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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現代時調)에 나타난 서정성(抒情性)
유 준 호
1. 들어가며
문학의 궁극적인 본질은 미적가치(美的價値)이다. 이 미적가치(美的價値)는 작품의 사회성과 자율성(autonomie)에 연관되어 있어 그리 간단명료(簡單明瞭)하게 말할 문제가 아니다. 현대시조에서의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서정성의 진폭(振幅)은 변하는 사회의 모습과 같이하여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시조작품들이 관념과 풍류 일반이었던데 반하여 현대시조는 심리적 잠재적 감정의 질서가 드러나고 있다. 문학은 시대적 반영이요, 개인적 삶의 구조적 반응이라는 문학의 일반론이 현대시조에 그 모양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작품들은 작자와의 정서와 정체성(identity)의 끊임없는 소통(疏通)과 대립 갈등(葛藤)으로 생성되는 언어의 교직(交織)을 통하여 태어난다. 그러므로 작품의 감상 이해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 편의 시조를 동물(사람)에 견주어 보면 이미지는 살, 리듬(음보)은 피 흐름, 표현되는 의미는 뼈이다. 이들의 조화(調和)로 작품은 탄생한다. 우리는 작품을 이해 감상할 때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 편의 시조 작품은 프리즘 같아서 만나는 독자에 따라 이미지로서 스펙트럼을 일으키고, 그 느낌도 골짜기 사이를 울리는 메아리 같아 읽고 듣고 보는 이에 따라 감흥이나 이해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시조를 재단(裁斷)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나름으로는 객관성 유지에 초점을 맞춰 작품 속에 나타난 주의식을 중심으로 나눴다.
2. 현대시조(現代時調)의 서정성(抒情性)
2.1 정체의식(正體意識)과 서정성(抒情性)
정체의식은 '본래적 자아' 즉, ‘스스로'를 발견하는 존재의식과 동일선상에 있다. 오늘의 인간의 기능화와 도구화가 가져오는 소외의식은 존재의 위기를 가져오고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한다. 여기서 자기 진단을 바탕으로 인간 삶의 참모습을 찾아 나서게 되고, 정체의식을 발로하게 한다. 즉 현대시조는 개별적 의식인 자아의식의 겪음을 현실 국면의 겪음으로 전이(轉移) 확장(擴張)하여 본래의 자아발견을 기도하게 한다.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우제선의 '갈대'와 이상덕의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곧은 줄기 푸른 잎이/ 영원을 살고파라/
햇살을 머금고서/ 반짝이는 은빛 머리/
애오(愛惡)를 아예 모르는/ 달관(達觀)의 몸짓이여//.
바람의 횡포 앞에/ 흔들려 시달려도/
다소곳 허리 굽혀/ 우쭐대지 않는 겸허(謙虛)/
보이지 않는 암향(暗香)은/ 고고(孤高)한 체취(體臭)ㄹ러라.//
눈길 끌고 싶은/ 애교도 모르는 듯/
순수한 너의 진실/ 꼿꼿한 그 모습에/
내 마음 사랑에 젖어/ 네 곁에서 살련다.”
-우제선, 갈대(시조문학 03, 가을호).
이 시조에 나타난 리얼리티는 자연물을 통한 서정성에서 찾아진다. 시인은 자연의 섭리와 그에 따른 현상을 민감하게 포착하여 이를 정서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자연 현상을 인사(人事)에 접목시켜 자아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현대시조가 지향하고 있는 구상적 개성어로의 참신성을 추구하지는 못했지만 '애오(愛惡)''달관(達觀)'겸허(謙虛)''암향(暗香)' '고고(孤高)한 체취(體臭)'와 같은 추상어로 옛 시조의 냄새를 은연 중 풍겨나게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를 통하여 시적 진폭(振幅)과 자아 추구의 이상점(理想點)은 충분히 살려 정체성을 확보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추상어를 시에서 과용(過用)하면 자칫 과거 지향적 퇴영(退嬰)에 빠지기 쉽다는 점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고고(孤高)한 체취(體臭)'와 같은 구절은 우리 귀에 익숙한 전래의 관용구이기도 하다. 또 둘째 수 종장 첫 구에 “보이지 않는 암향(暗香)은”이라고 표현했는데 '않는'은 보조용언(補助用言)임으로 "보이지"에 따라붙어 '보이지 않는/ 암향은'으로 읽어야 되니, 이렇게 될 때 5, 3의 음수율이 되어 음보가 어긋남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갈대에서는 흔히 대나무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선비의 고절(孤節) 같은 것이 느껴진다. '바람의 횡포' 이는 아마 세상 강자(强者)들이 부리는 약자(弱者)에 대한 횡포이리라. 그 횡포에 시달려도 우쭐대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우쭐대는 것이 아니라 속뜻은 '맞서는' 것이라 파악된다. 그런데 '갈대'는 무슨 향기를 풍겨내고 있을까. 갈대꽃은 향기가 없다고 흔히 말하는데 이는 보통의 후각(嗅覺)으로는 챙길 수 없는 향기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제선 시인은 그 향기가 체취(體臭)라고 한 듯하다. 화려하지도 애교도 피울 줄 모르는 갈대이지만 그 순수성 속에 숨은 진실성에 시인은 반했고, 그래서 물아일체가 되고 싶은 심경이 일어난 것 같다. 시조에서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관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구체적인 심상이나 정서와의 결합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사례를 이상덕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외로움이 가득할 때/ 떠오르는 그 얼굴//
아름다움 찾아와/ 아픔을 달래주는//
그 사람/ 곁에 있으면/ 아픔을 보내겠지.//
둥실 떠가는 흰 구름/ 보이지 않는 얼굴//
바위가 반겨주는/ 생각나는 그 얼굴//
그 사람/ 수정 같은 물/ 외로움을 달래겠지//.
