
있으니 모두가 본을 받아 마땅할 것이오. 도대체 우리 가운데 누가
저렇듯 슬프게 울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거위의 사촌격인 오리가 옳소 하며 한
마디 더 붙였다.
“숲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뻐꾸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집에서 남의 먹이를 얻어먹고 살다가 성장하면 미련
없이 보금자리까지 포기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여태 자신의 집도
갖지 않은 채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새입니다.”
뻐꾸기를 본받자.
뻐꾸기 붐이 물결쳤다. 그러나 반대 세력도 만만찮았다.
뻐꾸기기는 너무 촌스럽다. 그리고 우는 것도 지도자로서 품위가 없다.
숲의 주도 세력인 학들이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뻐꾸기는 원래 남쪽 숲 귀퉁이에 살았는데 자기
동네에서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목소리는 좋았지만 험상궂은 얼굴에다
일도 하지 않았고, 탁란(托卵)까지 일삼으니 싫어하는 새들이 많았다. 그러나 봄 한철 그가 울어대는 소리는 더러 심약한 새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바람을 잘 타는 까마귀 무리들이
기회는 이때다 며 뻐꾸기 편을 들고 나왔다.
“뻐꾸기야말로 우리 힘없는 새들의 모습이요, 또한 약한 새들의 대변자입니다.”
“옳소.”
주로 목소리가 큰 새들이 까마귀 무리에
합세했다. 조용하던 숲은 날마다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뻐꾸기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까마귀,
까치, 거위, 오리...
목소리 큰 새들은 제 세상 만난 것처럼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숲은 그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거위는 어느덧 울음소리도 꺼꾹꺼꾹 하면서 뻐꾸기
소리에 닮아 있었다. 오리들도 무리지어 꽥, 꽥 하던 울음을 꽤꾹, 꽤꾹 대면서 숲 속의 새들을 선동했다. 거위 오리만이 아니었다. 까마귀도 까악까악에서 까꾹까꾹으로, 참새는 째꾹,
닭은 꼬꾹, 촉새는 촉꾹으로.
숲 속에 모든 새들의 우는 소리도
닮아갔다. 본래 제 울음을 우는 새들이 이상한 새로 몰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애초에 슬픈 소리를 낼 수 없는 새들은 입을
다물었고, 슬픈 소리를 내던 새들 중에도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느 날 맹랑한 새가 나타났다. 동쪽 숲 가장자리에서 어린 새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새였다.
“우리 새들은 반드시 슬픈 소리를 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새들도 즐겁게 노래할 수 있다. 각자 타고난 목소리에 따라 슬프게 울 수도 있고 즐겁게 노래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왜 우리는 뻐꾸기처럼 슬프게 울어야 하는가.”
그야말로 맹랑하게 지저대고 있었다.
풍경1.
거리는 갑자기 소리가 멈춰버린 텔레비전 화면 같았다. 화선지의 먹물처럼 거리로 번져나가 마침내 거리를 점령해버리기까지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고, 길이 막힌 차들의 흔한 경적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와 남쪽 항구의 짭짤한 갯냄새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갯냄새 속에는 언제나 항구를 삼킬 듯 출렁대는 파도가
있었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거리의 긴장을 더욱 숨
막히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항구의 사람들은 다른 곳의 사람보다 성격이 거칠고 급하다. 거리에 몰려든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더 거칠고 급한 사내의 소동을 구경하고
있었다.
호텔 2층 커피숍
창가에는 웃통을 훌떡 벗은 사내가 종업원 아가씨의 목을 끌어안고 과도를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사내는 무엇이 원통한지 한 번씩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긴 생머리의 아가씨를
찌를 듯 자세를 취했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조심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러한 비명마저 소리가 차단된 판도마임으로 토막지고
있을 뿐이었다. 범인은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도 역시 웃통을 벗은 채 창밖으로 불끈 쥔 주먹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무엇인가를 외치다가 창문을 닫곤 했다. 아마 경찰 측이 자신을 저격할
것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칼을 든 사내보다 더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호텔 아래 땅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아놓았다. 핸드마이크로 설득을 하고 있지만 범인도 경찰도 서로에게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마침내 범인의 어머니들까지 달려왔다. 범인은 어머니의
울부짖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인질도 죽이고 자신도 죽어버리겠다고 소리 질렀다.
