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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인들은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까요?
분야 | 현대 시 |
목차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일부러 반대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두고 반어라고 하던데 반어를 사용했을 때에는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을 역설법이라고 하던데 역설법을 사용하는 까닭을 설명해 주세요.
반어의 힘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지요. 대상을 기존의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색다르게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욱 집중하지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제시하면 호기심과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또한 일상적인 말에 변화를 주면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고 그 의미를 더욱 인상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반어법과 역설법은 어떤 대상이라든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일상적인 것과 달리 낯설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먼저 반어법은 표현할 내용을 실제 의미와 반대로 제시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즉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숨긴 채 반대로 말하는 방법이지요. 시험을 망친 아이에게 엄마가 화가 나서 “잘했다 잘했어”라고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반어가 사용된 표현은 본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내용만으로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반어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언어적 반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황적인 반어입니다. 언어적 반어는 겉으로 드러난 말과 숨은 의도가 정반대인 경우로 의미를 강조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중에서
이 시에서 여공들의 얼굴이 흰 것은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했거나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노동만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녀들의 얼굴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창백하고 핼쑥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다음으로 공장으로 가는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럭무럭’은 아무 걱정과 근심 없이 잘 자란다는 의미를 더하기 위한 부사어인데 공장으로 가는 아이들이 아무 걱정이나 근심이 없을 리가 없지요.
따라서 두 표현은 언어적 반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반어법은 독자들을 긴장시켜 여공들은 정말 아름다운가, 아이들은 정말 무럭무럭 크는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지요.
상황적 반어는 시에서보다는 주로 소설이나 희곡에서 사용합니다. 상황적 반어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알고 있지만 정작 작품 속 인물은 그것을 모르고 행동할 때 생기는 반어입니다. 등장인물이 작중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상황적 반어가 일어나지요. 김유정의 소설 「만무방」의 마지막 장면에서 쌀도둑을 잡으려고 기다리던 응칠이가 동생 응오가 도둑임을 알게 되는 장면이 상황적 반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설 :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진실을 내포한다
역설은 겉으로 보면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지만 그 속에 진실이라든가 진리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역설은 반어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신선함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켜 작품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역설은 모순어법과 모순형용으로 나뉩니다.
모순어법은 문장 자체에 논리적인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이에 해당합니다. ‘갔다’와 ‘보내지 아니했다’의 상황은 동시에는 가능할 수가 없는데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들지요.
모순형용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이 서로 조화롭지 않거나 배치될 때를 일컫습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1」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이 아들을 잃고 쓴 것으로 유명하지요. 유리에 비친 차고 슬픈 것은 곧 죽은 아이의 환영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아주 독특한 표현 하나가 눈에 띕니다. “외로운 황홀한 심사”. ‘외롭다’는 말은 고독하다, 쓸쓸하다와 같이 부정적인 정서를 일컫는 말이며, 이에 반해 ‘황홀하다’는 긍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외로운 황홀한 심사”는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을 꾸미는 논리적인 모순을 지닌 것이지요.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끼리 서로 꾸밈을 주고받을 때 이를 모순형용이라고 합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아들을 잠시나마 추억할 수 있다는 설렘이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시를 공부하다 보면 ‘낯설게 하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슨 뜻인가요?
‘낯설게 하기’란 쉽게 말해서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다 보면 듣는 이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비유라든가, 상징 · 역설 · 반어 등을 사용하여 일상적인 말보다 낯설게 표현하면 긴장과 집중 효과가 생기지요. ‘낯설게 하기’는 바로 이러한 전달방식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왜 시인들은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까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분야 | 현대 시 |
목차
시에서 말하는 사람을 시적 화자라고 하는데 시인과 시적 화자를 구분하는 이유는 뭔가요? 굳이 그렇게 구분해서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소설에서 말하는 서술자와 시적 화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알고 싶어요.
시인이 작가라면, 시적 화자는 배우
시인과 시적 화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세요. 대개 사랑과 실연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실제로 사랑에 빠졌거나 실연을 당한 사람이 있나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별의 아픔이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마치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처럼 기쁘거나 슬픈 표정을 짓지요.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노래가 우리 마음을 흔들 수 없겠지요. 혹은 무대 매너가 별로라고 인기가 곤두박질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노래가 가수의 실제 경험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가수가 노래에 실감나게 감정을 담아 부를 때 큰 감동을 얻습니다. 물론 노래가 끝나면 가수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되돌아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일 뿐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노래를 하는 아이돌처럼 시의 상황에 흠뻑 취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만 시인은 시라는 무대가 아닌 작품 밖에, 즉 삶 속에 머무르는 생활인입니다. 무대 밖에서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 작곡 · 작사가처럼 말입니다.