-이상덕, 보이지 않는 얼굴(새시대시조, 09 봄호)
이 시조의 키워드는 '그 사람'이다. 그 정체는 확실하지 않지만 시인의 시심(詩心)를 용솟게 하는 상상력의 주인공이다. 이상덕 시인에게는 '그 얼굴'은 구상적인 어떤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추상적 인물일 수도 있다. 아니 절대자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현상(現象)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심상(心象)으로는 환히 보이는 그 존재를 통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는 시조이다. 외로울 때면 그 외로움에 오버랩 되어 나타나는 그 얼굴은 과연 누구인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다. '그 얼굴'은 아름다움을 몰고 와 아픔을 달래주고, 아픔을 가시게도 한다. 막연히 흰 구름 속에 사는 '그 얼굴'-보이지 않는 얼굴은 그리움의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는 수정 같은 마음씨를 지니고 있다. 그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로 외로움을 달래주는 인물이다. 이 작품의 정서는 "외로움"이다. 그래서 '외로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작품의 앞뒤에 수미(首尾)상관(相關)시켜 배치한 것 같다. 인간은 본래 혼자라는 말이 있다. 올 대도 혼자 왔듯이 갈 때도 혼자 가는 것이 인간 삶의 여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생래적(生來的)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그러나 고독을 막연한 희망으로 이기며 그것을 삶의 활력소로 삼아 살아가는 존재가 또한 인간이다. 위 작품에서 작자는 고독을 통하여 현재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정체의식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이다. 다만 표현상 유의할 필요가 있는 곳은 둘째 수 초장이다. ‘둥실 떠가는 흰 구름’ ‘보이지 않는 얼굴’ 은 5, 3, 5, 2의 음수율로 5, 5 과음보의 겹침으로 시조의 음보를 힘겹게 하고 있다. 이런 외형적인 점을 빼고 이의 표현상의 작품성을 본다면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엠프슨(1906~1984)이 말하는 언어의 뉘앙스로서의 애매성이 배어 있어 읽는 이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나무는 입도 없이 물을 잘 빨아올린다.
목숨만큼 계산하고 남는 건 방출하여
순환의/ 깊은 이치를 자연스레 감는다.
숲속의 맑은 흐름 강과 바다 얼우다가
하늘을 높이 올라 구름 끝을 희롱하고
나무숲/ 그리운 밤엔 빗살 곱게 또 내린다.
넘침에도 부족하다 백 길 천 길 쌓아놓고
헛기침만 쏟으면서 인간들은 투정인데
이슬에/ 가슴 씻는 나무, 네 눈빛은 사랑이다.
-문복선, 나무와 물(가람문학 30호)
이 작품은 나무 삶의 신비와 물 삶의 순환성, 인간 삶의 패턴을 세 수의 작품 속에 담아두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의 삶의 편리대로 각 사물이나 일에 의미를 붙이고 그 의미대로 그 사물과 일을 이해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자는 나무는 입이 없다고 했나 보다. 그러나 어찌 나무가 입이 없겠는가. 입의 역할이 영양분을 흡수하는 기관이요, 숨통의 보조기관이라면 나무에게선 뿌리나 잎이 바로 입이 아닐까. 어쩌든 나무는 인간이나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입과는 생판 다른 뿌리로 생명수를 뽑아 올려 마시고 있다. 나무는 분수를 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자기 생명체 유지에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나머지는 밖으로 내보내 되돌려준다.