문제는 범인의 요구가 너무 어의가 없다는 데 있었다. 범인은 며칠 전 벌어진 브라질 월드컵 4강전 한국 대 프랑스의 경기를 다시 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 경기에서 한국은 2:1으로 아깝게 졌다. 설득하는 경찰로서도 실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전반전 한국이 선취골을 넣었으나 오프사이드 반칙 선언으로 무효가 되었다. 심판 판정에 격렬하게 항의하던 박기도 선수가 퇴장까지 당하고 말았으니 주심의
판정은 그날 경기 결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삼자 입장에서 봤을 때 심판은 비교적 공정했다. 아니 국제 경기에서 그러한 판정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주심 판정에 공정성이나 재량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실제
모 방송의 한 해설 위원은 판정이 옳았다며 오히려 거칠게 항의하는 선수들을 나무라면서 선수는 경기에 열중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국민들의 비난 여론 때문에 한동안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날 중계했던 대부분 방송에서는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심판 때문에 졌으므로
대한민국이 너무 억울하다며 흥분된 감정을 싹이지 못했다. 급기야는
인터넷 등에서 오프사이드 기를 들었던 일본인 선심과 미국인 주심을 타도하는 글과 미국과 일본을 비난하는 글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결국 반미,
반일 감정에 불을 지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몇 년 전
벌어졌던 미선, 효선 사건과 광우병 파동, 그리고 독도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셈이어서 여태까지 쌓인 반미, 반일 감정이 폭발 직전에 있었다.
-역시 왜놈은
왜놈이야. 백보 양보해서 설사 오프사이드라고 해도 못 본 채 넘어갈 수
있는 것을 말이야...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편을 들려면 이웃 나라 편을 들어야지 저 먼 프랑스 편을 들게 뭐야.
-선심이 다소
애매한 지점에서 기를 들었어도 주심이 그대로 경기를 진행시키면 끝나는 게 아니야.
-선심은 자기
나름대로 공정하게 한다고 한 거겠지. 설사 어느 편을 들고자 했다
치더라도 우리 편이 될 이유가 있겠어? 지구상에서 가장 일본을 싫어하는
나라가 우리인데 뭐가 이뻐서 우리 편을 들어주겠나? 그렇고, 미국이 우리보단 프랑스가 가깝지 뭐 하러 우리 편을 들겠냐?
제법 생각이 있는 치들이 일방적 편들기 여론에 양념치 듯 반박을 했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반민족자로 몰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아니 부자지간이라도 그런 말을 했다간 바로 주먹질이요, 의절되어 버렸다.
일본과는 전쟁이라도 한판 붙을 분위기였고,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이참에 그동안 소원했던 북한과 합작이라도 해서 일본 열도나 하와이까지도 성능 나쁜 북한제 미사일이라도 날릴 태세였으니, 그 무엇도 들끓는 국민감정을 진정시킬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일부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여론에 동조하고 나서면서 불난 데 기름을
붓고 있었다.
어느새 텔레비전의 현장 중계가 진행되었다. 온 국민들의 눈이 남쪽 항구 도시로 쏠렸다. 대한민국은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미국놈 일본놈은 사죄해야 한다...