물론 가수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노래할 수 있듯이 시인도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시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시인이 자기 이야기만 쓴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작품을 쓰기가 곤란해질 것입니다. 소재도 떨어지고 자기가 쓴 시 때문에 실제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제약도 생길 수 있지요.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허구적인 대리인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시적 화자라고 부르며 또 다른 말로는 ‘서정적 자아’라고도 하지요.
시적 화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존재한다
시적 화자는 소설의 서술자처럼 복잡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서술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다시 1인칭은 주인공 · 관찰자 시점으로 3인칭은 관찰자 ·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복잡하게 구분이 되지만 시적 화자는 이보다 훨씬 단순하게 나뉩니다. 시적 화자는 시 안에 직접 나타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가 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중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중에서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적 화자가 어떻게 다른지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작품모두 시적 화자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작품은 ‘나’가 직접 작품 속에 등장하지만, 두 번째 작품에서는 시적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설의 3인칭 관찰자처럼 객관적인 상황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적 화자가 1인칭인 경우,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과 정서를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이별의 슬픔이 그토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나’라는 화자의 감정이 ‘나’의 입을 통해 섬세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지요. 반면 시적 화자가 3인칭인 경우, 독자들은 시적 상황과 대상을 좀 더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나그네의 외로운 정서는 시에 나타난 강나루, 밀밭, 구름 등 사실적인 소재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 시에서 화자는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가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닐 수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는 서로 다른 인격이기 때문에 굳이 입장을 같이할 필요는 없지요. 특히 시인이 자기 반성과 성찰을 한다든가, 자신을 스스로 풍자할 때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광규의 「상행」에서 시인은 물질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시적 화자 자체를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분야 | 현대 시 |
목차
시에서 말하는 사람을 시적 화자라고 하는데 시인과 시적 화자를 구분하는 이유는 뭔가요? 굳이 그렇게 구분해서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소설에서 말하는 서술자와 시적 화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알고 싶어요.
시인이 작가라면, 시적 화자는 배우
시인과 시적 화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세요. 대개 사랑과 실연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실제로 사랑에 빠졌거나 실연을 당한 사람이 있나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별의 아픔이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마치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처럼 기쁘거나 슬픈 표정을 짓지요.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노래가 우리 마음을 흔들 수 없겠지요. 혹은 무대 매너가 별로라고 인기가 곤두박질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노래가 가수의 실제 경험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가수가 노래에 실감나게 감정을 담아 부를 때 큰 감동을 얻습니다. 물론 노래가 끝나면 가수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되돌아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일 뿐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노래를 하는 아이돌처럼 시의 상황에 흠뻑 취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만 시인은 시라는 무대가 아닌 작품 밖에, 즉 삶 속에 머무르는 생활인입니다. 무대 밖에서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 작곡 · 작사가처럼 말입니다.
물론 가수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노래할 수 있듯이 시인도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시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시인이 자기 이야기만 쓴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작품을 쓰기가 곤란해질 것입니다. 소재도 떨어지고 자기가 쓴 시 때문에 실제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제약도 생길 수 있지요.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허구적인 대리인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시적 화자라고 부르며 또 다른 말로는 ‘서정적 자아’라고도 하지요.
시적 화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존재한다
시적 화자는 소설의 서술자처럼 복잡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서술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다시 1인칭은 주인공 · 관찰자 시점으로 3인칭은 관찰자 ·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복잡하게 구분이 되지만 시적 화자는 이보다 훨씬 단순하게 나뉩니다. 시적 화자는 시 안에 직접 나타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가 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중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중에서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적 화자가 어떻게 다른지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작품모두 시적 화자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작품은 ‘나’가 직접 작품 속에 등장하지만, 두 번째 작품에서는 시적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설의 3인칭 관찰자처럼 객관적인 상황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적 화자가 1인칭인 경우,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과 정서를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이별의 슬픔이 그토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나’라는 화자의 감정이 ‘나’의 입을 통해 섬세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지요. 반면 시적 화자가 3인칭인 경우, 독자들은 시적 상황과 대상을 좀 더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나그네의 외로운 정서는 시에 나타난 강나루, 밀밭, 구름 등 사실적인 소재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 시에서 화자는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가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닐 수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는 서로 다른 인격이기 때문에 굳이 입장을 같이할 필요는 없지요. 특히 시인이 자기 반성과 성찰을 한다든가, 자신을 스스로 풍자할 때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광규의 「상행」에서 시인은 물질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시적 화자 자체를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
분야 | 현대 시 |
목차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일부러 반대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두고 반어라고 하던데 반어를 사용했을 때에는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을 역설법이라고 하던데 역설법을 사용하는 까닭을 설명해 주세요.