'물'은 생명체에 있어서 언제나 생명의 원소(元素)이다. 나무는 제 나름의 생명체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이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는다. '물'은 우주 자연의 섭리인 생명의 순환을 하며 세상과 어울려 하나의 세상이 되고 있다. 천지를 오가며 생명체를 기른다. 불교사상으로 보면 '물'은 윤회(輪廻)를 하고 있다. 자기의 본체인 순환(循環)의 정체성을 자연 속에서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인간의 욕심은 하늘을 뚫고도 남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우리 관용 어구에 '줄수록 양양한다.'는 말이 있다. 작자는 다른 생명체에 비하여 문명된 인간의 삶 누림은 넘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헛기침하고 투정부리고 한다고 작자는 이를 질타(叱咤)하고 있다. 본디 인간의 본체는 나무와 같이 순수한데 살면서 생긴 욕심의 그물에 걸려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나무는 이슬로 욕심의 보따리가 든 가슴을 맑게 씻어내고 욕심 대신 사랑의 눈빛을 세상에 투사(投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존재의 본질을 천착하며, 그 본질을 통한 정체의식을 바탕에 깔고 쓴 서정시조라 생각된다.
2.2 현실의식(現實意識)과 서정성(抒情性)
「현실 의식이란 주어진 사물과 생의 총체로부터 그것과 더불어 그것의 형상인 현실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의식 및 그 내용이다. ----현실의식의 기초는 통각(統覺) 체험에 있다. 통각은 소여(所與)를 수동적으로 접수하는 일상적 지각경험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 -----현실 의식의 능동성은 치열한 역사적 체험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김지하, '현실 동인 제1선언', '현실의식이란 무엇인가'란 글에서) 어느 시대이고 그 시대에 알맞은 현실의 개성적 풍속이나 의식이 하나의 상징적 기호로 나타난다. 이때의 상징적 기호는 그 시대의 분위기 반영물이다. 개인의 정서는 그 개인이 속한 사회 현실과 유기적으로 긴밀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시인도 시조의 대상이 현실의 현상임으로 시조는 그런 현실의 인식 속에서 출발하여 사물에 대한 새로움과 그 기능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시인이 대하는 현실은 대개 두 가지의 행동 양태의 서정성을 띠게 된다. 하나는 현실 초월한 입장이며 또 하나는 그 현실과 마주선 대결의 입장이다. 김영환의 '숭례문을 보내며'와 이건영의 '꽃사슴에게'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현실적 시대 의식을 대립 반영한 작품이다.
지구는/ 온난화로/ 이변(異變)들이 이어지고//
인성(人性)은/ 기절한 채/ 깨어날 줄 모르는가.//
문명이/ 허물고 있네./ 우주의 법칙 자연을.//
-김영환, 숭례문을 보내며(시조문학, 08 여름호)
위 시조 작품에서 만나는 현실은 현실과 대결하여 직접적 행동을 유발하는 현장성 현실이다. 이 작품은 초장과 중장의 대구(對句) 배치로 전형적인 시조 형태를 보여주면서 인간들의 무분별성(無分別性)과 탈인간성(脫人間性)을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종장에 가서 그 결과를 배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시조의 유형으로 볼 때 개념시조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인성(人性)의 실종(失踪)이 가져오는 환경 파괴를 직설적으로 "온난화" "인성" "기절" "문명" "우주법칙" 등의 추상적 어휘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문명 비판하면서 순수 자연에의 회귀(回歸)를 소망하는 작자의 마음이 여과(濾過)없이 표출되었다. 문명이란 이름으로 파괴되는 자연은 인간에게 재앙(災殃)을 가져다주는데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그것이 멈춰지지 않고 있다. 그 멈춰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우주의 법칙, 자연이."란 강조법상 도치법을 사용하여 표출해 내고 있다. 주제 의식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여기서 '우주의 법칙'은 '우주 법칙'으로 하면 어떨까. 이 작품은 전형적인 전통시조 양식인 초중장의 대구 형식 배치와 종장의 환기가 있어 시조의 정격에 딱 들어맞는데 '우주의 법칙'이 어긋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문학성을 생각하여 직설보다는 비유를 통한 사상(寫像)이 살아 숨 쉬는 표현의 묘를 살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2008년 2월 10일 밤에 발생한 숭례문 방화 사건이다. 그 많은 전화(戰禍)에도 끄덕 않고 지켜져 왔던 민족 자존심의 상징이었던 국보 제1호가 겨울의 끄트머리를 잡고 고요히 깊어가는 밤에 늙은 망령(채종기(당시69세)가 방화)이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건이다. 온 민족을 멍한 아픔에 빠뜨린 사건에 대해 조금은 한숨 서린 심회를 보편적 개념으로 단수(單首)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혹한을 참아 사는 민초(民草)들 신음소리
이념의 울타리 속 꽃사슴 너는 알까
칼보다 무서운 말씀 살을 에는 하루여.