인질극이 하루를 넘겨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범인에 동조하는 데모가 벌어졌다. 거기에 고무된 인질들은 더욱 기고만장했고, 결국 인질극은 장기전으로 가고 있었다. 저녁마다 중요 도시에는 몇 만에서 수십만 명이 운집해 반미와 반일을 외치며
촛불 시위를 했다. 범인은 거의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엔에이치케이’나 ‘씨엔엔’
같은 곳에서도 생중계를 하기 시작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더욱 고무되었다. 저 헤이그 밀사 사건 때처럼,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알렸던 것처럼 월드컵 결승의 억울한
탈락을 알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시선은 싸늘했다. 세계 언론들은 한국 당국의 미지근한 대응과 연약한 여성의 생명보다 범인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동조하는 대한민국의 국민 여론을 비난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잠시 딜레마에 빠졌다.
차라리 일을 저지를 바엔 미국이나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 대사 정도를 인질로 잡고 일을
저질러야지, 연약한 여성을 그것도 동포 여성을 인질로 잡고 재경기를
요구하니 오히려 대한민국의 억울함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 중에 그러한 안목을 가진 자는 극소수였다.
시위는 식지 않았고 오히려 갈수록 숫자가 늘어났다. 그러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구국청년대 소속 대원 십여 명이 쓰시마에 상륙해서
에보시다케 전망대에 태극기를 꽂고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며 시위를 했다. 심지어 그들은 전망대에 바리케이트까지 치고 한동안 현지 경찰과 대치 소동까지
벌였다. 그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극우 단체 소속 대원들 십여 명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도 상륙을 시도하다가 좌절되자 독도 주위를 돌며 해상 시위를 벌였다.
이에 뒤질세라 충청도 어느 도시에서는 과거 주먹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두한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육십 대 사내가 일본 타도를 외치며 손가락을 잘랐다. 연이어
전국 곳곳에서 모방 단지 사건이 터졌다. 뿐만 아니라 쓰시마 상륙
시위도 잇따랐다. 일본의 극우파들도 기회는 이때다 어선 수십 척을
대동해 독도에 상륙해 마침내 일장기를 흔들며 장기 시위에 들어갔다.
바야흐로 반일감정은 점입가경이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이 있는 신성한 여의도에 사꾸라가 웬 말이냐!
좌우당의 극일도 국회의원은 같은 당 소속 청년 당원들과 여의도에 있는 벚나무 베어내기
운동을 벌였다. 그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대한민국의 모든 벚나무는 한순간에 ‘사꾸라’로 돌변했다.
여의도에 있는 벚나무뿐 아니라 전국의 대부분 벚나무가 벌목되어갔다.
한편 반미 시위도 반일 시위 못지않았다. 시위대가 요크션지 바크션지 미국을 상징하는 누룩돼지 한 마리를
능지처참했다. 200근이나 되는 큰 돼지는 버둥대다 일 분 만에 사지가
토막났다. 이들은 꿈틀대는 돼지의 목에 식칼을 꽂았다. 이른바 돼지 목을 딴 것이다. 돼지는 삼십 분 동안 광장의 보도를 피로 물들이며 놓여 있었다.
시위대가 ‘퍼포먼스’라고 부른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부 시민들은 박수를 쳤고 대형 태극기를 흔들기도
했다. 수만의 시위대는 피를 보자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끔찍한 장면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유럽과 미국의 동물보호단체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그래도 대한민국에서는 삭발,
단식, 자해, 분신,
죽창, 화염병, 방화까지 모든 시위 방법이 총 동원되었다. 경찰은 통제 불능이었고 오히려 시위대에 쫓기고 얻어맞아 중상자가 늘어날
따름이었다.
그러나 반미 감정은 근본적으로 반일 감정보다 그 뿌리가 얕아서 순간적으로 크게 타오를 수는
있지만 지속적이거나 깊이가 없었다. 분노가 폭발할 때 억지로 막으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파괴력이 커진다. 적당한 통로를 열어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미국보다 일본이 선택될 것은 불문가지다. 우선 미국은 일본보다 힘도 세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훨씬 덜 효과적이었다.
때마침 좋은 사냥감 하나가 걸려들었다.