반어의 힘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지요. 대상을 기존의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색다르게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욱 집중하지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제시하면 호기심과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또한 일상적인 말에 변화를 주면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고 그 의미를 더욱 인상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반어법과 역설법은 어떤 대상이라든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일상적인 것과 달리 낯설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먼저 반어법은 표현할 내용을 실제 의미와 반대로 제시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즉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숨긴 채 반대로 말하는 방법이지요. 시험을 망친 아이에게 엄마가 화가 나서 “잘했다 잘했어”라고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반어가 사용된 표현은 본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내용만으로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반어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언어적 반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황적인 반어입니다. 언어적 반어는 겉으로 드러난 말과 숨은 의도가 정반대인 경우로 의미를 강조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중에서
이 시에서 여공들의 얼굴이 흰 것은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했거나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노동만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녀들의 얼굴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창백하고 핼쑥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다음으로 공장으로 가는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럭무럭’은 아무 걱정과 근심 없이 잘 자란다는 의미를 더하기 위한 부사어인데 공장으로 가는 아이들이 아무 걱정이나 근심이 없을 리가 없지요.
따라서 두 표현은 언어적 반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반어법은 독자들을 긴장시켜 여공들은 정말 아름다운가, 아이들은 정말 무럭무럭 크는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지요.
상황적 반어는 시에서보다는 주로 소설이나 희곡에서 사용합니다. 상황적 반어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알고 있지만 정작 작품 속 인물은 그것을 모르고 행동할 때 생기는 반어입니다. 등장인물이 작중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상황적 반어가 일어나지요. 김유정의 소설 「만무방」의 마지막 장면에서 쌀도둑을 잡으려고 기다리던 응칠이가 동생 응오가 도둑임을 알게 되는 장면이 상황적 반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설 :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진실을 내포한다
역설은 겉으로 보면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지만 그 속에 진실이라든가 진리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역설은 반어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신선함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켜 작품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역설은 모순어법과 모순형용으로 나뉩니다.
모순어법은 문장 자체에 논리적인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이에 해당합니다. ‘갔다’와 ‘보내지 아니했다’의 상황은 동시에는 가능할 수가 없는데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들지요.
모순형용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이 서로 조화롭지 않거나 배치될 때를 일컫습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1」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이 아들을 잃고 쓴 것으로 유명하지요. 유리에 비친 차고 슬픈 것은 곧 죽은 아이의 환영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아주 독특한 표현 하나가 눈에 띕니다. “외로운 황홀한 심사”. ‘외롭다’는 말은 고독하다, 쓸쓸하다와 같이 부정적인 정서를 일컫는 말이며, 이에 반해 ‘황홀하다’는 긍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외로운 황홀한 심사”는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을 꾸미는 논리적인 모순을 지닌 것이지요.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끼리 서로 꾸밈을 주고받을 때 이를 모순형용이라고 합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아들을 잠시나마 추억할 수 있다는 설렘이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시를 공부하다 보면 ‘낯설게 하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슨 뜻인가요?
‘낯설게 하기’란 쉽게 말해서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다 보면 듣는 이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비유라든가, 상징 · 역설 · 반어 등을 사용하여 일상적인 말보다 낯설게 표현하면 긴장과 집중 효과가 생기지요. ‘낯설게 하기’는 바로 이러한 전달방식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왜 시인들은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까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분야 | 현대 시 |
목차
시에서 말하는 사람을 시적 화자라고 하는데 시인과 시적 화자를 구분하는 이유는 뭔가요? 굳이 그렇게 구분해서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소설에서 말하는 서술자와 시적 화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알고 싶어요.
시인이 작가라면, 시적 화자는 배우
시인과 시적 화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세요. 대개 사랑과 실연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실제로 사랑에 빠졌거나 실연을 당한 사람이 있나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별의 아픔이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마치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처럼 기쁘거나 슬픈 표정을 짓지요.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노래가 우리 마음을 흔들 수 없겠지요. 혹은 무대 매너가 별로라고 인기가 곤두박질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노래가 가수의 실제 경험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가수가 노래에 실감나게 감정을 담아 부를 때 큰 감동을 얻습니다. 물론 노래가 끝나면 가수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되돌아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일 뿐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노래를 하는 아이돌처럼 시의 상황에 흠뻑 취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만 시인은 시라는 무대가 아닌 작품 밖에, 즉 삶 속에 머무르는 생활인입니다. 무대 밖에서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 작곡 · 작사가처럼 말입니다.
물론 가수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노래할 수 있듯이 시인도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시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시인이 자기 이야기만 쓴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작품을 쓰기가 곤란해질 것입니다. 소재도 떨어지고 자기가 쓴 시 때문에 실제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제약도 생길 수 있지요.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허구적인 대리인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시적 화자라고 부르며 또 다른 말로는 ‘서정적 자아’라고도 하지요.