-이건영, 꽃사슴에게(새시대시조. 09 봄호)
전형적인 정격시조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끝없이 삶의 고달픔을 몸에 달고 사는 것이 민초로 대변되는 서민 생활이다. 민초란 말은 서민들의 끈질긴 삶의 모습이 아무렇게나 들판에 버려진 잡초나 들풀과 같다고 하여 비유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 사회를 지탱하는 도구적 가치의 추구에서 느끼는 개개인의 소외의식은 깊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개인은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 독일의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란 글에서 “삶의 세계의 식민지화”라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개성의 상실로 인간의 자율성이나 창조성, 내면성의 상실을 가져오게 된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서민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기에 민초들의 삶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그 느낌이 고달프고 춥다. 그래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의 '민초'는 여리고 약한 존재의 이미지이지만 '꽃사슴'은 이에 대립되는 고귀한 존재, 아픔을 모르는 존재, 어려움을 모르는 삶의 상위 계층에 속하는 강자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혹한"은 빈약한 삶을 사는 이들이 떨어야 하는 현실이며, "이념의 울타리"란 말은 사회 선도자들이 내뱉는 자기 합리화적 사고와 행동에 갇혀 주변을 돌볼 줄 모르는 상황이라고 추정되는데, 거기에 꽃사슴이 살면서 민초들에게는 생을 좌우하는 무서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으로써 민초들로 하여금 하루하루가 살을 에는 삶의 연속임을 느끼고 겪게 한다. 이 작품도 앞의 작품과 같이 현실과의 대결(對決), 고발(告發) 양상을 보여주는 다분히 비평적 시조이다. 대개 사회 고발성이 있는 작품은 직설적이기 쉬운데 이 작품은 표현 기교에서 시적 비유와 상징을 적절히 배치하여 이미지를 통한 통각(統覺) 체험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문학성을 얻은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2.3 서원의식(誓願意識))과 서정성(抒情性)
현대시나 현대시조가 아직도 이 땅의 독자를 확실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관심 밖에서 발버둥치는 것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독자의 공감 밖에서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져 있던 데에 있었다 한다. 문학은 인간의 정신 통로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여야 하는데 인간에 있어 공감과 체험의 진폭(振幅)을 넓게 해주는 길 가운데 하나는 서원(誓願orayer)의식이다. 이는 예로부터 기원(祈願)에서 출발하였다. 인간 생활을 혼돈과 어둠, 절망(絶望)의 지평이 펼쳐진 곳에 있다고 보고, 이를 뛰어넘기 위한 마음 자세에서 기원의식이 생기게 된다. 이는 서구 물질주의에 휘청거리는 정신의 기저를 받혀주는 주춧돌 역할을 한다. 우리는 늘 치열한 삶을 살며 이상을 펼치며 절망을 수평선 저쪽으로 멀리 보내려고 쉴 새 없이 기원하고 기도한다. 이런 갈구(渴求)가 바로 서원의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인간의 의식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인간은 신성(神聖) 회복(回復)을 좋아하는데 이를 위하여 시나 시조는 그 일익(一翼)의 기능자 역할을 한다.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이도현의 '달항아리', 김성숙의 '기도'등이 있다.
하얀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텅 빈 가슴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둥글게 하늘 문 열고/ 세상 품게 하소서.