차라리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라고 주장하는 ‘쥐뿔’이란 아주 맹랑한 소설가였다. 그 판국에 대한민국 사람들의 태도를 비판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듯한 글을
인터넷에 올려 화를 자청한 것이었다. 어차피 그 시점에서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권력층에서는 국민의 봉기가 두려웠다. 판이 뒤집어지면 그들의 안온한 미래도 보장될 수 없었다. 그런 차에 좋은 사냥감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이미 성난 네티즌들에 의해 검찰에 고소당했고, 그도 네티즌을 상대로 고소했다. 검찰에서는 재빠르게 두 건에 대해서 불기소처분을 내려 버렸다.
검찰은 친일작가 쥐뿔 씨의 망언에 악성 댓글을 단 네티즌 천여 명에 대해서 '표현이 다소 과격하더라도 사회상규에 부합되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들이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라'는 자신의 글에 욕설을 퍼붓는 등 악의적 댓글을 달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쥐뿔 씨의 망언에 대해 네티즌들이 반박하는 차원에서
의견을 올린만큼 거친 표현이나 욕설을 썼더라도 '위법성 조각(阻却)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검찰은 오히려 쥐뿔 씨가 일본의 독도 도발 때 '친일을 위한 변명'이라는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해서 네티즌들의 반발이 있을 것이 뻔한데도
인터넷에 글을 올려 국민감정을 자극했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이번
수사과정에서 글을 올린 네티즌들에 대해서는 한명도 조사하지 않았다.
한편 검찰은 쥐뿔 씨를 국가모독죄로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한 고소,
진정 사건과 관련해서도 현행법상 '국가모독죄'가 없다며 쥐뿔 씨를 불기소하기로 했다.
-국가모독죄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글씨
말이야...
-쥐뿔도 없는
쥐뿔을 일본에서 지진이 제일 많이 나는 땅에 생매장을 하라.
쥐뿔을 처단하라는 요구가 거세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풍경2
그날 결승 진출이 좌절되던 날, 광장의 흥분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완전 무정부
상태였다.
평범한 시민 김평민 씨는 여느 사람들처럼 네 살 된 아들과 아내와 함께 시청 앞 광장으로
갔다. 가족 모두 빨간 옷으로 갈아입고 다소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이었는데 광장은 벌써 붉은 인파들로 꽉 찼고, 그 붉은 빛깔이 모두 거대한 불꽃처럼 들끓고 있었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이라는 용광로 속으로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들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도 있었지만 그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서 광장으로
나온 것이었다.
사실 그러한 분위기의 조짐은 진작 있었다. 7회 연속 월드컵 진출도 진출이지만 사상 두 번째로 4강 진출이라는 사건을 연출할 때부터 알아봐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저 이천이년 4강의 위업도 달성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것은 똥개도 제 집 앞에선 힘을 쓴다는 개최국 프리미엄
때문이었다. 외국산 감독 없이도 순수 자력으로 4강까지 갔으니 전 국민이 흥분할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아니래도 흥분 잘하는 민족이라면 세계에서 둘째를 서러워할 판인데. 전국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거리마다 마을마다 도시마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그 장한 ‘대-한민국’이 목 놓아 불러지고 있었다. 거리에서 가벼운 승용차 접촉사고에서도 ‘대-한민국’이면 서로가 웃으면서 시비를 중단했다. 직장에서 쫓겨난 노숙자도 ‘대-한민국’이면 배가 불렀다.
어느 삼십대 직장인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대-한민국 소리에
그저 눈물을 흘렸다. 그러한 모습은 매우 흔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거리마다 태극기가 나부꼈고,
모든 언론과 인터넷에서 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월드컵 준결승 진출에 대해 흥분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꿈조차도 꿀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일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자다가도 축구 생각하면 벌떡 일어나 ‘대-한민국’을 소리 지르며 손뼉까지 맞춰 치고는 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국회에서 멱살을 잡던 의원들도 길거리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던 사람들도 ‘짜작 짜 짜짜’
소리만 들리면 같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화해했다. 떼를 쓰며
울던 아이까지 그 소리를 내면 울음을 그치고 웃을 정도였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부릉부릉 소리도 ‘대-한민국’
곡조로 바뀌었다. 심지어 방귀 소리도 트림하는 소리도 산에
가서 환호성 지르는 야호 소리도 ‘대-한민국’으로 바뀌고,
모든 곡조가 ‘대-한민국’이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으로 날이 밝아 대-한민국으로 잠이 드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를테면 그 소리는 어느덧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기쁨의 소리이자 명령이
되어 버렸다.