시적 화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존재한다
시적 화자는 소설의 서술자처럼 복잡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서술자는 1인칭과 3인칭으로, 다시 1인칭은 주인공 · 관찰자 시점으로 3인칭은 관찰자 ·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복잡하게 구분이 되지만 시적 화자는 이보다 훨씬 단순하게 나뉩니다. 시적 화자는 시 안에 직접 나타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가 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중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중에서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적 화자가 어떻게 다른지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작품모두 시적 화자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작품은 ‘나’가 직접 작품 속에 등장하지만, 두 번째 작품에서는 시적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설의 3인칭 관찰자처럼 객관적인 상황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적 화자가 1인칭인 경우,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과 정서를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이별의 슬픔이 그토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나’라는 화자의 감정이 ‘나’의 입을 통해 섬세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지요. 반면 시적 화자가 3인칭인 경우, 독자들은 시적 상황과 대상을 좀 더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나그네의 외로운 정서는 시에 나타난 강나루, 밀밭, 구름 등 사실적인 소재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 시에서 화자는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가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닐 수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시인과 시적 화자는 서로 다른 인격이기 때문에 굳이 입장을 같이할 필요는 없지요. 특히 시인이 자기 반성과 성찰을 한다든가, 자신을 스스로 풍자할 때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광규의 「상행」에서 시인은 물질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시적 화자 자체를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다르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
분야 | 현대 시 |
목차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일부러 반대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두고 반어라고 하던데 반어를 사용했을 때에는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을 역설법이라고 하던데 역설법을 사용하는 까닭을 설명해 주세요.
반어의 힘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지요. 대상을 기존의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색다르게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욱 집중하지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제시하면 호기심과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또한 일상적인 말에 변화를 주면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고 그 의미를 더욱 인상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반어법과 역설법은 어떤 대상이라든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일상적인 것과 달리 낯설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먼저 반어법은 표현할 내용을 실제 의미와 반대로 제시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즉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숨긴 채 반대로 말하는 방법이지요. 시험을 망친 아이에게 엄마가 화가 나서 “잘했다 잘했어”라고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반어가 사용된 표현은 본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내용만으로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반어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언어적 반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황적인 반어입니다. 언어적 반어는 겉으로 드러난 말과 숨은 의도가 정반대인 경우로 의미를 강조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중에서
이 시에서 여공들의 얼굴이 흰 것은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했거나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노동만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녀들의 얼굴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창백하고 핼쑥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다음으로 공장으로 가는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럭무럭’은 아무 걱정과 근심 없이 잘 자란다는 의미를 더하기 위한 부사어인데 공장으로 가는 아이들이 아무 걱정이나 근심이 없을 리가 없지요.
따라서 두 표현은 언어적 반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반어법은 독자들을 긴장시켜 여공들은 정말 아름다운가, 아이들은 정말 무럭무럭 크는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지요.
상황적 반어는 시에서보다는 주로 소설이나 희곡에서 사용합니다. 상황적 반어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알고 있지만 정작 작품 속 인물은 그것을 모르고 행동할 때 생기는 반어입니다. 등장인물이 작중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상황적 반어가 일어나지요. 김유정의 소설 「만무방」의 마지막 장면에서 쌀도둑을 잡으려고 기다리던 응칠이가 동생 응오가 도둑임을 알게 되는 장면이 상황적 반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설 :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진실을 내포한다
역설은 겉으로 보면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지만 그 속에 진실이라든가 진리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역설은 반어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신선함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켜 작품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역설은 모순어법과 모순형용으로 나뉩니다.
모순어법은 문장 자체에 논리적인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이에 해당합니다. ‘갔다’와 ‘보내지 아니했다’의 상황은 동시에는 가능할 수가 없는데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들지요.
모순형용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이 서로 조화롭지 않거나 배치될 때를 일컫습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1」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이 아들을 잃고 쓴 것으로 유명하지요. 유리에 비친 차고 슬픈 것은 곧 죽은 아이의 환영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아주 독특한 표현 하나가 눈에 띕니다. “외로운 황홀한 심사”. ‘외롭다’는 말은 고독하다, 쓸쓸하다와 같이 부정적인 정서를 일컫는 말이며, 이에 반해 ‘황홀하다’는 긍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외로운 황홀한 심사”는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을 꾸미는 논리적인 모순을 지닌 것이지요.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끼리 서로 꾸밈을 주고받을 때 이를 모순형용이라고 합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아들을 잠시나마 추억할 수 있다는 설렘이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시를 공부하다 보면 ‘낯설게 하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슨 뜻인가요?
‘낯설게 하기’란 쉽게 말해서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다 보면 듣는 이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비유라든가, 상징 · 역설 · 반어 등을 사용하여 일상적인 말보다 낯설게 표현하면 긴장과 집중 효과가 생기지요. ‘낯설게 하기’는 바로 이러한 전달방식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왜 시인들은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까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013. 9. 15., 북멘토)교과 연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