-이도현, 달항아리(1)(가람문학 30집)
달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1437호의 조선 시대 달항아리가 대표적이다. 모양이 달덩이처럼 둥글고 원만하다고 하여 달항아리로 불리는데, 대략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맑은 흰빛과 너그러운 둥근 맛으로 요약되는 조선 백자의 미를 대표하는 항아리로 꼽힌다. 아무런 장식 없이 희고 깨끗한 색깔과 둥글둥글한 생김새에서 넉넉하고 아름다운 보름달이 떠올려진다. 그리고 그 모습이 몹시 순정적이며 티가 없다. 비움의 미학이란 말이 있다. 비움으로써 아름다움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 작품이 그것이다. "하얀 마음" "텅 빈 가슴" "둥글게" " 하늘 문" 등 비움이 있는 시각적 이미지와 촉각적 이미지로 된 비유어를 통하여 욕심 없음을 표출하고 있다. 달항아리의 꾸밈없음을 통하여 스스로도 그리 되기를 소망하는 기원의 시이다. "하얀 마음"은 어떤 물욕도 탐욕도 끼어들어 있지 않은 말 그대로 깨끗하고 청정(淸淨)한 상태를 가지고 무한을 표용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시어이며, "텅 빈 가슴"은 허전한 가슴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로 가득 찬 가슴이다. 청정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순수의 가슴으로 사랑을 하게 해달라고 시인은 서원(誓願)하고 있다. 〜하소서’와 같은 기원형(祈願形) 어미는‘나’를 존재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절대자와 연관되고 있다.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보면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이 있다. '생각함에 거짓됨이 없이 바르다'는 뜻이다. 그 사무사적(思無邪的)인 기원의식이 여기에 숨 쉬고 있는 아름다운 정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득히 먼 하늘을/ 욕심껏 당겨놓고//
황홀하단 거짓말로/ 속 찬 생을 비워내며//
낮아진 순례의 옷자락 뿌리까지 잔잔해.//
울음 풀어 씻는 허울/ 갈급한 무릎 사이//
결 고운 호흡으로/ 낯선 길에 접어들면//
걸러서 빚어낸 영혼의 품 안겨오는 백합향.//
-김성숙, 기도(시조문학, 08, 겨울호)
김성숙은 자연미가 풍기는 실용어를 시어로 사용하면서 외면적 자연의 세계를 내면적인 인간의 세계로 끌어당겨 기독교 정신을 바탕한 기원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조에서 시적 자아는 ‘당겨놓고’ ‘황홀하단’ ‘비워내며’ ‘순례의 옷자락’ 등 적극적이면서도 함축적 의미가 개재된 말들을 구사하여 기원의 마음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수의 "울음 풀어 씻는 허울" "낯선 길에 접어들면"은 기원의 자세와는 거리가 있는 듯하나 종장의 "걸러서 빚어낸 영혼의 품"은 절대자에게 안기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이 절절하다. 다만 이 구절은 시조의 음수 배치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걸러서/ 빚어낸 영혼의 품”으로 하여 3, 7로 생각하여 그리한 듯하다. 그런데 이는 언어 구조상 '걸러서'는 빚어낸'이 받는 부사어로 '걸러서 빚어낸'이 서로 붙어 덩어리 말이 되어야 하니 음보율 배치가 6, 4로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기독교적 믿음이 신앙적 차원에서 승화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현실적 자아와 가치 추구의 자아가 서로 합일(合一)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현실을 삶의 광장과 미래의 참된 나를 만나는 만남의 광장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나 시조에 있어서 신앙적 배경은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더욱 깊고 부드럽게 해주는 구실을 한다. 기원(祈願)의 자세를 통하여 하늘과 자아(自我)의 거리를 좁히고 생의 욕심을 비워내며 종교에의 귀의(歸依)는 마음의 평온을 가져온다고 첫수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수에서는 세상의 울음을 풀어내며 세상의 길이 아닌 신령의 길이 낯설기는 하지만 그 길은 백합처럼 향기로운 길이라고 하여 깊은 신앙심(信仰心)을 갈망(渴望)하는 기원을 표출하고 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주신 은혜 감사하고//
은혜가 차고 넘쳐/ 모든 일 형통하니//
여생을 사랑의 빚진 자로/ 섬기면서 베풀리라.
-정순량, 빚진 자(가람문학 30집)
이 작품에서의 서정적 자아는 은혜를 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런 마음 자세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맥을 잇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절대자이다. 이 시에서 시적 자아인 ‘나’를 존재하게 하고 행동으로 나서게 한 것은 ‘나’ 아닌 '하나님'이다. 이 시 속의 자아는 기독교적 섭리 사관에 크게 기대고 있다. 이 시속의 자아인 '나'는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에 예속(隸屬)되고 있다. '나'는 감동(感動)의 존재일 뿐이다. 무량(無量)한 '하나님'이 주신 은혜, 만사형통(萬事亨通)하게 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 이것은 결국 삶의 빚이 되고 있다.
그래서 남은 생(生)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스스로도 누군가, 또는 어디에 베풀음을 하며 살겠다는 다짐의 서원(誓願)을 하고 있다.
2.4 탐미의식(耽美意識)과 서정성(抒情性)
탐미의식의 문학은 문학을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위한 자족적, 자율적인 존재라고 보고 문학에서의 기교의 가치는 미적 가치의 발현이라고 보는 관점의 세계관을 가지고 표현된 작품이다.
정신보다도 관능을 중시하고, 도덕성보다 미(美)의 세계에 빠지고 내용보다 예술적 형식을 중요시하는 르네상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향은 고대 헬레니즘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근대에 와서는 이것이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 이론이 퍼지면서 문학은 아름다움 자체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을 낳게 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에 와서의 탐미의식은 주관적이고 감동적인 데에 미적 가치의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관조적이며 사고(思考)적인 미의식(美意識)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이런 경향의 작품은 신재후의 '수락산', 김길순의 '연꽃' 등이다.