이윽고 경기는 시작되었고,
붉은 군중들은 우리 선수들이 공만 잡아도 감격에 찬 환성을 질렀다.
마침내 전반 20분 경 우리가 먼저 한 골을 넣자 광장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서 기절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오프사이드 반칙으로 노골이 선언되고 항의하던 박기도 선수가
퇴장하자 광장은 요동쳤다. 후반전이 시작되어 곧바로 상대의 골이 터지고
몇 분 뒤 바로 동점 만회 꼴이 터졌다. 한순간에 지옥과 천당을
갔다왔다 했다.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십여 분 남겨놓고 프랑스의 완벽한 결승골이 대한민국의 골대 그물을
흔들고 말았다.
경기의 패색이 짙어지자 광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난장판으로 바뀌고 말았다.
맥주 페트병,
깡통들이 날아다니고, 스프레이가 난사되고, 신문지나 종이들에 불붙여 집어던졌다. 게임이 종료되자 김평민 씨는 덜컥 겁이 났다. 네 살 된 아들과 임신한 아내가 걱정이 되었다. 그는 그제야 광장에 나온 것을 후회했다.
술에 취해서 서로 얼싸 안고 뛰어다니거나 태극기를 들고 앞도 보지 않고 마구 뛰어다니면서
괴성을 지르고, 그들이 휘두르는 태극기는 각목도 있고 쇠파이프도 있어
그대로 흉기와 같았다.
인파에 밀린 김평민 씨가 소리를 질렀다.
"밀지
마세요, 임신한 사람이 있어요!"
응원단 십여 명이 그의 아내를 에워쌌다.
“어, 배 속에 축구공이 들었네.”
응원단 하나가 불룩한 배에다 얼굴을 대고 소리쳤다.
"대-한민국"
그가 선창을 하니 나머지도 대한민국을 합창했다. 아내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김평민 씨가 응원단을 밀어내자 옆에 있던 대한민국 동료가 남편의 멱살을
잡으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을 본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나무랐다. 그러나 젊은 대한민국은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늙은이가
집구석에 쳐 박혀 있지 뭐 하러 기어 나왔냐?”
“다음 월드컵은
늙어 죽어서 못 보겠네?”
“약
오르지, 난 또 볼 수 있다"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경찰 통제선은 다 무너져 도로도 난장판이 되었다.
공중전화의 수화기로 전화기를 두들기면서 대한민국을 외치다 전화기는 박살나 수화기만 줄에
달려 대롱거렸다. 도로로 나온 군중들은 지나가는 버스, 택시,
승용차 모두 세우고 지붕에 올라타기도 하고, 차를
박살내기도 하면서도 연신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한 버스 기사가 경적을
울리면서 군중을 나무라자 누군가가 "야, 저 차 올라타"라고 하자 순식간에 군중들이 차로 몰려가 지붕, 보닛에 올라가 박살을 내버렸다..
폭주족들은 대한민국 박자로 빵빵대며 사람사이를 요란하게 지나다녔고, 근처 상가 입간판은 몽땅 부서지고, 편의점의 물건들은 아무거나 꺼내서 그냥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편의점 주인이 계산하고 가라 소리치면
"야 오늘 같은
날 그냥 쏴라, 같은 민족인데 쪼잔하긴"
하면서 빈정대거나 욕설을 퍼부었다.
