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여행(4) - 다산(茶山)의 형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에 가다(정가네)
1800년에 비교적 천주교에 온화한 정책을 펴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겨우 11살이었던 순조가 즉위하게 되고 영조의 계비로서 노론 벽파였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1801년 남인 시파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는 등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인 정약종과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인이자 정약용의 매부였던 이승훈 등이 참수되고 둘째 형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신지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그 후 ‘황사영백서(帛書)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천주교도였던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맏형 정약현의 사위)이기도 한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자,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붓으로 깨알같이 쓴 밀서(密書)를 보내려고 하였다.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서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조선정부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다. 이미 유배를 갔던 정약전과 정약용은 이 사건으로 다시 서울로 불려 올라와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배교(背敎)를 하여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되자 다시 더 먼 곳인 흑산도와 강진으로 이배(移配)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동생 정약용은 학문적 동지이자 버팀목이던 형과 기약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벼슬에 올랐으며, 함께 산수를 유람하는 등 서로에게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벗으로 지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유배길에 나주의 밤남정(율정점 栗亭店)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헤어지게 되는데 약용은 형 약전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율정별(栗亭別)'이란 시를 남겼다. 살아생전에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의 심정을 노래한 시다.
* 율정별(栗亭別) / 다산 정약용
芽店曉燈靑欲滅 - 초가 주막집 새벽 등잔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起視明星慘將別 - 일어나 샛별을 보노라니 헤어질 일 참담하네
脈脈嘿嘿兩無言 -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두 사람 서로 할말을 잃어
强欲轉喉成鳴咽 - 억지로 말을 꺼내려하니 목이 메어 오열하네
黑山超超海連空 - 흑산도는 멀고 먼 바닷가 하늘 끝과 이어진 곳
君胡爲乎入此中 - 어찌하여 형님은 그 먼 곳으로 가시어야 하는지
유배 중, 정약용은 정약전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형의 건강을 염려하기도 했다.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이 걱정되어 형에게 개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하는 편지도 보냈다. 이 편지에는 개를 잡는 방법은 물론 개고기 요리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이 개고기 요리법은 정약용이 박제가에게 배운 것이었다. 이를 형에게 알리고 들깨까지 보내주는 정약용의 모습에서 누구보다도 형을 아끼고 생각했던 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육지에서 먼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유배를 가게 되어 흑산도로 들어가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흑산도에는 고려시대부터 19세기까지 면암 최익현 등 130여 명이 유배를 왔다고 하는데 흑산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뱃길조차 험했기 때문이었다.
흑산도에 머무는 동안 정약전은 섬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짓게 된다. 자산어보는 흑산도 주변의 수산생물 227종에 대한 이름, 형태, 분포, 습성 및 이용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아주 소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이라 할 만큼 치밀한 고증이 돋보이는 책이라고 한다.
예)
* 매생이 - 굵기가 누에에서 나오는 실보다 가늘고 소의 털보다 촘촘하며, 길이가 수척에 이른다.
빛깔은 검은빛을 띤 푸른색이다. 맛은 매우 달고 향기로우며, 국을 끓이면 부드럽고 서로 엉켜 풀어지지 않는다.
* 꼬막 - 크기는 밤과 비슷하고, 껍데기는 조개를 닮아 둥글다.
하얀색 껍데기에 무늬가 세로로 열을 지어 늘어서 있으며, 줄과 줄 사이에 도랑이 있어 마치 기와지붕과 같다. 살은 노란색이며 맛이 달다.
‘자산어보’의 자(玆)는 흑(黑) 자와 같다고 한다.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어 흑산(黑山)이 무서웠다고 한다.
정약전은 1815년에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형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牛耳堡)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하고, 뭍에서 가까운 우이도로 가려 했다. 그러나 흑산도를 떠나지 못하게 한사코 말리는 주민들을 1년 동안이나 설득하여 겨우 우이도로 거처를 옮기게 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우를 만나지 못한 채, 1816년 병으로 사망했다.
현재 흑산도 사리(沙里) 마을의 천주교 공소 아래에는 유배문화공원과 자산어보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촌서당(복성재)도 복원하여 놓았다.