관악산 우러르며/ 새 소리로 마음 씻고//
동두천 소요산은/ 골짜기도 유아(幽雅)하다//
곡곡(曲曲)의/ 비경을 보며/ 꿈의 시화(詩畵) 엮는다.//
노목(老木) 숲 울창하고/ 좋은 조망(眺望) 열려 있네.//
약수굴(藥水窟) 자재암(自在庵)엔/ 원효대사 숨결 들려//
시원한/ 수락산봉은/ 산행 맛이 더 짙어.//
-신재후, 수락산(水落山)(새시대시조 08. 가을호)
이 작품을 보니 "멀리 한적한 산굽이 비스듬히 휘도는 돌길을 따라 오르니/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몇 채의 인가가 있어/ 수례를 멈추고 석양에 비치는 단풍 숲을 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 이월에 핀 꽃보다도 붉구나(遠上寒山石徑斜/ 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하는 두보(杜甫)의 "산행(山行)"이란 작품이 떠올랐다.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시인의 모습이 선연하다. 일찍이 동양의 시화(詩話)들은 "자연(경치)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경치(자연)가 있다.(景中詩 詩中景)이라 했다." 신재후 시인은 이 말에 호응(呼應)이라도 한 듯하다. 마음을 새소리로 씻는다는 것은 이미 자연 동화의 경지이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골짜기는 그윽하고 우아하여 그 자체가 한 폭의 시화(詩畵)가 되고 있다. 시인의 시심(詩心)과 자연인 산심(山心)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 시조이다. 이 작품은 감정 몰입이 매우 두드러지고 감흥(感興)의 진폭(震幅)이 잔잔한 가운데 넓게 퍼지고 있다. 작자는 약수굴(藥水窟) 자재암(自在庵)에서 원효대사의 숨결을 들었다고 했다. 아마 초자연적 무욕(無慾)의 묵언(黙言)을 듣고 공(空)의 세계를 느끼지 않았을까. 이 작품은 탈속(脫俗)의 세계를 우리보고 느껴보라고 하는 듯하다. '우아(幽雅)' '비경(秘境)' '조망(眺望)' 등의 시어는 감정을 차분히 눌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풍기는 느낌이 조용함을 자아내게 하는 시어(詩語)이다. 시인은 자연에서 느끼는 격렬한 감정을 차분히 누르고 감정을 곰삭혀 미적 감흥을 표출하고 있는데 그 모든 감흥을 "산행 맛이 더 짙어."라는 시구(詩句)로 요약하고 있다. 자연으로 마음을 씻고, 시화(詩畵)를 엮으며, 자연을 조망(眺望)하고, 자연의 맛을 느끼는 시인은 자연의 미에 홀딱 반하여 자연이 되고 있는 듯하다. 자연을 관조(觀照)한 미적 시안(詩眼)이 유려(流麗)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한 가지 쌀독에 뉘라면 종장의 첫 구에 "의"를 씀은 시조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데 전통적으로 안 쓰는 것이 통례라 하여 기피하는데 "곡곡의 비경을 보며"라 표현한 점이라 하겠다. 차라리 "저 곡곡 비경을 보며"라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는지.
얼마를 사모하여/ 미소로 피었는가.//
번지는 자리마다/ 차오르는 그리운 빛//
찬 이슬 달이고 달여/ 별빛 되어 달빛 되어.//
-김길순, 연꽃(가람문학 30집)
위 작품은 부여 연꽃 축제 시화전에 선보인 것으로 전통적인 운율 및 음보를 갖춘 평시조의 전범(典範)을 보여주고 있다. 앞의 작품이 인간의 자연화 즉 의물법(擬物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작품은 자연의 인간화 즉, 의인법(擬人法)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리고 앞의 작품이 묘사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사모하여'⤍'미소로 피고' '이슬을 달여'⤍'별빛, 달빛 되어'와 같이 감정이입이 되어 독자로 하여금 내면투사작용(內面投射作用)에 의하여 시적 대상 속에 스스로가 들어가 있는 듯이 느끼게 하는 인과관계(因果關係)에 의한 윤회적(輪廻的) 변이(變異)가 이루어져 순수하고 순박한 연꽃의 이미지가 맑고 밝게 드러나 있다. 얼마나 깔끔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인가. 여기에 쓰인 시어는 여성적 이미지가 있는 것들이다. '사모' '미소' '달빛' '별빛'등이 그것이다. 그래 그런지 이 작품은 교교(姣姣)한 달밤에 한복 고이 차려 입고 뜰을 거니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조는 언외지의(言外之意)나 여운(餘韻)이 표현의 묘(妙)가 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종장 끝맺음을 "별빛 되어 달빛 되어."라고 하여 열린 구조로 함으로써 그 묘를 보여주고 있다. 그 생략의 내용은 상상하는 이에 따라 아마 여러 가지의 의미 내용을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읽는 이에게 숱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도록 하고 있다. 시나 시조에서의 이런 생략 기법에 의한 구조(構造)는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을 열어두는 역할(役割)을 한다.