김 씨가 그 전쟁터를 대피하듯 간신히 골목으로 빠져나와 차를 가지고 집으로 가는데도 차도
입구에서 사람들에게 막혀 나갈 수가 없었다. 앞에 차들은 사람들이
흔들고 있고, 흥분한 응원단 일부는 차 지붕에 올라가 쿵쿵 뛰고
있었다.
김 씨가 후진하자,
'야, 저 차도 잡아.. 박살내버려'
하면서 따라와서 재빠르게 유턴하자, 욕설과 함께
쫓아왔다. 결국 김 씨는 간신히 응원단이 없는 골목에서 차를 세워두고
새벽까지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풍경3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민족반역자 처단’이라는 만장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만장 바로 아래에는 나무 의자 하나뿐인 단출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는 비마저 흩뿌리고 있어서 광장은 훨씬 을씨년스러웠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돌처럼 단단한 야구공이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 띄엄띄엄우산이 보였지만 대부분 그냥 비를 맞거나 일회용 비옷을 입고
있었다.
과연 그가 나타날 것인가.
그가 나타나서 저 성난 군중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을까. 그리하여 예수처럼 군중들이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용기 있는 자 내게 야구공을 던져라!’고 외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종교나 민족의 지도자도 아니요, 유명 작가도 아니다. 그저 대한민국의 덫에 걸러든 아주 맹랑한 소설가일 뿐이었다.
‘정말 내가 민족
앞에 맞아 죽을 짓을 했다면 나를 처단해도 좋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자신을 항해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네티즌을 향해 단언을
했다. 물론 격앙된 국민감정을 고려한 한 언론의 고육지책 같은 중재이긴
하지만, 야구공으로 몰매를 맞게 한다는 연극적 구상은 희대 해프닝이 될
가능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권력 핵심부에서 그를
설득했다고도 했다.
처음 사람들은 단순한 말장난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그날이 다가올수록 그 말의 가능성은 조금씩 현실성을 띄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인터넷 논쟁은 더욱 불이 붙었다.
쥐뿔은 무모했다.
일 대 다수, 한 사람이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다수와
싸운다는 것은 사마귀가 수레와 맞서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이요,
벌거벗은 채 말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 특히
인터넷 토론은 아무리 쥐뿔이 능변자라 해도 처음부터 무모한 싸움이었다.
상대는 모두 숨어서 총을 겨누고 있는데 본인은 한 거리에 나와 맞서고 있으니 세상에 그 만큼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가 반일 감정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는 차에
쥐뿔이 나선 것은 그야말로 섶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든 것과 같았다.
마침내 그가 논쟁을 중지하고 공개된 자리에서 대중들과 직접 맞장을 제의한 것이다. 누구든 토론에서 나를 이길 수 있다면 야구공에 맞아 죽어도 좋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 기염에 고무된 한 언론사가 나서서 연극과 같은 무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가 몰매 맞아 죽든 그렇지 않든 세계사에 영원히 남을 연극에 참여하기 위해 시민들은 궂은
날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장군님 앞 광장에 가득
몰려들었다.
마침내 그가 나타나 의자에 앉았다. 그는 아주 당당했다. 그리고 토론이 시작되었다. 중재한 언론사의 편집국장인 사회자가 개회 선언을 하자마자 한 젊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대로 뛰어올랐다. 그가 무대에 올라옴과 동시에
일당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서 준비한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긴 머리를 펄럭이는 한 젊은이는 사회자를 옆으로 밀쳐내고 소리쳤다.
“당신과 토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죄를 받아야겠소!”
그러자 또 한 젊은이가 올라왔다.
“역사와 민족
앞에 무릎을 꿇으시오!”
“옳소!”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사회자가 질서 있는 진행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고, 오히려 제지하는 진행자들을 무대 아래로 밀어내
버렸다.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막무가내 젊은이들을 응원했다.
“무릎을
꿇어라!”
이제는 막무가내들이 쥐뿔을 에워싸고 금방이라도 칠 듯이 위협을 했다.
여기저기서 맞장구가 터져 나왔다.