옹이진 아픔 잊고/ 늘 푸른 너이기에//
단장한 맑은 얼굴/ 하늘 향해 열렸어라.//
고결한/ 청정함이여./ 그대 이름 사랑이라.
-이흥우, 연꽃의 마음(시조문학, 09 가을호)
이 작품에 대하여 작품 해설을 쓴 김병희(문학박사)는 「물 위에 핀 연꽃의 모습에서 하늘을 향해 열린 마음을 읽어낸다. 고결하고 청정한 존재이기에 꽃잎을 피우는 일조차 하늘과 소통하려는 몸짓이라고 전제하여 시인은 그 마음을 사랑이라 일컫는다.」고 하고 있다. 사랑은 세상을 포용하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미학적인 단어이다. '아픔도 잊고' '고결하고 청정'하게 티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청정무구(淸靜無垢)의 삶을 유미적(唯美的) 시야(視野)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2.5 영상의식(映像意識)과 서정성(抒情性)
시조에 나타난 지배적 인식이 영상의식으로 구조 형성된 이미지 중심의 작품을 말한다. 즉, 언어로 그려내는 풍경화 형태를 띤 영상조립시점(frane image-문덕수, 문장 강의, 시문학사, 1985. p63)으로 구축된 현대시조가 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물리적 공간에 시적 시야의 축을 형성하고 가시권 안에서 이루어지거나 있는 일, 있을 수 있는 일을 묘사하는 것은 서경적 회전시점이다. 이는 영상조립시점과는 그 구축하는 면이 똑 같지 않다. 그렇지만 이도 이미지의 시적 경향을 보여주는 현대시조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영상의식과는 좀 거리가 있다.
원래 이미지란 말은 심리학적 용어로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을 가리킨다. 주로 시각적이나 감각적인 것도 이런 이미지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폴 발레리(Valery, Paul)가 현대시는 80%가 이미지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듯이 요즘 시나 시조의 흐름에서 이는 빼놓을 수 없는 감초(甘草)이다. 오래 전에 우리 시조에는 이런 계통의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이 현대와 접맥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고려말 이색의 작품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온 매화는 어느 곳에 픠었는고/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이 바로 그것이다. 은유와 상징이 작품 속에 눈 뜨고 있는 시조이다. 백설이 휘날리고 먹구름이 몰아치는 현실이지만 그것을 이기고 매화꽃은 어딘가 필 것이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저물녘 갈 곳 없이 홀로 헤매는 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한 폭의 사실적 풍경화를 그려놓고 있다. 여기서 '구름'은 '간신 무리'. '매화'는 '우국지사'. '석양'은 '기울어가는 왕조'이다. 현실적 상황을 자연의 경치에 빗대 표현하고 있다. 스산한 한 폭의 동양화가 연상되지 않는가. 현대시조로 영상의식을 서정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이런 환치(換置) 은유를 통한 이미지의 펼침을 보여준 작품엔 필자의 '별', 김옥중의 '달' 등이 있다.
밤하늘 앙가슴에 깨져 박힌 유리조각들
예리하게 반짝이며 어둠살을 저며 낸다.
하얗게 날 세운 날로 우리 죄도 도려냈으면…….
-필자, 별(새시대 시조 08 봄호)
이 작품에 대하여 박영교(한국시조시인협회 수석부회장)는 "좀 더 참신한 시조를 위하여"(새시대시조 2008 여름호 계간평)란 글에서 현대시조는 상식을 초월하고, 의식의 혁명, 패러다임의 변화, 은유법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미지로서 시를 담아내야 한다.(윤금초, "현대시조 쓰기"의 10계명)는 말을 인용하여 <별>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 인간사 속에는 많은 일들이 잘못된 것으로 나타나는 점이 많다는 것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은 밤하늘의 별빛을 햇빛 받은 유리조각에 은유하여 표현하면서 그 예리한 빛들은 어둠살을 저며 낸다고 했다. 종장에 가서 시인은 그 어둠살을 저며 내는 그 예리한 빛으로(칼날로 은유) 우리들의 죄(罪)를 도려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披瀝)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 "밤하늘"은 인정이 메말라 가고 거짓이 판치는 어두운 현실(現實) 세계를 은유(隱喩)한 시어이며, "앙가슴"은 그런 음침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가슴 조이며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유리조각"은 별들을 은유한 말로 그런 어둠과 부조리를 도려낼 밝고 환한 세력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밤하늘의 어둠을 뚫고 반짝이는 별이 깨져 흩어진 유리조각 같다는 발상에서 나와 그 별들이 예리한 판단력으로 어둠(부조리)을 도려내고 있는 듯, 시각적 이미지와 촉각적 이미지로 교직(敎職)하여 한 폭의 영상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 또한 생략의 여운을 줌으로써 상상(想像) 날개를 펼칠 공간도 제공하려 했다.