꿇어라,
꿇어라...
군중들의 소리는 순식간에 하나의 목소리로 광장을 압도해 버렸다. 한 목소리로 외치는 군중들 위로 그들이 뿌리는 유인물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 속에는 지금껏 쥐뿔이 주장한 중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왜 우리만 정당한가.
왜 우리의 역사만 올바르고 남의 역사는 왜곡인가.
왜 ‘동해’라고 하는 것만 정당한가. 중국에도 동해가 있고, 일본은 서해인데 그것이 용납될까. 차라리 독도를 일본에 주고 더 큰 것을 얻을 수는 없을까.
왜 우리의 지성인들은 한번쯤 이런 의문을 던지지 않는 걸까.
연암 시절의 북벌론과 지금의 친일 청산론은 민족적 우월감이 뒤틀려 낳은 열등감의 일종이며
자기불만족에 자해하는 모습이다.
프랑스는 독일에 그렇듯 당했지만 그들의 자부심은 꺾이지 않았다. 우리 역시 임진왜란 뒤 별다른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은 채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건강한 자부심이었다.
주심인 미국인 심판은 정당했고, 부심인 일본인 심판도 정당했다. 그가 미국인이고,
일본인이기 때문에 더 비난하는 것은 국가 수치이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
야구공이 하나가 쥐뿔 쪽으로 날아들었다. 공은 그의 옆을 비껴갔다. 연이어 몇 개가 날아들었다. 그는 피하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공은 모두 비껴갔다. 또다시 여러 개가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그 중 하나가 그의 이마에 명중했다. 퍽-.
그의 고개가 수그러졌다. 와- 하는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가 곧 고개를 쳐들고 바로 앉았다.
“쳐라!”
그 순간 일제히 공들이 날아들었다. 어느덧 그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군중들의 함성은 더 커졌다. 공은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결국 쥐뿔이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뒤에도 공은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일일구가 달려왔다. 그가 실려 갔다.
결국 인류사상 유래가 없는 처형이 벌어지고 말았다. 비록 병원으로 실려 가서 치료도중 사망했지만 현장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공개처형’이라 할 수 있었다. 사형제도가 있음에도 수십 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던 나라에서 그 제도가
폐지되자마자 그런 어처구니없는 공개처형이 일어났다. 그것도 이슬람이나
북조선도 아닌 선진국 대열에 있는 그 자랑스런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중 재판이라니.
아니 공개처형, 그것도 야구공 공개처형이라니 온 세계가
어이없어 했다.
사실 공개처형이 일어난 바로 그날도 그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 야구공이라는 국민 스포츠의 구기를 빌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격앙된 국민들의 감정을 다소나마 가라앉혀 보자는
대한민국 지도층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가마솥에 거짓으로
사람을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이란 게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저 적당히 야구공 몇 개 정도 던질 것이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그것도 공에 맞아 쓰러지고 피를 보면
사람들은 겁이나 그만 둘 것이 여겼는데 오히려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도 쥐뿔 씨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쥐뿔도 없는 소설가 주제에 성난 군중 앞에 나가기는 왜 나갔으며 군중들이 공을
던지면 그때라도 도망치면 될 것이지 끝까지 버터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죽어야 저승을 맛을 아는 것이 아니라 죽여야 끔직한 지옥 맛을 아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공화국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죽은 그가 남긴 우화 하나만 자신의 죽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完)
* 1955년 경북 청송
출생 * 주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2동 한신 아파트 102-1102 * 전화 / 016-9612-3366(H.P),
504-5981(집), 501-7102(학)-교환 102 * 199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 작품집 / 소설집 [또야 안뇽]
[돈돈] 잡감집 [촌놈과 상놈](2003) 장편소설 [가롯의
창세기] 소설집 [우리집에 왜 왔니](2008) * 수상: 제5회 부산작가상. * 이메일 : aremal@hanmail.net * 현) 지역연대와 국제교류위원회
위원장 <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