선운사 법고가 하늘에 걸려 있다.
동짓달 바람이 밤새도록 두드려도
두 귀는
어수룩하여
가슴으로 듣고 있다.
-김옥중, 달(가람문학30집)
선운사는 전남 고창군에 있는 사찰(寺刹)이다. 이 시를 읽어보면 한적한 그 산사(山寺)에서 불심(佛心)을 염송(念誦)하며 기원하는 불자(佛子)의 모습이 떠오른다. 불법을 가슴에 울려주는 '법고(法鼓)가 하늘에 걸려 있다.'고 하여 불법의 높음을 은연 중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아닌 바람도 나무(南無-신명(身命)을 던져 돌아가 의지함)의 심정이 들었던지 밤 새워 법고를 두드린다. 그러나 귀가 밝지 못하여 귀로는 듣지는 못하고 울리는 소리만 가슴으로 듣고 있다. 원래 불법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니 언어 밖의 진리가 아닌가. 그래서 바람도 어차피 속세의 존재이니 이를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 같다. 작자는 그 진리를 깨우쳐 주는 존재로 '달'을 상정(想定)하고 있다. 달을 법고에 비유(은유)한 것이 새롭고 그 법고를 바람이 두드린다고 하여 울림을 주고 있다. 달은 법고가 되고 바람은 불심을 그리며 염불(念佛)을 드리는 자로 은유하여 머릿속에 영상을 만들어 주고 있다. 동짓달은 한 해를 넘기는 고비의 달이다. 마지막은 언제나 간절한 것이다. 동짓달 바람은 매섭다. 성깔은 매섭지만 그리는 염원은 간절하여 법고를 두드리며 소원을 염(念)하는가 보다. 속세의 만상(萬象)은 본디 무(無)요, 유한한 존재이니 무한 존재의 법도를 어찌 쉽게 눈치 챌 수 있겠는가. 이 작품도 표현에서 시각과 촉각적 이미지가 청각적 이미지로 초, 중장에 대립 배치되어 공감적 언어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3. 나가며
서정성(抒情性)은 마음 갈피에 일어나는 정서의 물결을 그려내는 한 편의 회화(繪畫)이다. 시(詩)와 시조(時調)는 이를 외면(外面)할 수 없다. 세상이 다변화됨에 따라 문학의 양상도 다기다양(多岐多樣)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시문학(詩文學)의 저류(低流)에는 늘 서정성이 흐르고 있다. 현대시조에서의 서정성은 현실적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그려내려는 자세에서 드러난다. 시인 자신이 현실의 현상을 보고 느끼고 체험한 미적 정서를 생생하게 나타냄으로써 서정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이는 시조문학이 가지는 특별한 영역으로 시인의 선명한 자각과 직관을 통한 체험 공간의 확장에 의해서 갖추어진다. 현대에 와서 문학이 추구하던 인간의 초월, 도덕적, 심미적 가치가 차츰 버려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버릴 수 없는 인간 삶에 있어서의 가치관이기에 문학에서의 서정성 심화(深化)와 확장(擴張)은 시대를 초월한 주요한 과제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조는 현실 사회 속에서 그 시적 대상을 새로운 미적 범주로 수용하는 통로를 찾아 창조적 역량으로 서정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시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난 연대의 특정한 사회적 정황의 표현을 모방함으로써 작품의 미적 구조를 도외시하는 시조 쓰기를 해서는 안 되고, 모름지기 미적 진정성이 깃든 진지한 작업[Arveit] 태도를 견지(堅持)한 작업을 하여야 한다고 본다. 현대시조는 추상적(抽象的) 교학적(敎學的)인 서술이 아니라 독특한 감흥을 자아내는 미적 가치가 신선한 이미지로 구상적 서정성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아울러 시조의 틀을 망가뜨리는 변형시조(變形時調)(사이비(似而非) 시조))를 써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을 성형하여 예쁘게 만든다고 있는 뼈 옆에 쓸데없는 뼈를 더덕더덕 덧대거나 있는 뼈 몇 개를 뽑아버리어 병신을 만든 꼴과 다름이 없다. 아주 부득이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격(正格)시조(전통율격이 지켜진 것)를 쓰도록 표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